미술시평

미술시평 (16) - 비전 없는 한국미술 21세기

펜보이 2007. 8. 6. 11:08

 

비전 없는 한국미술 21세기



  한 국가와 민족에는 미래에 대한 설계가 있기 마련이다.  가령 1960-70년대에는 경제적인 자립을 목표로 하는 수출입국이라든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거국적인 목표가 있었다.  거기에는 부수적으로 새마을운동과 같은 마을 부락을 단위로 하는 또 다른 형태의 범국민적인 행동강령이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난에서 벗어난다는 희망 아래 일치단결하여 공통의 목표를 향해 일로매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1세기에 접어든 오늘 우리의 국가적인 목표는 남북통일로 되어 있다.  만일 이러한 뚜렷한 목표가 설정되지 않으면 아무리 자질과 역량이 뛰어난 지도자라 할지라도 국민적인 지지와 힘을 결집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부흥시킬 수 없다.  국민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명확한 목표의 설정여부가 한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다.  국가적인 목표가 선명함으로써 국민으로 하여금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갖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도자는 그 개인적인 능력보다도 국민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인지하고 그를 위한 뚜렷한 목표를 세우는데 있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으로 국가와 민족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일이든지 뚜렷한 목표는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무언가 목표를 정하면 그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목표가 없으면 인간이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울 수 없을뿐더러 무언가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 없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공통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생각하고 일하고 그로부터 보람을 찾는 일이야말로 사회적인 인간으로서의 모습이다. 

  인간으로서의 삶의 목표는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가족, 개개인이 속한 사회, 그리고 국가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설령 실현가능성이 희박할지라도 목표를 세움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삶, 즉 사회적인 활동이 가능하게 된다.  어떤 일에 대한 목표는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공통의 목표가 있음으로써 그를 성취하는데 따르는 사회적인 인간관계가 성립되고 동시에 그로 인해 인간 삶의 양태는 진보하고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공통의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는데 따른 인간의 행동양식은 문화적인 한 속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느 면에서 미술가의 삶은 순전히 개인적인 행동양식으로 점철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작업으로 일관하는 미술에서도 때로는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통일된 집단행동양식을 보이기도 한다.  미술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미술의 새로운 표현양식의 출현은 어느 한 두 사람이 주장하는 이념 및 조형적인 창의성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를 관통하는 새로운 이념 및 사상에 대해 여러 사람이 공감하고 그를 작업에 반영함으로써 시대를 대표하는 공통의 조형성 즉, 새로운 표현양식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표현양식은 거기에 동조하는 소수의 미술가 그룹에 한정되지 않고 대 사회적인 파급효과를 갖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미술양식은 한 시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양태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일이 허다하다. 

  미술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인활동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대 사회적인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떤 특정 이념 및 사상 그리고 조형적인 새로움을 인정받기 위해 여러 사람이 한 목소리를 냄으로써 그 존재를 과시하자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미술활동은 문화적인 속성을 지니면서 마침내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특히 미술에서 다수의 작가가 한 목소리를 내게 될 경우 그것이 전혀 새로운 사고 및 행동양식을 요구하는 창조적인 작업이라면 마침내는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예술 및 문화양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미술의 사회적인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이 개인적인 작업에서 집단적인 작업으로, 즉 사회적인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될 때에는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문화양식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가는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항상 깨어 있는 의식으로 세상을 보고 미래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고 새로운 세기가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미술은 미래에 대한 목표가 없다.  한국미술이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그리고 무엇을 향해 나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한마디로 한국미술이 21세기에 대한 뚜렷한 목표도 대안도 없는 것이다.  지난 20세기가 그러했듯이 21세기도 그저 서구미술 쪽이나 곁눈질하며 그때그때 시대상황에 내맡기거나 서구미술을 전적으로 흉내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것인가. 

  미래학자들은 21세기를 맞이하여 20세기가 군사력 및 경제전쟁시대였음을 회고하면서 앞으로의 세기는 문화 경쟁시대가 될 것으로 진단했다.  이에 대해 대다수의 지식인은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동서 냉전시대에는 군사력이 국가경쟁력으로 작용했고,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1990년대 이후에는 경제력이 새로운 국가경쟁력으로 떠올랐다.  이는 세계질서가 경제대국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았다.  1990년대의 경제전쟁에서 미국은 일본이 버블경제로 하강국면으로 접어든 틈을 타서 일방적인 독주체제를 굳혔다.  경제전쟁에서 미국이 그 주도권을 쥔 현 상황에서는 이미 경쟁개념이 무색해진 것이다. 

  미국은 군사력과 경제력에 그치지 않고 다음 단계인 문화에서 다시 세계를 통합하려고 한다.  그래야만 명실공히 세계 제일인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사실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서 올라서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의 리더가 되는 길은 문화강국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는 일이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물질적인 산물이지만 문화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군사력 및 경제력의 상위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은 문화적인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통해 세계문화를 미국문화의 통제하에 두려고 하는 것이다.  경제력이 문예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과거의 역사를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진정한 승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특정 문화가 한 세상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타문화를 압도할 수 있는 우수한 문화 인자가 있어야 한다.  미국문화는 고도의 전자문명사회로 요약되는 현대의 과학문화를 상징하면서 세계 젊은이들을 사로잡는데 성공하고 있는 듯하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현대의 미국문화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거대자본이 만들어내는 문화적인 환상이 있다.  그것이 인간의 정서에 얼마만한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세계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지배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하지만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미국의 영향 아래 있는 많은 국가들은 이처럼 위력적인 미국문화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미국문화의 위세에 밀려 자칫 오랜 전통문화가 소멸되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에 사로잡힐 정도인 것이다.

  오늘 미국과 소수의 강대국을 제외한 군소 국가들이 미국주도의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그나마 존재를 잃지 않고 자존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고유의 문화적인 전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고유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나감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약소국일수록 전통적인 문화예술을 장려해야할 당위성이 있다.  전통적인 고유의 민족문화가 사라진다면 과연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지금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문화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같은 한자 문화권인 이웃 중국과 일본만 해도 그렇다.  젊은이들의 행동양식은 물론 의식에까지 깊숙이 파고드는 미국문화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 마련되고 이미 실천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사물놀이니, 난타니, 오페라 명성황후가 미국 및 서유럽무대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고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사이에 중국과 일본은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외래문화로 상징되는 미국문화와의 전쟁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논의하고 그 대책 마련에 분주한 것이다. 

  미술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그렇다.  지난 8월1일부터 13일까지 서울 프레스센터 1층에 자리한 서울갤러리와 일본문화원에서 열린 “동서양의 눈”-21세기의 회화-전은 21세기의 일본회화의 방향을 가늠해보는 전시회였다.  이 전시가 이미 10년 전에 기획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미술계는 급변하는 세계 문화지도에 일본회화가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온 것이다.  서양미술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지 1세기가 지난 현 시점에서 일본의 양화는 서구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보다 일본적인 정서에 밀착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일본적인 양화라는 새로운 표현양식을 성립시키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동서양의 눈”이라는 전시명이 시사하고 있듯이 서양의 미술양식을 동양의 정서, 아니, 일본의 정서에 결합시켜 서구에서 볼 수 없는 보다 일본적인 미술양식으로 재창조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에 들어선 일본회화의 현주소이자 미래의 얼굴인 것이다.  일본은 이처럼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토착화하는 길을 모색해온 것이다.  물론 이 전시회는 양화에 국한하지 않고 일본화까지 함께 전시함으로써 일본화의 현재 및 현대성에 대해 고심하는 작가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게 했다.  현대성으로 상징되는 서구회화의 조형개념을 일본적으로 해석하고 소화해서 일본화의 현대성이란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 그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창조에 능한 일본인의 감수성으로서는 당연한 일인 듯싶지만, 외래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경우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한편 지난 7월초 북경 중국미술관에서는 “20세기 중국 유화 대표작”전이 열렸다.  청나라가 멸망한 1911년을 기점으로 20세기가 시작되는 단계에서 활동한 작가들로부터 현재 활동하는 중견에 이르는 대표적인 작가들의 대표작이 망라된 대규모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를 보니 중국유화가 21세기에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추상으로 상징되는 현대회화가 전통적인 구상회화보다 양이나 질적으로 떨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최근 중국화단에 불고 있는 서구미술에 대한 관심은 이제 보편적인 단계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점은 뒤늦게 추상세계에 뛰어든 중국현대회화는 내용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한국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한국 현대회화의 경우 한국작가의 것이라고는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서구의 양식 및 형식 심지어는 내용까지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반해 중국현대회화는 보다 중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눈으로 흉내내는 수준이 아니라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명확한 조형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 근거를 작가들 대다수는 중국인이라는 자의식에 두고 있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20세기 중국유화 대표작”전은 단순히 과거를 돌아본다는 데 의미를 두는 전시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지난 세기 중국유화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 보면서 21세기에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하는 방향설정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전시회의 기획의도는 출품작가들이 중심이 된 연토회를 통해 확연히 드러났다.  자유토론 형식의 연토회에서 북경 중앙미술학원 교수들이 주제를 발표하고 참가자들이 질문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중국유화의 비전이 떠오르는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자리는 불투명하게 느껴지는 중국유화의 미래에 대한 작가들의 의문을 잠재우고 어떤 확신을 심어주는 기회가 된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여기에서 다달은 결론은 맹목적으로 서구미학을 좇을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는 언제나 중국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이 그러했듯이 서구미학을 수용하되 시간을 두고 저절로 중국화 되는 길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우수한 외래문화를 수용하되 자국의 민족적인 정서에 동화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자기방식으로 토착화한다는 아주 단순한 논리이다.

  주변강국들이 외래문화의 유입에 대해 이러한 논리로 대응하고 있을 때 우리는 과연 무슨 생각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과연 문화전쟁 시대라고 예측되는 21세기에 우리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어떤 적극적인 방안 또는 대응전략, 아니면 또 다른 비전이 있는가.  한국미술을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신항섭) 


 <"미술신문" 2000년9월20일(제2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