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15) - 신뢰 잃은 미술시장

펜보이 2007. 8. 5. 08:21
 

  신뢰 잃은 미술시장



  세상은 무상하다.  그렇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일정한 삶의 시간을 가지고 태어나는 생물체야 그렇다 치고, 불변의 보석으로 여겨지는 금강석이라고 할지라도 영원히 그 광채를 발할 수는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와 물질은 변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조물주의 섭리이다.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생하리라 믿고싶어 한다.  그러나 생로병사의 그 엄연한 질서 또는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인류문명을 일구어온 그 탁월한 능력으로 만사를 해결할 듯 싶지만 자기 몸 하나 뜻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하지만 인간은 유한한 삶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기에 현실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자신의 노력에 의해 얻은 재화를 더욱 부풀리고자 애쓰는 것이 그 하나의 예이다.  재화란 인간 삶의 한 조건인 것은 분명하지만 일정량을 넘어서면 거기에 속박을 당하게 된다.  재화가 주인이 되고 자신은 재화를 보존하고 관리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재화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재화의 수량은 한정되어 있다.  더구나 삶의 조건이 반드시 재화로만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재화를 전능의 가치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리고 거기에 전적으로 매달린다.

  오늘 미술인들이 부딪치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 많이 가진 자와 비교하는 데 따른 상대적인 빈곤인지도 모른다.  예술가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하루 세끼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었다.  예술가라고 해서 가난을 당연시하는 세상이 아니게 되었다.  예술을 물질적인 가치로 환산하는, 물신주의가 팽배하는 세상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순수한 창작정신을 지킨다는 것은 몹시 어렵다.  재화의 다소로 사람의 능력을 저울질하는 사회구조 탓이다.  거기로부터 자유스럽고자 해도 가난을 오히려 죄악시하는 듯한 사회적인 분위기로 인해 예술가로서의 순수한 의지를 지킬 수 없다.  돈을 벌지 못하는 예술가는 무능한 인간으로 치부하는 듯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세상을 밝고 맑게 만드는 청정제 역할을 한다는 예술 본래의 순수한 이념을 퇴색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수출경제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한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예술은 숭고한 것이었다.  먹고사는 문제를 초월하여 오직 자기 신념에 의해 창작활동에 전념하는 예술가의 모습은 성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예술의 순수성은 바로 먹고사는 문제까지도 초월하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예술가는 일반인의 일상적인 삶의 가치보다 우위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면서 예술가의 창작행위와 그 결과는 모두 물질적인 가치로 환산하게 되었고, 예술가의 사회적인 위치는 일반인의 수준으로 내려서게 되었다.  예술행위가 물질적인 가치로 계산됨으로써 예술의 순수성이 왜곡되거나 변질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동시에 예술가의 자존심은 박탈당하고 그 행위가 단순한 돈벌이처럼 인식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로부터 예술은 일반 상거래와 마찬가지로 흥정의 대상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예술가의 창작행위는 단순노동이나 다름없는 밥벌이로 전락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도 예술가의 창작에 대한 열정이 더 이상 순수하거나 고상하게 보이지 않게 된 까닭이다.  이러한 결과는 사회만의 잘못도 예술가만의 잘못도 아니다.  시대의 변화 즉, 인간 삶의 가치관의 변화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물질적인 가치로 환산하려는 이 시대의 삶의 방식이 그리 만들고 있는 것이다.

  미술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고 야단이다.  그간 미술계의 사활이 걸린 문제인 양도소득세법 시행이 3년간 유예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미술시장이 되살아날 조짐은 없다.  살아나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천장부지로 치솟던 일부 유명작가의 그림 값이 떨어진 것은 차라리 시장원리에 따른 일시적인 가격변동이라고 할지라도,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한 가능성 많은 젊은 작가들의 저가의 작품도 거의 팔리지 않고 있다.  어쩌다 팔린다고 해야 기껏 이삼백 만원 이내의, 몇 몇 인기 작가들의 소품에 한정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상업화랑들은 거의 손을 놓고 있을 정도이다.  애써 전시회를 마련해보았자 최소한의 기본경비도 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소 화랑을 막론하고 그저 팔짱을 낀 채 시절만 탓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동안 인기 높았던 중진 원로 작가들의 전시회를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 미술시장의 불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와 같은 현재의 미술시장의 불황은 미술계 자체의 문제보다는 우리 나라 경제의 구조적인 약점에 따른 경기침체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국가경제의 불안 및 경기 침체에 앞서 기존의 미술품 수집가들이 가격폭락은 물론 환금성을 상실한 미술품의 가치에 대해 환멸을 느낀 나머지 아예 미술계를 등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부동산 및 증권에서 흘러나온 유동성 자금의 일부가 미술계로 들어오면서 투기성격이 짙은 미술품 구입 붐을 일으켰다.  그러자 미술시장을 이끌어 오던 일부 작고 작가 및 유명 작가들의 작품은 현금을 가지고도 살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미술품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고 구입하고자 하는 대기 자금은 넘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유명 작가의 작품 값은 단기간에 급등하고 말았다.  몇 몇 인기작가의 작품은 입도선매가 이루어질 정도였다.  한마디로 비정상적인 가수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와 같은 단기적인 미술품 가격급등은 비인기 작가들의 작품 가격마저 덩달아 뛰어오르는 기현상을 낳았다.  한국작가들의 미술품 가격이 경제력에서 월등히 앞선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은 바로 투기열풍에 따른 일시적인 과수요 현상에서 나온 산물이다.  시장원리에 관계없이 ‘누가 얼마를 받으니까 나도 그 정도는 받아야 되지 않겠느냐’, 또는 나이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가격 인상은 예술가로서의 자존심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돈을 벌자는 목적이 우선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그림도 없는 상황에서 그림 값을 미리 받는 식의 거래에 응하는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일본에서 시행하고 있던 호당가격제를 도입하면서 그림 가격이 크기로 정해지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호당가격제라는 것도 미술품 가격을 올리는 데 일조를 했음은 물론이다.  가격산정 및 판매에 편리한 점은 있으나 작품의 내용 및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작가에 따라 20호 또는 30호까지 일률적으로 호수에 의해 가격이 정해짐으로써 가격상승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 시기에 일부 화랑과 유명작가들은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1992년경부터 일본경제 성장의 거품이 빠지면서 부동산 및 미술품 가격이 급락하자 그 여파는 한국에까지 미쳤고 미술시장 열기는 서서히 식어갔다.  구조적으로 일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한국경제가 일본의 영향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 동안 자금시장을 이끌어 온 부동산과 증권 열기가 식으면서 미술품에 들어왔던 투기성 자금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미술품 값은 예정된 하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경기가 나빠지자 기업의 도산이 이어지고 미술품에 투자했던 사람들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미술품을 들고 나왔다.  그렇지만 이미 수요가 끊긴 미술시장에서 되나온 미술품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다.  돈이 당장 필요한 사람들은 구입가격 이하로 내놓았으나 역시 구매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투어 그림을 올려 파는데 앞장섰던 화랑들조차 손을 들었다.  한마디로 환금성을 잃고만 것이다.

  미술품은 문화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문화생활과 함께 동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 미술품이다.  가격의 등락이야 시장상황에 따르는 일이라 하더라도, 미술품은 급전이 필요할 때 가지고 나가면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래서 투자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아무리 재화로서의 가치를 계산하지 않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미술애호가라고 할지라도 환금성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개인의 삶에는 기복이 있게 마련이어서 설령 현재 그림을 구입할 수 있는 여유가 있더라도 언젠가는 그림을 되팔아야 하는 처지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미술품 구입에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는 것은 그러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투자, 즉 저축의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의 미술시장 상황을 보면 미술애호가들의 이와 같은 기대가 헛된 꿈이 아니었나 하는 회의감을 안겨주고 있다.  수천 만원 대를 호가하던 인기 원로작가의 작품 가격이 절반 가까이 떨어졌는데도 구매자가 나서지 않고 있다.  고가의 미술시장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간혹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몇 억 원 어치가 팔렸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미술시장의 활성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아주 미미한 거래량에 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거래되는 작품의 대다수가 작고작가 또는 고미술품에 집중되고 있다.  화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역작가의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은 불투명한 시장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나마 작고작가의 작품이 어쩌다 팔리는 것은 그 재화적인 가치가 어느 정도 검증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반면에 현역 작가의 작품이 팔리지 않는 것은 미술시장에서 환금의 가치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불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즉 예술적인 가치는 제쳐두고라도 현재의 가격을 신뢰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역작가의 경우 작품 가격은 앞서 말했듯이 투기성 자금의 유입에 따른 비정상적인 가수요 현상이 일어난 199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거래된 가격이다.  그 당시 가격을 올린 것은 어쩌면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른 자연스러운 인상요인의 결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내용을 보면 화랑과 작가들이 담합해 인상했다는 의혹을 면할 수 없다.  내일의 미술시장 상황이 어떻게 바뀌든 간에 오늘 돈을 벌고 보자는 얄팍한 속셈이 미술품 가격의 인상요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화상들은 미술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가지고 나오면 되사겠다고 장담하면서 구매를 부추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경제적인 불황으로 미술품을 팔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구매시 약속대로 되사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공수표를 날린 격이다.  이러니 미술애호가들이 미술시장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을 겪은 미술애호가들이 정나미가 떨어져 아예 화랑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일소에 부칠 일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미술시장이 장기적인 불황의 터널에서 빠져 나올 조짐을 보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단적으로 말해 자업자득인 것이다.     

  모든 형태의 시장에서 발생하는 거래에는 신용이 제일의 조건이다.  신용을 잃은 시장이 붕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 미술시장에서 겪고 있는 불황은 경기침체에 따른 여파라기보다는 미술계 자체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상도의를 저버리거나 예술가로서의 순수성을 망각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병든 상업주의의 한 결과물인 것이다.  내일이야 어찌 되든 우선 돈을 벌고 보자는 얄팍한 상업주의와 거기에 고개를 숙인 우리 작가들이 신뢰할 수 없는 시장상황을 만든 것이다.  문화사업이라는 고상한 웃음을 흘리면서 병든 상업주의를 불러들인 일부 화상들이 먼저 참다운 상도의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울러 예술가의 명예를 돈으로 바꾸려하는 일부 작가들도 순수한 예술가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가야 한다.  미술시장의 활성화는 바로 이와 같은 미술계 내부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가능하다.  한마디로 실추된 미술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신항섭)

                                                                

<"미술신문" 2001년 1월20일(제25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