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17) - '예술원(미술분과), 무엇이 문제인가' 기사를 보고

펜보이 2007. 8. 7. 11:50
‘예술원(미술분과), 무엇이 문제인가?’ 기사를 보고


  인간으로서의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은 입고 먹고 자는 일이다.  입는다는 것은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서의 대인관계에 따른 예를 갖추는 일이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일이다.  그리고 잔다는 것은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 위한 일이다.  이 정도의 조건을 갖추면 사회적인 동물로서 살아가는데 큰 불편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의식주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다.  인간사회는 급속한 인구팽창 및 문명의 발달과 비례하여 갈수록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삶의 질적인 향상에 대한 욕구가 강해질수록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은 점차 늘어나기 마련이다.  어쩌면 인간 삶에서 의식주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예술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삶의 질적인 향상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입고 먹고 자는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즐거움을 위해 기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 예술이 없을지라도 사회활동을 하며 살아가는데 큰 불편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술을 인간 삶과 관련한 필요조건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입고 먹고 자는 일 이외의 그 무엇을 기대하는 까닭이다.  예술은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사회적인 기능의 하나이다. 

  예술은 물질적인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어쩌면 예술은 인간이 만들어낸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호사를 위한 최상의 장치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  예술은 인간이 발견해낸 가장 고등한 인간으로서의 한 증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품 및 예술행위 를 통해 고양된 정신과 감정의 세계를 체험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만 지각될 수 있는 아주 특수한 체험이다.  그 특수한 체험은 물질적인 소유에서 오는 만족감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예술품이나 예술행위를 봄으로써 억압된 현실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란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카타르시스 즉, 정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예술품이나 예술행위는 그를 생산하는 자, 즉 예술가가 혼신의 노력으로 닦은 기술과 정신의 집약으로서, 그 의미가 한정되지 않고 감상자에 따라 무한한 가치를 생산하는 자율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창작의 기능 중에서 인간의 정신 및 감정을 해방시킬 있는 정화기능이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이자 잠재력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예술은 어느 하나의 의미에 고정되지 않고 감상자와 더불어 그 의미를 무한히 확장 재생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술은 마치 생물과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가치 중에서 예술처럼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달리 없다. 

  이와 같은 예술이 사회적으로 확고한 지위를 누리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예술이 의식주와는 또 다른 인간 삶의 한 양태임을 일찍이 인정하고 있었지만 예술의 생산자를 장인 정도로만 취급해왔다.  그러다가 예술이 단순한 신체적인 기능의 산물만이 아닌 고도의 정신적인 가치임을 이해하게 되면서 현재와 같은 개념이 정립되었고, 마침내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기까지에는 수 천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현대에 와서 예술가는 사회적으로 가장 명예로운 직업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예술의 진면목이 물질을 초월하는 곳에 있음을 깨닫게 된 이후의 일이다.  지적인 현대사회가 예술인들을 최고의 명예로운 자리에 그 거처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계 원로들의 집단인 예술원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최고의 헌사이자 존경의 표시이다.  예술원은 학술과 예술을 망라한 사계 최고 권위자들의 집단이다.  단순히 사계를 대표한다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뿐만 아니라 그 업적에 대한 우리 사회가 보내는 최대의 예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술원 회원이 된다는 것은 예술세계 그 궁극에 도달했다는 사회적인 공인의 의미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데 웬일일까.  우리 나라 예술원(미술분과)에 대한 미술계의 인식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마땅히 권위를 인정받고 또한 존경을 받아야 할 예술원 회원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공인 받은 최고의 미술인들이 미술계로부터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나왔다.

  미술신문에서 마련한 ‘21세기 미술문화 발전을 위한 비전 제시’라는 기획특집을 통해 예술원(미술분과)의 문제점과 개혁을 위한 설문 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예술원(미술분과),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명제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절대다수의 미술인들이 예술원의 현행제도 및 운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이 드러났다.  미술인들만을 대상으로 했기에 사회 전체의 의견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미술인들이야말로 예술원을 가장 가까이 바라보는 입장임을 감안할 때 조사결과의 신뢰도는 오히려 높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이번 설문 조사에서 드러난 예술원의 문제점을 살펴보면, 첫째 미술인의 대표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고, 둘째 예술원 회원 자격 및 선출방식에 문제점이 있으며, 셋째 현행 예술원 회원에게 돌아가는 예술원상 제도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난 부정적인 견해는 그 동안 예술원에 대한 미술계의 불신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미술계 내외에서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온 사항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문제점이 지적될 때마다 예술원 측에서는 예술원 회원이 되지 못한 소수의 견해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러면서 마치 남의 일처럼 무관심하거나 한 귀로 흘려버리는 식이었다.  이러한 예술원의 태도에 대해 미술계는 ‘예술원이 비생산적인 원로들의 친목단체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양로원이나 다를 게 무엇이냐’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이번 설문조사 결과가 아니더라도 예술원 미술분과에 대해 미술계에서는 말이 많았다.  예술원 회원 자격기준 및 선정과정이 선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술계 발전을 위해 도대체 무슨 일을 했으며, 상금이 이천만원에 달하는 예술원상은 그 운영방식이 모호해서 나누어먹기가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외부의 낯뜨거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예술원 운영은 전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처지에 이번 설문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간 미술계를 떠돌던 의구심이 설문조사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예술원의 주요업무 가운데 ‘예술진흥에 관한 정책 자문과 건의’라는 조항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 동안 과연 예술계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느냐는 의심을 받을만하다.  국가의 예술정책 입안 및 시행과정에서 예술원이 한 역할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이 거의 없는 듯하다.  실제로는 예술원이 본래적인 업무에 충실해왔는지도 모른다.  설령 정책 자문기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이 그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그 또한 예술원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술원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존재를 내외에 알림으로써 여론을 수렴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정책자문기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미술협회의 운영과 관련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사회문제화 되고 있는 현실에서도 예술원은 그저 팔짱을 끼고만 있다.  미술계 원로들로 구성된 예술원이 직접 나서서 지혜와 슬기를 발휘하면 어떤 해결책을 이끌어낼 수 있으련만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불난 집 불 구경하듯 미술계 원로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진정 한국미술계에 과연 원로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 미술계의 일반적인 지적이다.

  그런가 하면 예술원 회원 선출과 관련해 이런 저런 불미스러운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예술원 회원 선출 절차가 공정하냐는 것이다.  예술원 미술분과 회원들의 전시회 카탈로그 인사말처럼 ‘우리 나라를 대표하고 미술사적으로도 주류를 이룬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여온 원로 예술가들’이라는 확고한 자기인식이야말로 예술원 회원의 자격기준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를 기준으로 할 때 ‘미술사적으로도 주류를 이룬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원로’가 회원으로 선출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격기준은 추상적이긴 하다.  그렇더라도 현재 예술원이 여기에 적합한 자격을 갖춘 원로 예술가들로만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을 살만하다.  ‘미술사적으로 주류를 이룬 선구자적인 역할’이라는 의미를 확대해석하지 않더라도 개인적인 미술창작활동과 관련해 독창적인 세계를 이룩한 작가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원로’의 기준을 연령으로 따진다면 과연 몇 살을 말하는 것인지도 명확치 않다.

  예술원상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가 압도적이었다.  회원끼리 돌려가며 받는 듯한 인상을 주는 현행 예술원상 시행은 학술원처럼 비회원에게 시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예술창작과 관련하여 누구나 납득할만한 업적을 쌓은 회원에게 상이 돌아간다면 나무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다할 창작활동이나 업적도 없이 그저 순차적으로 회원에게 돌아가는 실정이라면 ‘상을 위한 상’으로서의 의미밖에 없다.  이처럼 무의미한 수상제도는 현실적인 요구에 맞도록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번 설문조사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는지 그 자세한 내용을 밝히고 있지 않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설문조사에서 제기된 문제점은 객관적으로도 검증할 수 있는 사항이어서 이전처럼 소수의 견해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번 설문조사를 계기로 예술원은 스스로를 냉철히 돌아봄으로써 미술인의 기대에 부합하는 진정한 미술계 원로들의 기관으로 새롭게 변신해야 한다.  예술원의 권위는 밖에서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예술원의 권위와 그에 따른 제도 및 운영은 회원 스스로에게 달려 있을 만큼 자율성이 강한 것도 예술원에 대한 미술계의 기대를 높이는 요인이다.  한마디로 타율적인 관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자율성이 강한 기관인 것이다.  그러기에 어디까지나 자율적인 개선을 기대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적되고 있는 문제점은 이번 설문에서 나타난 것처럼 예술원의 권위 및 회원의 품위를 스스로 손상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과감히 개선함으로써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원, 즉 명실상부하게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명예로운 미술인의 대표기관으로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원은 예술인 최고의 명예기관인 만큼 그에 상응한 권위를 지녀야 함은 물론, 회원 개개인의 자격요건을 엄정하고 명확히 해야 할뿐더러, 미술계의 발전과 관련한 정책을 자문할 수 있는 자체 연구기능을 강화하거나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예술원이야말로 평생을 예술창작 활동에 몸을 바쳐온, 명예로운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사회를 위한 마지막 봉사와 헌신의 기회인지 모른다.  예술원은 명예로운 예술가에게 바치는 우리 사회의 최대의 예우인 만큼, 예술원 회원들도 이러한 사회적인 예우에 무언가 보답을 하는 것이 미덕이다.  단순히 원로 대접을 받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어른의 모습은 아니다.  자신이 갈고 닦은 예술적인 생산물로 사회에 공헌하는 것은 물론이요, 오랜 삶의 경륜에서 얻은 지혜와 슬기를 발휘하여 보다 나은 현재 및 미래를 위한 사회의 지침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경험보다 나은 스승이 없는 까닭이다. 

  일체의 사사로운 물질적인 욕구로부터 초연하게 오직 예술의 순수성만을 탐닉해온 숭고한 예술정신의 산 증표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이 혼탁해질수록 더욱 귀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순결한 인간정신의 상징인 예술이기에 그렇다. (신항섭)

    

  <"미술신문" 2001년 3월20일 (제26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