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자리

길 성 '신이도다완' 초대전

펜보이 2007. 7. 13. 15:44

 

                                                                                                              길성 작 '청이도 다완'

 

吉 星의 “新井戶茶碗”


申恒燮(미술평론가)


차를 마시는 일 자체는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니다. 차와 찻잔만 있으면 된다. 실제로 중국인들이 일상적으로 차를 마시는 일은 아주 간소하다. 찻잔에 직접 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는 것이다. 그러나 차가 일상적인 생활문화에서 정신적인 가치를 겸비한 고급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다소 복잡한 절차와 격식이 요구된다. 차에는 인체의 신진대사를 돕는데다가 정신을 맑게 하는 각성효과까지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는 까닭이다. 예로부터 차를 마시는 행위에 이르는 과정을 중시하면서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도 정신적인 세계를 지향할 수 있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茶會차회, 또는 茶道다도라는 문화가 생겨난 것인데, 이는 인간사회의 다양한 사회활동 중에서도 가장 고급한 문화현상의 하나가 되었다.

차회나 다도와 관련하여 거기에 쓰이는 각종 다구 또한 매우 중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중에서도 찻잔은 최종적으로 차를 마시는데 쓰이는 도구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단순히 차를 마시는 행위에 필요한 기능성뿐만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시 말해 신체적인 접촉과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한 감성 및 정신의 고양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찻잔에 완상을 위한 미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덧붙여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차의 맛을 음미하는 데 곁들여 찻잔이 지닌 형태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고상한 예술세계로 진입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찻잔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일은 다도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덕목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다도에서 자칫 간과되기 쉬운 점이 하나 있다. 차가 신체적인 건강에 기여하는 반면에 지나치면 되레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건강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용도로서의 찻잔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여기에서 비로소 찻잔으로서 그토록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이도다완 井戶茶碗’의 존재성이 부각된다.

‘이도다완’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설이 많지만, 현 시점에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밥그릇으로 쓰인 막사발이라는 견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단정하기는 이를 지 모르나 찻잔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제기되고 있을뿐더러, 실제로 그 외형적인 여러 특징으로 보아 이러한 문제제기는 충분히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는 길 성(吉 星)이 만든 찻잔, 즉 ‘신이도다완新井戶茶碗’을 통해 입증되고 있는 사실이기에 그렇다.

애석하게도 일본에만 남아 있는 ‘이도다완’이 가지고 있는 그 외형적인 몇 가지 특징, 즉 육각형 형태의 유약균열이라든가, 굽 부분에 형성된 매화피의 갈라진 형태, 유약이 묻지 않은 태토부분에 정착된 검은 색깔, 비파색깔의 표면착색, 크기에 따른 상대적인 가벼움, 몸통을 두드렸을 때 나는 도기의 소리 따위로 미루어 이는 찻잔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길 성이 만든 ‘신이도다완’은 이와 같은 ‘이도다완’의 외형적인 형태에 거의 일치한다. 여기에다 하나를 덧붙이면, 차에 있는 타닌 성분이 찻잔의 몸통 바깥부분으로 배출되어 차의 맛이 현저히 순화된다는 점이다. 백토분장의 ‘신이도다완’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갈색의 타닌 성분이 몸통 바깥으로 빠져나와 착색이 되는 사실을 확인한 필자 역시 놀란 바 있다. 지나치면 몸에 해로울 수 있는 타닌 성분의 일부를 몸통 바깥으로 배출시킨다는 것은 찻잔으로서의 기능성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몸에 이로운 기능이 있는 찻잔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이는 길 성이 만든 ‘신이도다완’을 사용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찻잔에 담긴 이러한 기능성이 ‘이도다완’에도 있다면, 길 성이 만든 ‘신이도다완’은 마땅히 ‘이도다완’의 부활이라고 할만하다.        

길 성이 만들어낸 ‘신이도다완’은 직접적인 비교가 이루어진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도다완’의 외형적인 특징에 아주 근사하다. ‘이도다완’이 가지고 있는 세월의 흔적만을 제외한다면 서로 다른 점을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도다완’이 궁극적인 찻잔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그 형태적인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형태 이면에 숨겨져 있는 찻잔으로서의 기능성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이도다완’이 가지고 있는 찻잔으로서의 기능성이 간과되면서 막사발, 즉 밥그릇으로 격하되었다. 그러기에 ‘이도다완’을 재현하려는 수많은 도예가들의 노력은 이제껏 그 외형적인 형태만을 답습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모양이 비슷하면 ‘이도다완’의 재현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찻잔과 막사발에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찻잔과 밥그릇은 그 효용성이 전혀 다르므로 재질이라든가 만듦새는 물론이려니와 사용방법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길 성은 바로 이 점을 ‘신이도다완’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무엇보다도 ‘이도다완’이 가지고 있는 재질, 즉 흙이야말로 찻잔으로서의 기능성을 결정짓는 관건임을 간파했다. ‘이도다완’을 만든 흙을 찾아내지 않으면 ‘이도다완’의 부활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길 성의 노력은 마침내 ‘이도다완’을 성립시킨 흙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신이도다완’을 통해 거꾸로 ‘이도다완’의 실체를 밝히는 데까지 이르렀다. 만일 ‘신이도다완’의 흙이 ‘이도다완’을 만든 흙이 분명하다면, ‘이도다완’은 막사발이 아니라 찻잔이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는 것이다. ‘신이도다완’이 가지고 있는 기능성으로 미루어 결코 밥그릇일 수 없겠기에 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샘플이 없는 상황에서는 ‘이도다완’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불가능하므로 직접적인 비교는 가당치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제한적인 상황에서도 그 외형적인 특징으로나마 ‘이도다완’이 가지고 있는 찻잔으로서의 고유의 기능성을 유추할 수 있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다시 말해 길 성의 ‘신이도다완’을 통해 ‘이도다완’의 실체를 역추적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았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길성 작  '청이도다완' 

 

길 성의 ‘신이도다완’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작품이다. 그러므로 그 외형을 ‘이도다완’에 반드시 일치시켜야 할 의무는 없다. ‘신이도다완’은 길 성의 기술 및 감각의 소산일 따름이기에 그렇다. 비록 그 외형적인 크기나 모양새가 ‘이도다완’에 기준한 것은 분명하더라도 ‘이도다완’의 재현이라고는 할 수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부활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적확하리라. ‘신이도다완’이 ‘이도다완’의 몸체로 다시 태어났다는 가정이 정확하다면 말이다.

길 성의 ‘신이도다완’은 오오이도다완을 비롯하여, 고이도다완과 고히끼, 그리고 소바까지 다양한 종류를 아우른다. ‘이도다완’의 형태를 따른다고 할지라도 기존의 ‘이도다완’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자연스러움은 ‘이도다완’이 더 우수할지 모른다. 그러나 길 성의 ‘신이도다완’은 찻잔으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조건을 충분히 충족시킨다. 특히 최근에 나온 작품들 중 ‘오오이도다완’ 형은 그 모양이 위풍당당하고 기세가 좋다. 특히 요변이 많아 정형에서 탈피한 불균형의 조형적인 비례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색태 또한 격조가 높은 작품이 적지 않다. 컬렉션 대상으로서 지목될 수 있는 품격을 갖춘 작품들이 적잖이 출몰한 것이다. 특히 요변에 의한 유약의 다양한 이미지는 귀중한 찻잔으로서의 나무랄 데 없는 품격을 보조한다. 그런가 하면 ‘소바蕎麥’ 형태의 찻잔은 길 성 자신만의 비례감각을 찾아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안정된 조형미를 얻고 있다. 이 역시 요변이 많아 감상하는 즐거움이 크다.

길 성의 ‘신이도다완’이 가지고 있는 찻잔으로서의 특징 중에서 특별한 것이 있다. 이른 바 ‘숨 쉬는’ 찻잔으로서의 기능이 뛰어난 것이다. 찻잔의 몸체에 기공이 많아 타닌 성분을 밖으로 배출시킨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수분이 안팎으로 소통한다. 그러므로 사용하는데 따른 외형상의 급격한 변화는 자기만의 찻잔을 만드는 즐거움을 준다. 사용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짙은 찻물이 들면서 찻잔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특성에 따라 독특한 색태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릇 하나하나마다 독자적인 가치를 갖게 되는 셈이다. 이로써 ‘이도다완’의 변화무쌍한 표정이 만들어진 경로를 짐작할 만하다.

길 성의 ‘신이도다완’은 ‘이도다완’의 부활이라는 꿈을 성취했으니, 이제는 독자적인 감각의 찻잔을 기대해도 좋을 시점이 아닌가싶다. 다시 말해 찻잔으로서의 기능을 갖추었으므로 이 시대감각이 요구하는, 또는 그 자신만의 미적 감수성에 의탁하는 새로운 자태의 찻잔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현대라는 시제가 요구하는 차 문화의 완성에는 이 시대감각에 맞는 찻잔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길 성은 이러한 요구를 선도할 수 있는 모든 조건 및 역량을 갖추었다. 길 성의 ‘신이도다완’은 이 시대의 차 문화의 진정한 부흥을 이끄는 꽃으로서 손색없다.   


<이 글은 지난 1월 서울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열린 초대전 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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