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집

나비 꿈 (4) - 어둠

펜보이 2007. 6. 25. 11:57
 

  

  어둠 暗

 

  머리와 수염이 온통 하얀 산신령이 천년 묵은 나무 그늘 아래서 글씨를 쓰고 있었다. 산신령은 옷마저 하얀 색이어서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눈사람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산신령은 하얀 종이를 펴놓고 멋진 수염처럼 큰 붓으로 먹물을 듬뿍 찍어 글씨를 쓰고 있었다. 산신령이 쓰는 글씨는 귀신을 물리치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귀신을 물리친다는 부적이었다.    산신령은 어쩌다 먼 곳에 있는 친구를 찾아가게 되어 산을 비우게 되면 이를 알아챈 귀신이 마을 집집을 찾아다니며 나쁜 짓을 일삼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귀신의 해코지를 막아주려 부적을 쓰는 중이었다. 그러나 산신령은 너무 나이가 많아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손의 움직임마저 둔해져 글씨 쓰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때마침 귀신이 산신령의 동태를 살피려 왔다가 이 광경을 보았다. 산신령의 등 뒤로 바짝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자신을 물리치려는 부적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귀마저 어두운 산신령은 귀신이 옆에서 어른거리고 있는 줄도 모르는지 부적 쓰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부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귀신은 천년 묵은 나무에 살금살금 올라가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산신령에게 슬쩍 떨어뜨렸다. 나뭇가지는 산신령이 쥐고 있는 붓을 내리쳤다. 산신령은 붓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붓에 묻힌 먹물이 얼룩을 만들어 그만 부적은 못쓰게 되었다. 산신령은 귀신의 장난인 줄도 모르는 채 다시 다른 종이에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귀신은 이번에는 나뭇가지를 벼루 위에 떨어뜨렸다. 벼루 위에 떨어진 나뭇가지는 사방으로 먹물을 퉁겼다. 하얀 종이 위에 퉁긴 먹물은 부적 글씨를 망치고 말았다. 

  산신령은 화가 나서 먹물을 듬뿍듬뿍 찍어다가 부적 글씨를 지우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하얀 종이는 온통 먹물로 뒤덮였다. 부적 글씨는 간 곳 없이 하얀 종이가 까맣게 변하고 말았다.

'우화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비 꿈 (6) - 달  (0) 2007.06.25
나비 꿈 (5) - 해  (0) 2007.06.25
나비 꿈 (3) - 빛  (0) 2007.06.25
나비 꿈 (2) - 소리  (0) 2007.06.25
나비 꿈 (1) - 우주  (0) 2007.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