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2) - "월식"

펜보이 2007. 6. 22. 14:40

 


  ‘月蝕(월식)’

 

  김명수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국 성큼

  성큼

  남겨 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 주던 저녁


달은 별과 함께 우리 인간에게 오랜 동안 신비와 환상의 대상이었다.  인류가 지구상에 첫 발을 딛는 순간부터 달은 그런 모습으로 자리해왔다.  적어도 아폴로호가 우주인을 싣고 달에 착륙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우리로부터 달의 신비와 환상을 단숨에 빼앗아 버렸다.  텔레비전을 통해 본 달에는 계수나무도 떡방아 찧는 토끼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단지 흙먼지와 고요만이 있을 뿐인 죽음의 땅이었다.  그러한 모습이 달의 실체이다.

유사이래 수많은 문학가들이 저마다 타고난 감성으로 그 신비와 환상을 부풀려 온 달이 기껏 흙먼지뿐인 죽음의 땅이라니.  문학가들의 그 유려한 수사를 돕던 달의 신비와 환상이 이제는 정녕 메마른 정서만을 남기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실망하지 말자.  흙먼지 위에 우주인의 발자국이 선명히도 찍히던 그 참담한 장면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달은 여전히 우리 삶의 정서 한 가운데서 밤을 지켜주고 있지 않은가.  달의 모습은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화 속에서 처음 신비와 환상을 심어주던 그 모습 그대로 오늘도 어린이들의 잠과 꿈을 든든히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달에 계수나무가 떡방아 찧는 토끼가 없다한들 무엇이 문제인가.  달은 어김없이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고 어머니와 누이의 시름을 달래주지 않는가.  더불어 아이들은 밤마다 꿈길에서 달의 쪽배를 타고 멀고 먼 별나라로 여행하고 있지 않은가.  전능의 칼로 여기는 과학이 제아무리 발달할지라도 달을 우리 삶의 정서로부터 떼어놓을 수는 없다.  과학이 발달해봤자 저 홀로 노는데 그칠 뿐이다.  달은 그처럼 끄덕 없이 고단한 우리의 잠을 지켜주는 선한 거인인 것이다.

김명수의 ‘월식’은 달이 지닌 신비와 환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하고 있다.  탁월한 문학적인 감수성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월식’은 달의 신비와 환상을 바로 우리의 삶 한 가운데로 끌어내리고 있다. 

‘달 그늘에 잠긴/비인 마을의 잠’은 달빛이 교교한 밤에 깊은 잠에 빠진 마을 정경을 떠올린다.  ‘비인 마을의 잠’이라는 이미지는 인적이나 기척 하나 없이 완전히 정적에 잠긴 상황을 포착한다.  더구나 달 그늘에 잠겨 있으니 깨어날 일은 더욱 없다.  ‘달 그늘’은 포근한 솜이불과 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그처럼 포근한 이불을 덮었으니, 아늑한 잠의 나락에 깊이 빠져들 것은 자명한 일이다.  도무지 누구 하나 꿈조차 꾸지 않을 듯한 그런 깊은 잠에 빠진 마을에 느닷없이 ‘사나이 하나’가 지나간다.  사나이는 정체 모를 인물이다.  그런 사나이가 ‘붉게 물들어’ 지나간다.  여기에서 말하는 ‘붉게 물들어’는 술 취한 사나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술 취한 사나이가 곤히 잠든 마을을 ‘발자국 성큼/성큼/남겨 놓은 채’ 지나간다.  마을의 잠을 깨울만한 큰 발자국 소리를 내며 성큼 성큼 걸어가는 정경을 떠올리면 아슬아슬하다.  혹여 아이라도 깨어나면 어찌할 것인가.

사나이는 불청객이다.  더구나 술에 취해 있다.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여기에서 사나이는 월식에 의해 달이 가려지는 뜻밖의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술에 취한 사나이의 느닷없는 출현은 불길한 징조를 의미한다.  예로부터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진 월식을 불청객의 술 취한 사나이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사나이는 자신의 출현으로 인해 곤히 잠든 평화로운 마을의 잠을 깨우리라는 사실조차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큰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다.  이때 ‘성큼/성큼’ 남겨 놓은 발자국은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진 사이에 일어난 지울 수 없는 어떤 사건을 암시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외로워 짖어대던 마을의 지킴이 개가 숨을 죽이고 있다.  괴사나이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개조차 주눅이 든 것일까.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목이 쉬어 짖어대던/외로운 개’가 그만 꼬리를 사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괴사나이의 존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거역 못할 힘을 암시한다.  과연 목이 쉬도록 짖어대던 외로운 개의 입을 다물게 한 그 커다란 발자국이 지시하는 상황은 무엇이었을까.

‘그 뒤로 누님은/말이 없었다’

외로워 짖어대던 개가 짖지 않게 된 상황과 말이 없어진 누님의 상황은 일치한다.  외로운 개는 외로운 누님을 상징한다.  그 누님이 말이 없어졌다.  외로워 짖어대던 개가 짖지 않듯이 누님 또한 말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면 술에 취한 괴사나이와 누님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상황에 대한 상상의 문고리를 쥐게 된다.  사나이가 지나간 뒤로 누님은 말이 없어졌으니 이상한 노릇이다.  이러한 의문은 바로 독자에게 주어지는 상상의 공간이자 시의 여운이다.  굳이 설명을 하지 않음으로써 아쉬움과 함께 그만한 체적의 상상의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다.  시의 힘이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비밀스러운 상황을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달이다.  달이 이 모든 사실을 은밀히 획책한 것이다.  그리고서도 천연덕스러운 모습이다.  ‘달이/커다랗게/불끈 솟은 달이/슬슬 마을을 가려 주던 저녁’에서 읽을 수 있듯이 달은 한 마을에 일어난 사건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태연하다.  그러나 ‘슬슬 마을을 가려 주던 저녁’이라는 한 소절에서 달의 음모가 드러난다.  괴사나이와 누님 사이에 일어난 일을 넌지시 유도한 달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달 그늘 아래 평화롭게 잠든 마을이 암흑으로 덮이는 대사건, 즉 월식을 빙자하여 누님의 외로움을 덜어준 달의 정체야말로 얼마나 인간적인가.     

달을 의인화하여 달로 하여금 누님의 외로움을 덜어주도록 한 시인의 상상력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눈부신 시의 감성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시이다.  ‘월식’은 시적 감수성이 만들어낸 이 시대의 설화이다.  이런 아름다운 설화를 가슴에 품고 우리 오늘 저녁 무심히 떠오르는 달을 보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환한 얼굴로 배시시 웃는 천연덕스러움에 절로 웃음이 나지 않겠는가.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