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35) - 이목을

펜보이 2009. 3. 17. 09:29

 

 

이목을의 작품세계


현대적인 조형개념으로 탈바꿈한 영특한 존재로서의 사과


신항섭(미술평론가)


 

예술창작이란 전인미답의 세계를 탐색하는 일이다. 조형언어로 삼라만상을 표현하는 회화 역시 이전의 누구와도 다른 조형공간을 궁구하게 된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사실을 가감 없이 재현하는 사실주의 회화에서는 더 이상 창작이란 불가능한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더 이상 갈 데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실주의 회화도 발상의 전환을 통해 여전히 표현영역을 확장해 간다. 현대미술과 동숙해야 하는 사실주의 회화는 고유의 미학에 순응하는 가운데 예술적 재능을 지닌 명민한 화가들에 의해 부단히 심화되고 또 분화하고 있다.

이목을은 그림을 통해 세상과 만나면서 눈에 보이는 사실, 즉 실재하는 물상을 캔버스가 아닌 나부 재질의 화판 위에 투사하는 방법으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실재하는 물상의 형태를 고스란히 화면 위에 옮겨놓는 방식의 그림을 우리는 사실주의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실상의 재현인 셈인데, 현대미학이 난무하면서 사실적인 기법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창의성 없이 단지 숙달된 기술에 의지하는 묘사기법을 반복하는 것이니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지적이다. 하지만 형태묘사를 극단적인 단계까지 끌어올리게 되면 완성도 높은 기술이 만들어내는 뜻하지 않은 성과가 기다린다. 다름 아닌 세련미다. 세련미는 정교한 기술의 축적에 뒤따르는 조형의 선물이다. 그리고 세련미는 바로 예술성, 즉 미적가치로 치환된다.

 

 

그는 처음부터 캔버스에 묘사기술을 의탁하지 않았다. 캔버스 대신에 오래 묵은 널빤지나 도마, 책상, 밥상, 나무소반 따위의 생활기물에 직접 그려 넣었다. 화판이 되는 이들 재료는 나무라는 공통성이 있으며 손으로 만들어지는 수제품이다. 이처럼 나무를 재료로 하는 화판 위에 놓이는 것은 역시 그 화판과 함께 하는 생활기물이나 과일, 생선, 떡, 고무신, 도자기, 꽃 따위의 소재들이었고 형태는 극사실적이었다. 그러기에 책상 위에 책이 놓여 있으며, 도마 위에 생선이나 수저가 놓여 있는가 하면, 화병에 꽃을 꽂아놓았다든지, 밥상 위에 밥과 반찬이 놓여 있는 식이다. 따라서 실재하는 물상 위에 실재하는 물상의 이미지가 자리하는 형편이니, 실제상황과 그림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적어도 그의 묘사력은 이처럼 능히 사람의 눈을 속일만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사람의 눈을 속일 정도의 묘사력은 반드시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 그의 경우 화가로서의 재능은 태생적인 모양이다.  

 

 

캔버스라는 일반적인 재료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생활 속의 기물을 찾아내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발상은 일단 기존의 미학적인 질서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사실주의 묘사기법을 따르면서도 캔버스가 아닌 시간 및 생활의 때가 묻은 기물(오브제)을 사용함으로써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공업생산품인 캔버스는 그림과 관련한 고정관념이자 도식의 상징이다. 이처럼 오랜 동안 그림세계를 지배해온 완고한 상징인 캔버스를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리라. 그것은 어쩌면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의 오랜 손길을 거치는 동안 그 기물에 스며드는 신체적인 온기(생활의 때)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물질적인 숙성의 가치에 대한 관심의 환기인지 모른다.

생활의 때가 묻은 생활기물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안식을 느낀다. 익숙해 있다는 것에 대한 편안함이다. 그 편안함 위에 또 다른 형태의 물질의 형상이 마치 실제처럼 옮겨질 때 공업생산품인 캔버스라는 형식화되고 고정관념화된 물질과는 엄연히 다른 정서적인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그림이란 인간의 신체적인 기능을 빌어다 쓰는 정신의 산물임을 자각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역설적으로 실재의 재현이라는 상투적인 사실주의 미학이 진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전통적인 생활기물을 택한 또 다른 이유의 하나는 한국적인 미와 한국적인 정서의 구현이다. 소박한 미로 상징되는 한국인의 미적 감각 및 미의식을 다름 아닌 전통적인 생활기물 속에서 찾아내고자 한다. 전통적인 생활기물이 그의 미의식 및 재능과 만남으로써 돌연 놀랄만한 미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탈바꿈한다. 한마디로 전혀 새로운 시각에 의해 밝혀지는, 한국인의 놀라운 미적 감각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는 단지 전통적인 생활기물에 회화적인 표현을 부여하고 있을 뿐인데, 그 결과는 예견치 못한 예술적인 가치의 제시라는 성과를 얻게 된다.

이렇듯이 그는 전통적인 사실주의 미학을 비트는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개념의 사실주의 미학을 제안한다. 언급한 대로 캔버스라는 공업적인 재료를 거부한 채, 오랜 시간 사용하는 가운데 인간의 손때가 묻어 숙성된 생활기물을 화판으로 선택한다. 생활기물로서의 용도로 만들어진 나무재질의 화판은 그림과 한 몸이 된다. 더구나 대추나 사과 따위의 극사실적으로 묘사되는 소재의 형상은 실제의 물상으로 착각하게 된다. 실제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됨으로써 화판 위에 실물이 놓여 있는 상황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화판과 소재와의 관계에서 인위적인 조작의 흔적을 제거한다. 다시 말해 화판이 이미 실제의 생활기물인데다 소재를 그 기물 안에 담는 형식을 취하기에 소재와 화판의 관계는 필연적이어서 자연스럽다. 캔버스를 사용하는 정물화의 일반적인 구성 및 구도에 따르는 전래의 방식과는 완연히 다른 시각이다. 그러기에 그림을 보면서 그림이 아니라, 실제의 상황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특히 나무 소반이나 밥상 그리고 도마 위에 놓인 정물은 실제의 상황을 방불케 한다. 착시현상을 이용하여 실제와 허구를 분간할 수 없도록 하는, 사실주의 조형개념과는 또 다른 사실성이다. 실제의 기물 위에 허구적인 이미지를 그려 놓음으로써 실제의 상황으로 인식하게끔 유도하는 이런 표현방식은 확장된 사실주의 또는 개념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이라는 허구의 세계를 실제의 공간으로 끌어들이기에 그렇다. 그러고 보면 실제와 허구의 간격이나 경계가 없어진 셈이다. 다만 실제가 허구의 진입을 허용하고, 허구는 실제에 편승함으로써 일루전으로서의 평면성을 극복, 입체와 평면이 한통속이 되는 새로운 조형세계가 전개된다.

 

 

그는 이를 보다 실제적이고 논리적이면서도 현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따라서 기존의 오브제, 즉 전통적인 생활기물을 화판으로 활용하는 대신에 그와 같은 형식에 합당한 화판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른다. 목공작업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화판은 나무라는 재질을 이용하여 직접 만들되, 일관된 작품 명제인 <空공>이라는 조형개념을 충족시킬 수 있는 형태가 된다. 나무소반이나 나무상자의 이미지를 현대적인 조형개념으로 재해석하여 기하학적인 인위적인 구조물로 변환하는 것이다. 그림의 소재가 놓이는 곳, 즉 화판은 무엇을 담을 수 있는 그릇 또는 상자로서의 입체적인 공간이 된다. 그 안에 소재의 이미지가 들어감으로써 시각적으로는 의심할 수 없는 입체적인 공간이 되는 것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공’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공간이 아니라, 존재물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비어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무엇이든지 들어올 수 있는 허용의 공간이 된다. 그러기에 비어 있어도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열린 공간이 된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나무 재질의 다양한 생활기물은 그 자체로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공간이다. 거기에 그림이라는 일루전이 들어감으로써 즉, 실제를 방불케 하는 물상이 들어옴으로써 아연 생기가 넘치게 된다. 그러니 비어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 것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놓인다거나 들어온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의 최근 작업은 이처럼 기존의 생활기물이 가지고 있던 실제적인 공간을 개념화시켜 현대적인 조형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생활기물을 직접 가져다 쓰던 이전과 달리 화실에서 직접 화판을 만든다. 상자의 개념을 응용하여 기하학적이고 입체적인 조형물을 만들고 그 위에 사과를 그려 넣는 식이다. 주어진 조건을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의도적인 조형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사과의 이미지가 들어있는 부분과 들어있지 않은 부분을 양립시키는 형태, 즉 음양의 원리를 적용한다. 이는 세상의 모든 이치가 음양의 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한 의식적인 방법이다.

그러면서도 음양의 원리에만 국한하지 않고 현대적인 조형개념을 충족시킨다. 차가운 기하학적인 이미지의 나열에 반하는 자연적인 이미지의 사과를 개입시킴으로써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다. 사과의 이미지가 들어 있는 부분과 들어 있지 않은 부분을 분리시킴으로써 음양의 존재성을 명료히 부각시킨다. 동시에 이 두 부분을 연결하거나 결합했을 때 문자나 기호 따위의 상징적인 도상이 성립된다. 가령 ‘卍만’ ‘十십’(혹은 십자가)자와 같은 상징적인 문자 또는 기호가 되는 것이다. 이는 서로 상반된 이미지가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온전한 하나가 된다는 음양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대추와 사과는 단순히 아름다운 형태를 지닌 과일이기 전에 고유의 형태 및 물성을 지닌 물상이다. 따라서 그 형태를 재현한다는 전통적인 사실주의 조형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형태 속에 담긴 물질로서의 속성에도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온전한 형태만이 아니라, 비뚤어지거나 찌그러지거나 상처를 입었거나 썩은 상태일지라도 그대로 받아들인다. 무상한 존재로서의 유기물이 지닌 한시성에도 관심을 가져 다양한 모습의 인간사를 그림 속에 반영하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사과 한 알은 그 고유의 형태와 함께 의인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사과일 뿐, 그 이면에는 그 자신의 인생관 및 삶의 철학을 은유하고 있는 영특한 존재이다. 바꾸어 말해 사과는 지적인 성찰이 담긴 지혜의 상징이 된다. 한마디로 사과는 눈으로 이해되는 사실주의 회화의 영역을 뛰어넘어 형태미 속에 은닉된 내용으로 시선을 유도하는 매혹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에 의해 새로운 존재가치를 얻게 된 사과는 더 이상 아름다운 정물의 소재에 머물지 않는다. 조형적인 관념의 세계를 탐조하는 여행의 동반자가 되고 있다. 그렇다. 사과라는 소재의 여행은 이제 자의적인 조형공간, 즉 기하학적인 구조물로 이루어진 나무화판과의 다양한 변주를 통해 그 때마다 존재방식을 달리하면서 현대미술 그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2009년 4월1일부터 7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이목을전"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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