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화의 작품세계
연꽃을 통해 보는 확장된 개념의 사실주의 회화
신항섭(미술평론가)
창작의 윤리성은 부단히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어느 특정의 형식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히 변화를 모색하는데 있다. 하지만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을 만든다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제까지의 형식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전의 작품세계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형식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모험적인 도전의식이 필요하다.
김인화는 이전의 작업에 기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전과 확연히 다른 새로운 조형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불과 일 년 남짓 시도한 일련의 새로운 조형어법은 현대적인 문맥에 합당하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최근 작업은 단순히 새롭다는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현대인의 미적 감수성에 응답하는 형태인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가 요구하는 조형미를 간파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려는 의지의 결과인 셈이다.
현대인의 미적 감각은 컬러시대에 맞게 진화해왔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은 대체로 시각적인 즐거움을 수반하는 화사한 색채이미지와 더불어 간결하면서도 깨끗하고 명료한 이미지에 열광한다. 어쩌면 감각적인 젊은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는 현대회화의 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조형적인 특징은 감각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이 부각되는 현대사회의 산물일 수 있다. 물론 그의 경우 시대감각을 따라간다고는 할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형식의 그림으로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전과 전혀 다른 소재 및 조형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 연결선상에서 보다 현대적인 미적 감각을 반영하고 있을 따름이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은 조형적인 해석, 즉 조형적인 관점의 변화에 기인한다. 자연연령 고희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조형적인 변화를 모색하게 된 것은 오래 숙고한 결과이리라. 미술애호가들이 새로운 이미지에 익숙해지기까지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작가의 입장에서 그 기간을 견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변화를 택했다. 어쩌면 그로서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인식, 즉 시대가 요구할 때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가 추구해온 작품세계와 관련한 소재는 크게 산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풍경과 수련으로 나뉜다. 오랜 산행과 더불어 시작된 산을 소재로 한 일련의 풍경화는 장엄한 대자연의 존재성을 일깨우는데 집중했다. 단순히 아름다운 산에 대한 찬미라는 식의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 왜소한 인간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로서의 이미지를 추구해온 것이다. 산행에서 보고 느끼는 웅장한 산세를 실체감 있게 표현, 아득한 동경의 대상으로 부각시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기에 그의 산 그림에는 신비적인 요소와 함께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장대한 산의 존재감이 내재한다. 이는 산행을 통해 체감하는 거대한 존재로서의 산의 신비 또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탐색해온 체험의 결과일 따름이다.
이에 반해 수련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은 실제를 빙자하면서도 현실과는 다른 기묘한 조형어법을 구사해왔다. 다시 말해 수련과 물방울이라는 서로 다른 공간의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에 병치시키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시각적인 쾌감을 유도했다. 수련 위의 물방울은 현실적인 상황이지만, 수련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공간에 자리하는 물방울은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물방울은 현실성보다는 지적인 성찰의 상징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영특한 존재로서의 물방울이 가지고 있는 맑고 차가운 이미지에서 자아성찰의 동기를 얻을 수 있는 까닭이다.
수련과 물방울이 서로 독립된 공간개념으로 만나는 기묘한 동거는 현실과 비현실을 분간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수련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은 재현적인 이미지를 뛰어넘는 꿈과 환상이 존재한다. 따라서 수련과 물방울은 현실을 초월적인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닫힌 감정을 해방시키는데 기능한다.
최근에는 수련에서 연꽃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보다 유연한 조형적인 사고에 이끌리고 있다. 다시 말해 연꽃의 형태적인 아름다움에 환상적인 이미지를 가미하여 승화된 현실로 바꾸어 놓고 있다. 연꽃은 종교적인 상징성을 떠나서라도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마음을 현혹하는 형태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무엇보다도 유연하고 유려한 선의 아름다움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곡선과 곡면이 기막히게 어우러지면서 우아하고 기품이 있는 형태미가 일품이다. 일테면 귀족적인 품격을 지닌 꽃이기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이처럼 아름다운 꽃을 단지 화면에 옮기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로부터 꿈과 환상을 얻기는 힘들다. 실재의 재현은 기술에 대한 감동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연꽃과 연잎 그리고 줄기로 구성되는 이미지에서 선의 아름다움과 형태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구도를 선택하여 실제보다 크게 확대한다. 그리함으로써 선과 곡면의 아름다움이 보다 명료하게 부각된다. 일테면 크기의 확대는 일종의 과장법인 셈인데, 이를 통해 실제의 연꽃에서 감지하지 못한 선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더불어 연꽃과 연잎의 색채대비 또한 환상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된다. 그의 작품을 보면 하얀색 연꽃을 비롯하여 분홍색 및 붉은 색 등 미려한 색채를 지닌 연꽃의 다채로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이처럼 아름다운 색채이미지는 그의 미적 감각에 의해 더욱 밝고 맑게 또는 농염한 색채이미지로 표현된다. 주어진 현실의 색을 뛰어넘어 꿈과 환상을 부추기는 색채이미지로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현실의 연꽃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과는 다른 조형의 변주에 대한 개별적인 해석이다. 현실과 다른 회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한 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연꽃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면서 선과 곡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구도를 선택하는 것도 아름다운 요소를 강조하여 실제에서 느끼지 못하는 회화적인 미를 보여주려는데 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모양의 연꽃을 조합하고 재구성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연꽃이라는 특정의 소재가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조형의 묘미를 일깨워주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물방울이 등장하지만 수련을 소재로 했을 때와는 이미지가 사뭇 다르다. 극렬한 사실성의 표상으로 존재한다. 연꽃에 앉은 물방울이라는 설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실성의 강조이다. 이는 자연현상의 하나인 물방울이 연꽃 위에 존재함으로써 사실성, 즉 사실적인 공간임으로 웅변하게 된다. 연꽃을 보조하는 이미지로서의 존재성에 한정하는 것이다.
연꽃을 소재로 한 최초의 몇 작품은 추상적인 공간을 억제한다는 기분이었다. 대신에 연꽃의 크기를 과장함으로써 생기는 넓은 꽃잎 또는 연잎이 추상적인 이미지를 대체했다. 사실적인 형태가 비현실적으로 확대되었을 때 사실성이 미약해지는 대신 추상성이 부각된다는 사실은 사진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진전하여 직선 및 평면 따위와 같은 추상적인 이미지를 도입하기도 한다. 사실적인 이미지로 다가오는 형태미와 더불어 생경한 추상적인 이미지가 개입했을 때 마주하는 이질성에서 시각적인 충격 또는 쾌감을 기대하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부드럽고 곱고 유연한 연꽃의 아름다움이 지어내는 평온함을 깨뜨리게 된다. 이렇듯이 예상치 못한 파격을 통해 우리의 미적 감각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현대미학이 요구하는 비사실성 또는 비현실성을 통해 보다 확장된 미의 세계로 안내하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연꽃을 소재로 한 작품은 전통적인 개념의 순수미에 대한 공감과 함께 회화적인 표현이 만들어내는 꿈과 환상 그리고 추상적인 이미지의 도입으로 인한 미의식의 확장을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그의 새로운 작업은 아주 짧은 시간에 납득하고 공감할 수 있는 현식미로 안착하고 있다.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은 이후 그의 작품을 보다 풍요로운 조형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되는 조형적인 변주는 개별적인 조형세계를 확립하는 기반이다. 그는 연꽃을 소재로 한 작업을 통해 이미 조형적인 변주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확장된 개념의 사실주의 회화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새로운 작품은 점차 공감대를 넓혀갈 것이다. 무엇보다도 감상자의 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명작의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작의 길(36) - 백성도 (0) | 2009.04.28 |
---|---|
명작의 길 (35) - 이목을 (0) | 2009.03.17 |
명작의 길 (33) - 노주환 (0) | 2008.12.19 |
명작의 길 (32) - 박정민 (0) | 2008.12.12 |
명작의 길(31) - 엄윤숙 (0) | 2008.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