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48) - 비가

펜보이 2008. 1. 2. 23:05
 


  悲歌


  유석우


  어둔 새벽에만

  눈 부비며 찾았던

  내 사랑,

  서편 하늘 멀리

  사위어

  초승달로 떠 있다.


  어쩌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에 눈뜨는 시기야말로 한 생명체로서의 자기존재에 대해 진정한 기쁨을 맛보는 시간이리리라. 다시 말해 사랑의 설렘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는 순간이리리라. 이성에 대한 사랑의 느낌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본능과 같은 것이다. 설령 자신에게 생명을 부여한 누군가의 명령에 따른, 종족번식이라는 준엄한 요구에 이끌린다고 할지라도 이성에 대한 사랑 그 자체만은 누구에게 통제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본능의 권한일 따름이다. 사랑의 본능은 일테면 기억의 메모리와 같은 것이어서 회로를 따라 정확히 작동한다. 외부의 개입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적어도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사랑의 본능에 지배된다. 사랑의 본능은 마치 식욕과 같은 것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음식물을 먹어야 하듯이 사랑의 감정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줄기찬 자기확인의 한 수단이자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랑의 감정은 이성에 대한 육체적인 경험이 있는 후에는 일단 본능적인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그 어떤 통제도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니, 이성을 향한 욕망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욕망의 영역으로 들어선 이후에는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더구나 사랑의 감정은 탐욕적으로 변질되어 때로는 시도 때도 없이 이성의 육체를 탐하게 된다. 그러나 육체에 대한 탐욕은 이성간을 굳건히 결속시키는 매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뿐더러 삶의 환희를 일깨워주기도 한다.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유도하는 본능이라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육체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 생리적인 반사조건의 하나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육체로 결속된 이후에 오는 사랑의 감정은 실제적인 것이다. 이성에게 이끌리는 본능이 추상적인 것이었다면 육체관계 이후에 오는 사랑은 실제적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일단 이성끼리 사랑으로 맺어지면 거듭하여 그 실체를 확인하고자 한다. 암수 한 쌍, 즉 짝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필연적인 관계인데, 그 필연성은 육체관계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유석우 시인의 “悲歌비가”는 사랑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사랑으로, 육체적으로 맺어진 사이임에도 결코 한 몸처럼 내 안에 가두어 둘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을 따름이다. 육체로 결속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즉 둘이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관계임을 확인하고 나서도 왠지 공허하게만 느껴진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에는 하나임을 실감하지만 그 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몸과 마음이 밖으로 빠져나가 내 의지대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둔 새벽에만/눈 부비며 찾았던/내 사랑,’

  ‘어둔 새벽’이라는 시간대는 이 시에서 두 가지 의미를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홀로 잠들다 깨어난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잠들었다가 깨어난 시간으로 이해된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에 깨어나 ‘눈 부비며’ 찾았으나 옆에 있어야 할 ‘내 사랑’이 없다는 상황으로 보아서는, 함께 잠들었는데 새벽에 깨고 보니 곁에 ‘내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정황이 그려진다.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매일처럼 함께 했던, 또는 함께 해야만 하는 ‘내 사랑’을 습관처럼 찾는다는 것은 내 몸과 같은 존재가 되어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성인들이 겪게 되는 일반적이며 세속적인 사랑의 모습이다. 잠자리를 함께 하는 관계란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사이인 것이다.

  잠자다가 새벽이면 불현듯 깨어나 습관처럼 ‘내 사랑’을 더듬어 찾게 되는 것은 일종의 자각행위이다. 새벽은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간을 의미함과 동시에 의식이 투명하게 열리지 않은 상황을 암시한다. 눈을 ‘부비는’ 행위는 의식이 깨어나고 있다는 확실한 증표이다. 무의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벗어나 의식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되돌아오는 의식행위인 셈이다.

  ‘서편 하늘 멀리/사위어/초승달로 떠 있다.’

  그처럼 맑은 의식으로 되돌아와 보니 곁에 있으려니 했던 ‘내 사랑’은 ‘서편 하늘 멀리’ ‘초승달’로 떠 있다. ‘서편 하늘’은 육체적이며 현실적인 감각이 닿지 않는 공간이다. 현실과 유리된 세계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서편 하늘’은 저승을 가리킨다. 현실세계를 떠난 영혼의 세계, 다시 말해 불국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 사랑’은 현실경계를 벗어난 존재, 즉 저 세상의 존재일 수 있다. 육체적인 욕망이 지배하는 현실세계를 벗어나 깡마른 ‘초승달’로 그 모습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초승달’은 육체를 버린 존재로서의 청정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로부터는 어떠한 형태의 육체적인 욕망의 그림자도 감지할 수 없다. 이제 현실적인 감각기관으로서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위치로 떠나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극적인 상황의 반전이야말로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서정적인 힘이다. 육체적인 욕망의 불잉걸이 느껴지던 상황이 갑자기 싸늘히 식어버리고 대신에 그 자리에 맑고 차가운 기운이 들어서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에로스가 아가페로 변전하는 순간이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현실적인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존재를 놓쳐버린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내 감각기관의 범위를 넘어선 영역에 위치하는 존재와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절망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사랑’은 비록 손길로부터 빠져나가 만져질 수 없을지라도 내 시야에 존재한다. 초승달의 이미지로 그 모습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조우할 수 있다. 가녀린 모습의 ‘초승달’이 뜰 때마다 님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경은 슬프다. 차라리 시야에서조차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망각의 그늘에 갇혀 ‘내 사랑’을 잊을 수 있으련만, 매달 어김없이 만나면서도 손끝에 걸리지 않으니 애절하기만 더하다. 그래서 ‘슬픈 노래’인 것이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