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41) - 배가 왔다

펜보이 2007. 10. 3. 23:30
 


 배가 왔다


  전동균

 


  비 그친 11월 저녁

  살아 있는 것들의 뼈가 다 만져질 듯한

  어스름 고요 속으로

  배가 왔다


  수많은 길들이 흩어져 사라지는

  내 속의 빈 들판과

  그 들판 끝에 홀로 서 있는 등 굽은 큰 나무와

  낡은 신발을 끌며 떠오르는 별빛의

  전언(傳言)을 싣고


  배는,

  이 세상에 처음 온 듯이

  소리도 없이 지금 막 내 앞에 닿은 배는,

  무엇 하러

  무엇 하러 나에게 왔을까


  불타는 녹음과 단풍의 시간을 지나

  짧은 생의 사랑이란, 운명이란

  발목 시린 서러움이란

  끝내 부르지 못할 노래라는 것을 알려주러 왔을까


  울음 그친 아이와 같이,

  울음 그친 아이의 맑은 눈동자와 같이,

  솔기 없는 영혼을 찾아

  어디로, 이 세상 너머 어느 곳으로

  무거운 내 육신을 싣고 떠나려 왔을까


  배가 왔다

  비 그친 11월 저녁

  살아 있는 것들의 뼈가 다 만져질 듯한

  어스름 고요 속으로

  내 손바닥만한 갈색 나뭇잎 한 장이.


  주어진 한 주기의 생이 다하여, 마침내 기력을 소진하고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잎새를 보면 저절로 엄숙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가을 낙엽으로부터 느끼는 감상의 진폭은 커지게 마련이다. 그 감상은 필경 상심을 동반한다. 언젠가는 기어이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으리라는 자각 때문이다. 그 상심의 깊이란 기계충 머리처럼 뭉뚝뭉뚝 하루가 다르게 비어 가는 가을하늘의 그 무량한 체적의 증가치와 다르지 않다.

  가을을 낭만의 계절이라고 말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몫이다. 젊은이에게 가을은 감상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꿈꾸듯 사랑을 갈구하는 시기일 따름이다. 젊은이에게는 계절의 끝이란 없다. 나뭇잎을 모두 떨군 채 차가운 겨울을 기다리는 가을은 겨울을 거쳐 다음 해 봄으로 이어지는 순환의 한 과정일 뿐이다. 그러니 한해살이를 마감한 나뭇잎이 낙엽이 되어 진다한들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설령 생의 유한성에 대한 성찰이 있을지라도 지금으로서는 단지 구름 너머 아득한 곳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가을은 누구에게나 불현듯 찾아온다. 계절이 쉬지 않고 순환한다지만 누구에게나 마지막 가을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다. 어쩌면 가을의 낙엽은 예고된 부고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시인의 감성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시인의 영혼은 그런 성찰을 통해 빛난다.

  전동균 시인의 “배가 왔다”는 낙엽 한 잎을 통해 문득 삶의 유한성을 상기하는 성찰의 시이다. 비에 젖은 낙엽 한 잎이 마치 저승길을 안내하는 배로 인식되는 성찰의 시간과 마주하면서 우리 또한 엄숙해지지 않을 수 없다.

  ‘비 그친 11월 저녁/살아 있는 것들의 뼈가 다 만져질 듯한/어스름 고요 속으로/배가 왔다’

  11월은 후줄근한 달이다. 단풍이야 아름답기 그지없으나 속절없이 지는 낙엽은 어떠하며, 혹여 비라도 내리면 땅바닥에 달라붙는 잎새의 모양이 영 측은하다. 늦가을 비가 추적이다 그친 저녁 풍경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살아 있는 것들의 뼈가 다 만져질 듯한’라는 구절에서는 잎새를 모두 떨군 나무들로 스산한 늦가을 풍경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다. 부산하기만 하던 잎새들이 모두 졌으니 ‘고요’해질 것은 자명하다. 그처럼 조용하고 어스름한 시간에 ‘배가 왔다’.

  ‘수많은 길들이 흩어져 사라지는/내 속의 빈 들판과/그 들판 끝에 홀로 서 있는 등 굽은 큰 나무와/낡은 신발을 끌며 떠오르는 별빛의/전언(傳言)을 싣고’

  ‘수많은 길들이 흩어져 사라지는’ ‘내 속의 빈 들판’은 뚜렷한 목표도 없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살아온 자신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 들판 끝에 서 있는 등 굽은 큰 나무’는 꿈을 성취한 자로서의 모습이다.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대비되는 ‘등 굽은 큰 나무’의 존재야말로 삶의 지향일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미치지 못한 자신은 ‘빈 들판’임을 자각한다. ‘낡은 신발을 끌며 떠오르는 별빛’은 수많은 존재의 생멸을 지켜본 시간 및 역사적인 실체를 가리킨다. 이렇듯 시간과 역사를 거슬러 배가 온 것이다.

  ‘배는,/이 세상에 처음 온 듯이/소리도 없이 지금 막 내 앞에 닿은 배는,/무엇 하러/무엇 하러 나에게 왔을까’

  ‘이 세상’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은유이다. 자신이 존재함으로써 세상이 존재하게 되었으니 배가 처음 온 듯이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기에 낯선 배가 찾아들었다는 사실을 무심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다가온 배가 그저 낯설고 기이하기만 하다. 그런고로 ‘무엇 하러’‘무엇 하러’ 왔는지 의아해 한다.

  ‘불타는 녹음과 단풍의 시간을 지나/ 짧은 생의 사랑이란, 운명이란/발목 시린 서러움이란/끝내 부르지 못할 노래라는 것을 알려주러 왔을까’

  ‘불타는 녹음’은 생의 절정이요, ‘단풍의 시간’은 생을 마감하는 시기이다. 생명의 활동이란 이렇듯이 시작과 절정과 끝으로 이어지는 주기로 되어 있다. 이 세상에 생명체가 끊이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바로 순환의 주기가 반복되는 까닭이다.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인간 삶의 주기는 극히 짧다. 그처럼 짧은 삶의 기간 중에 일어나는 사랑과 운명, 그리고 이런저런 아픔이란 결과적으로 하나의 짤막짤막한 사건에 불과하다. ‘발목 시린 서러움’이라는 표현은 가난한 자의 설움을 상기시킨다. 인간의 삶이란 이렇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려고 배가 온 것이냐고 묻는다.

  ‘울음 그친 아이와 같이,/울음 그친 아이의 맑은 눈동자와 같이,/솔기 없는 영혼을 찾아/어디로, 이 세상 너머 어느 곳으로/무거운 내 육신을 싣고 떠나려 왔을까’

  그러나 배가 온 것은 단지 인생이 어떻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인생에 대해 배우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알아차린다. 그리고는 보채지 않는 ‘울음 그친 아이의 맑은 눈동자와 같이’ 상처받지 않은 영혼을 찾아 나를 데려가려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내 육신’을 거두어 가려는 배가 아닌지 생각하는 것이다.

  ‘배가 왔다/비 그친 11월 저녁/살아 있는 것들의 뼈가 다 만져질 듯한/어스름 고요 속으로/내 손바닥만한 갈색 나뭇잎 한 장이.’

  첫 연이 반복되면서 그 배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비로소 그 실체에 접근한다. ‘내 육신’을 싣고 가려는 것이 아닌가고 반문했던 그 ‘배’는 바로 ‘나뭇잎 한 장’이었던 것이다. 빗물에 젖은 ‘나뭇잎 한 장’을 보면서 ‘내 육신’을 싣고 가려고 온 ‘배’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상상력이란 이처럼 깊고 처연하다. 자신의 생이 어떠하리라는 예상은 시인의 맑은 통찰력으로 능히 관통할 수 있는 것이다. 11월 저녁의 그 스산한 저녁이 길어 올린 상념의 실타래는 한 폭의 그림 같다. 아름답기보다는 왜지 무겁기만 한.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