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련 논문

미술관련 논문 (3) - 한국 구상미술의 현재

펜보이 2007. 9. 3. 15:13
 

  한국 구상미술의 현재

 

  신항섭 (미술평론가)

 


  1.

  이제 불과 15개월 후면 새로운 시대가 펼쳐진다.  2000년이라는 또 하나의 밀레니엄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기,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는 것이다.  100년을 단위로 하는 세기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1000년을 단위로 하는 긴 역사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밀레니엄은 인류의 먼 미래사를 향한 또 다른 대장정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역사의 주인공이다.  따라서 밀레니엄은 우리에게 축제나 다름없다.  역사적인 전환점에서 화려하고도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고 설계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온 인류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세계는 2000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분주하다.  축제적인 행사는 물론이요, 새로운 시대상을 제시하고 인류의 삶 전반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고자 바삐 움직이고 있다.  2000년 이전은 역사의 시간 속에 묻고 새롭게 열리는 시대를 위한 전혀 다른 의미의 팡파레를 울려야 한다는 기대감 및 강박관념에 쫓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미술계에도 동일한 무게로 다가오고 있다.  20세기를 끝으로 첫 밀레니엄 시대를 마감하고, 이제 그 두 번째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이전의 세기말과 다른 새로운 꿈과 이상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를 물리칠 수 없다. 

  한국미술은 지금 전통성과 현대성, 한국성과 국제성, 그리고 개별성과 보편성이라는 문제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다.  이는 미술인 개개인의 문제임과 동시에 한국미술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지구촌의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또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과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서구문명을 중심으로 전개돼온 세계사 속에서 항상 변방 국가로서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고대. 중세, 근대는 물론이려니와 현대사 속에서도 약소국가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인 반도국가라는 지정학적인 조건으로 말미암아 축소된 역사의 그늘에 묻혀온 것이다.

  하지만 지난 30년여 동안 한국은 세계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함으로써 현대사 속에서 주목받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세계 11위 무역대국이라는 이미지로 상징되는 한국의 국력신장은 당연히 경제적 성과의 부산물이다.  무력대결의 동서 냉전시대가 끝나고 지금은 경제전쟁시대라는 새로운 질서 체제를 따르는 상황이다.  그리고 21세기는 경제중심에서 문화중심으로 이행하는 새로운 경쟁체제에 돌입할 것으로 예상한다.  문화강국이 세계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리라는 해석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21세기 세계사의 변화를 전제로 한 새로운 문화예술의 전략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미술 또한 문화전쟁이라는 현실적인 시각을 통해 그 생존전략을 마련해야만 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민족의 미래와 결부된다.  그러기에 오늘의 한국미술을 보다 포괄적이고 객관적으로 이해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와의 화합을 배제하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일도 위험하지만 민족을 망각한 채 맹목적으로 국제주의를 추종하는 일도 경계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성과 정체성 그리고 현대성과 국제성이라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만 하는 오늘의 한국 구상미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과거를 돌아보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과거와 현재를 앎으로써 미래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한국 구상미술은 어디에 와 있는가.  그 현주소는 어디인가.  지금에 와서 왜 이와 같은 질문이 필요한 것일까.  그렇다.  21세기가 문화전쟁 시대라는 대전제 하에서 세계와 경쟁하자면 한국미술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 특성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 때문이다.  즉 구상미술이야말로 한국적인 미술로서의 특성을 함축 집약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렇다면 구상미술은 무엇을 말하는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예술이 성행함에 따라 그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구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구상이라는 용어는 미술에만 한정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나 형태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미술의 특성상  타 예술 분야에 비해 그 사용빈도수가 높다.  그러기에 구상이라는 용어는 미술에서 가장 보편적인 실용언어의 하나가 되고 있다.  ‘구상’이라는 용어는 ‘추상’을 설명하기 위한 상대적인 의미로 이해되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미술에서는 보다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구상은 추상에 대응하는 상대적인 의미에 국한하지 않고, 현대미술의 흐름을 포괄하는 하나의 경향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추상’이 “많은 경험에서 특수한 것, 구체적인 것을 버리고, 일반적인 것 또는 개념적인 것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시각체험에 의존하지 않고 추상화시키는 것”인데 반해 ‘구상’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자연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 또는“물체의 형태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쓰고 있는 ‘구상’이나 ‘구상미술’은 표현양식이나 형식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미술계에서는 표현양식이나 형식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한마디로 ‘구상’이라는 용어 사용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조차 구상미술이라는 용어로 간단히 해석한다.  이러한 현상은 용어 사용에 따른 합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추상이 아니면 구상이라는 용어에 따른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인 해석이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화단에서 유독 구상미술과 추상미술이 대립적인 양상으로 비치고 있는 것도 이처럼 애매한 용어 사용에 그 원인이 있는지 모른다.  한국미술대전이 구상과 비구상으로 나뉘어 치러지고 있는 현상 또한 ‘추상’ ‘구상’이 마치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이질적인 세계인 것처럼 여기는 잘못된 인식의 소산이다.  ‘구상’과 ‘추상’은 대립관계가 아니다.  모양만 다를 뿐이지, 가는 길은 같다.  단지 형태를 추구하느냐 또는 그렇지 않느냐라는 문제만 가지고 대립화하는 것은 잘못이다. 

  20세기 미술은 다양성을 생명력으로 삼아 왔다.  표현한다는 것이 단순히 손의 작용만이 아님을 주지시킨 데는 추상미술의 공이 크다.  인간의 내적인 세계 즉 감정이나 의식세계를 포함하여 무의식세계까지도 미술의 표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은 추상미술을 통해서였다.  한마디로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표현한 추상미술은 지적 사고가 만들어낸 경이로운 조형언어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20세기가 막바지에 이른 지금 세계미술계는 추상미술에서 서서히 발을 빼고 있다.  지금도 추상미술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고 또 앞으로도 그를 찬미하고 추종하는 미술가들은 끊이지 않고 이어질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한가지 분명한 점은 전후 추상미술이 걸어온 시간을 살펴보면 과학문명의 발전속도와 궤를 같이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추상미술은 상당 부분 과학을 직접적인 표현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현대미술이 진보니 발전이니 진화니 하는 말로 미화될 수 있었던 것도 과학과의 제휴에 따른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과학은 감동이 아니다.  추상언어로 무장해온 대부분의 현대미술이 감동을 생산해 내지 못한 채 아이디어의 산물이 되고 만 것도 따지고 보면 과학과의 밀착 탓이다.

  지금 세계미술계는 손의 효용성에 다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데생과 드로잉에 무게를 두고 있는 현상은 현대미술이 감동을 상실한 데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이른 바 형상으로의 회귀, 또는 구상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이러한 현상은 과학맹신주의가 주는 피해는 바로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환경의 악화로 나타나고 있음과 무관하지 않다.  발전 진보 진화를 위해 제휴했던 과학이 비판받는 처지에 이르게 되자 추상미술(현대미술의 제 양상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서의)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옳은 것만이 아니었다는 점이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과학에 의구심을 보냄으로써 거기에 편승했던 현대미술의 추상언어 또한 의구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가 되었다고 본다면 비약일까.

  어쨌든지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은 형상, 즉 구상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래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등 전통적인 표현양식의 규범으로 환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구상’이라는 용어 대신 ‘형상’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것도 과거의 조형개념과 차별하겠다는 의지를 말해 준다.  현대미술에서 사용하고 있는 ‘형상’ 및 ‘구상’은 재현되는 이미지를 부분적이거나 전체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과거의 재현미술의 조형개념을 답습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구상’ 또는 ‘형상’ 미술은 미술가 개개인의 감성과 지적 사고에 의한 ‘새로운 해석’을 중요시한다.  물론 ‘새로운 해석’에는 조형적인 해석이라는 문제를 중심에 두면서 개인적인 사상이나 철학 그리고 시대감각 및 시대정신을 담는다는 태도를 필요로 한다.  지구환경에 대한 고발이나 비판 등 사회적인 문제에서부터 개인적인 관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3.

  그렇다면 한국 구상미술의 상황은 어떠한가.  현재의 모습을 보기 전에 먼저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자.  ‘구상’ ‘추상’이라는 용어가 쓰이게 된 것은 서양미술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서양화가 도입되기 시작한 1910년대를 기점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908년 일본 도쿄 도쿄미술학교로 유학한 고희동은 한국 최초로 서양화를 전공한다.  뒤이어 김관호, 김찬영, 나혜석, 이종우, 이병규 등이 차례로 도쿄유학을 통해 서양화를 배우게 된다.  고희동은 유학시절 ‘나가하라 코타로의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구로다 키요테루, 후지시마 다케시 등으로부터 배웠는데 이들의 미술 경향은 대개 인상파의 아류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유학을 떠난지 7년 뒤인 1915년 귀국한 고희동은 서양화 기법을 전파하는데 적극적이지 못했다.  1918년에 그가 중심이 되어 서화협회가 결성되었지만 서양화 부문에서는 이렇다 할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일본에서 배운 서양화를 버리고 동양화로 진로룰 바꾸게 된다.  청운의 꿈을 안고 애써 배운 서양화를 버리게 된 것은 침략국인 일본에서 유학을 했다는 자괴지심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미술계의 첫 일본유학생이라는 신분은 오히려 당시 일제하의 억압적인 사회분위기로 보아 부자유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에 의해 물꼬를 튼 일본 유학은 그 이후 붐을 이루면서 1920-30년대를 거쳐 해방 이전까지 일본 유학파들이 국내화단을 주도하는 상황이 된다.  일본 유학파들이 화단에서 세력을 넓혀 갈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신미술을 공부했다는 사실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최하여 일본 유학파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입지를 넓혀 놓았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물론 선전을 창설한 것은 ‘조선미술의 발전을 기한다’는 것이 표면적인 명분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장기적인 계획에 의한 식민지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선전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서양화는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인상파 화풍의 일본 작가들로부터 간접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그 전철을 밟는 형태로 나타났다.  19세기 말 유럽에 유행한 감상적이고 상징적인 인상파 풍의 그림 일색이었다.  그러다가 1925년 이종우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파리로 유학, 슈와이에프 연구소에서 유화를 전공했고, 이어 장 발, 나혜석, 백남순, 임용연, 배운성 등이 미국, 독일, 프랑스 등지로 유학을 떠났다.  1930년대는 이들의 귀국과 함께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이 아닌 직접적으로 서양미술을 이식하게 된다.  이와 함께 구본웅, 이중섭과 같은 야수파적인 경향의 작품도 출현하였으며, 표현주의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1932년에는 조우식이 초현실파 미술에 관한 글을 발표, 새로운 국제적인 표현양식을 소개한 일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입체파 또는 몽드리앙을 중심으로 한 기하학적인 추상주의 경향의 작업으로 눈길을 끈 김환기, 유영국이 등장 추상화의 출현을 예고한다.  그러나 추상미술이 본격적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이처럼 서구의 새로운 조형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일단의 동경 유학파인 도상봉, 김인승, 김 원, 손응성 등은 아카데미즘에 뿌리를 둔 사실주의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인상파 풍에 대응하는 한 축을 형성한다.  정통 사실주의나 자연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서구의 아카데미 교육기관이 없는 상태에서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절충적인 인상파 화풍이 화단을 지배하는 것은 반드시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조형개념이 출현한다고 할지라도 소재 및 대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충실히 묘사하는 표현양식은 회화의 굳건한 뿌리라는 시각 때문이다.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 화풍을 추구하는 이들 1세대들은 일본에서 그림공부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스승 역시 정통 아카데미 교육에 의한 사실주의 조형개념을 충분히 숙지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단지 개인적인 재능 또는 취향, 아니면 이념에 의해 사실주의 화풍을 추구할 뿐이었지,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뿌리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국전의 아카데믹한 화풍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단지 재현적인 그림일 따름이었다.  사실주의 이념이 개재되지 않은 대상의 외형 묘사에만 충실한, 내용이 빈약한 그림에 불과했던 것이다.  조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제재에서도 현실적인 감각이 부족했다.  한마디로 형태적인 순수미만 문제시한 유미주의의 작품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본래적인 사실주의는 대상의 충실한 재현에 그치지 않고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그 시대상을 냉철하게 반영하는 데 가치를 두었다.  그 내용이 긍정적이든 비판적이든 간에 현실에 대한 관심은 시대감각을 선도해야 할 입장에 있는 예술가에게는 외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주의 작가들 또한 향토적인 소재 및 제재를 다룬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일제치하라는 불운한 시대의 지식인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됐든지 한국미술에는 서구의 정통 사실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비록 지나간 시대의 조형개념이며 이념이라고 할지라도 사실주의정신 및 테크닉은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미술이 존재하는 한 그 필요성은 결코 약화되거나 부정되지 않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6.25라는 어두운 터널을 뚫고 지나는 동안 서구문물이 급속히 밀려들게 된다.  특히 6.25 전쟁으로 인해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연합군이 참전함으로써 서구문물이 직접적으로 유입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참전국 군인들의 보급품 및 위문품 속에 섞여 들어온 잡지와 신문 등 각종 출판물은 서구문화와의 접촉을 매개했다.  미술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잡지 신문 출판물은 새로운 세계의 미술을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6.25 직후 참전 UN군을 통한 서구문물의 유입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한국미술의 서구화 및 현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가령 미국 잡지 또는 유네스코에서 발행한 ‘자유의 벗’ 등의 잡지에서 앤드루 워드의 사실적인 작품을 접한 미술인들이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화가 신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을 때 전통적인 회화로 자리를 굳혀온 동양화는 근대라는 시대적인 변화에 눈을 돌리지 않고 조선시대의 화풍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도화서를 중심으로 하여 장인적인 기교에 치중하는 개자원화보 형식의 그림이 여전히 화단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기교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우위에 두는 문인화와 청말의 남화풍의 산수화가 양립하는 형태였다.  새로운 조형적인 모색보다는 전통의 계승이라는 문제에 집착함으로써 변화를 외면해온 것이다.  물론 서양화와는 달리 전래의 그림이라는 점에서 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내다보지 못한 채 수묵의 향에 탐닉하는 것으로 일관한 것은 바람직한 창작 태도는 아니었다.

  물론 전통의 계승 발전은 민족의 주체성과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일임을 분명하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시대감각을 선도해야할 입장에 있는 예술가로서 전통에만 안주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다행히 일제 치하에서도 전통적인 표현양식을 지키면서 자기 정진을 계속한 이상범, 노수현, 허백련, 변관식, 김기창 등의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확립한 대가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나마 허전함을 달랠 수 있다. 

  그런데 특기할 일은 1930년대에는 화단에 새로운 풍조가 있었다는 점이다.  자유정신을 최대의 자산으로 여기는 미술인들은 일제로부터의 억압적인 분위기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도 민족적인 정서를 매개로 하는 일단의 향토적인 체취가 짙은 작품을 발표한 것이다.  비록 표현양식은 인상파 화풍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을지언정 누가 보더라도 한국적인 이미지를 찾아낼 수 있는 서정적인 제재를 취했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작가적인 시각은 억압당하는 민족으로서의 민족적인 감정 분출의 한 형태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향토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드러내는 일련의 작품 경향은 서양화가 어떠한 모양으로 한국에 이식되어야 하는가 하는 단적으로 보여준 하나의 실례로서도 의미가 있다.  실제로 해방 이후 한국의 구상회화를 보면 일제시대에 싹튼, 향토적이고 민족적인 정서가 함축된 서정적인 화풍은 제재로서 또는 소재주의 형태로 확고한 자리를 점유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제재 또는 소재는 서양화에만 국한된 경향은 아니었다.  동양화에서도 해방과 함께 밀려들기 시작한 서구문화의 유입의 영향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한편 조각가로는 김복진이 1919년 역시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 처음으로 서양식 조각기법을 익히고 돌아왔다.  그는 귀국한 뒤 모교인 배재중학 교사로 재직하면서 토월미술연구회, 청년학관, 경성여상 등에서 미술강사로도 활동하는 등 후배 양성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하지만 그가 배워온 서양 조각은 소조에 국한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유학을 통해 장인으로 취급해온 조각가에 대한 이전까지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1925년 조선전람회에 조각부가 신설되던 해 첫 출품하여 입선한 이후 주로 이 관전을 통해 입지를 넓혔다.  제19회 선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소년’은 그동안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부단히 연마했음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원숙한 작가적인 면모를 과시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선전에 출품하며 작가로서 이름을 얻은 사람은 김복진을 비롯하여  김경승, 윤승욱, 이 전, 윤효중 등이 있는데 이들의 작품 경향은 대부분 도쿄미술학교의 학풍인 아카데미즘에 기반을 둔 사실주의 양식이었다.  더러는 사실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보인 작품도 없지 않았으나 본격적인 작품이라고는 말하기가 어려운 습작 형태의 두상, 흉상에 머무는 경우도 많았다.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조각 인구는 극소수였고 일반적인 관심도 회화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형편은 선전의 조각부가 폐지되었다가 다시 부활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선전에 조각부가 설치되어 1944년 일본의 패망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매해 출품작 수가 2-3점, 많아야 10점 내외였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선전을 통해 작가적인 입지를 구축한 작가로는 김복진을 비롯하여 김경승, 윤효중 등이 있다.

  해방과 함께 신설된 국전, 즉 대한민국미술대전이 시작되면서 사정이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조각에 대한 수요가 절대적으로 부족, 작가들의 창작 욕구를 부추기는데는 여전히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모뉴멘트와 개인 기념상 등 조각의 수요가 생기게 되면서 차츰 조각가 지망생이 늘고 활동범위도 넓어진다. 

  추상조각이 등장하기 시작한 1950년대 이후에도 구상조각은 선전과 국전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다가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위조각가 그룹인 원형회의 창립과 함께 아카데미즘에서 탈피한 새로운 조형성을 모색하게 된다.  이들은 ‘전위적 행동의 조형의식’을 선언하고 모더니즘의 수용과 병행하여 추상적인 조형성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이를 기점으로 구상조각과 추상조각의 이원적인 체제를 구축한 국내 조각계는 양적, 질적인 면에서 획기적인 변화의 물결을 타게 된다.

  

  4.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적인 대결은 한반도를 남한과 북한으로 양분하는 사태를 가져왔다.  미술계는  해방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 단체로 조선미술건설본부를 창립하게 되지만 해방기념전이라는 단발의 행사로 끝나고 만다.  미술인 사이에서도 좌.우익의 내분 현상이 일어남으로써 해방의 기쁨을 맛볼 여유도 없이 혼란의 와중에 빠진 것이다.  대한미술협회가 창설되고 이듬해에는 좌익단체인 조선미술가동맹, 조선미술동맹이 결성됨으로써 사실상 미술계는 양분되는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다가 마침내 해방으로부터 불과 5년 뒤인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야기된 씻을 수 없는 민족상잔의 6.25가 일어난다. 

  이에 앞서 대한민국정부는 1949년 문교부 고시에 의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라는 명칭의 공모전을 창설했다.  ‘우리 나라 미술의 발전 향상을 도모할’ 목적으로 창설된 공모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운영방식은 조선총독부가 주최했던 선전, 즉 조선미술전람회를 답습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출발 초기부터 잡음이 따랐다.  그런데다가 6.25로 인해 3년간 중단되었고 53년 대한미술협회 주최로 어렵사리 제2회전을 개최했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되지 않은 데다가 전시 규정 자체에 많은 문제점을 노출, 57년 문교부 교시로 개정되는 등 과정을 겪는다.  그 후에도 해마다 규정을 부분적으로 수정을 거듭하다가 5.16 군사혁명 이후 제10회 국전을 계기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새로 마련한 규정에서 특기할 사항은 서양화를 구상, 반추상, 추상으로 구분한다는 것인데 기득권 세력인 원로 중심의 사실계열 작가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개혁은 후퇴하고 만다.  국전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관전이었고 사실상 이에 상응하는 권위를 가진 공모전이 없었기에 국전의 운영방향은 미술계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어느 면에서 한국구상미술계가 세계미술계의 급진적인 변화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사실주의 화풍을 중심으로 하는 아카데미즘(왜곡된 아카데미즘)의 울타리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것은 국전이 낳은 병폐의 하나일 수도 있다.  당시 상황에서는 작가로 입신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국전이 지향하는 이념이나 화풍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오늘까지도 국전이 지향한 아카데미즘의 조형적인 이념은 한국 구상화단에서 여전히 중심적인 세력의 하나로 존재한다.  물론 추상미술의 등장 및 세력 확장에 따라 미술활동의 전면에서는 밀려난 상태이다.  그럼에도 자연풍경이나 정물 그리고 정형화된 인물상 등의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조형이념에 동조하는 추종자들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서양화 한국화 조각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오직 한국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어느 나라 미술계에서나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의 조형이념은 약화되지 않는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고무적인 현상은 비록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조형이념이 전근대적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새로운 감성, 새로운 지적인 이해를 위해 노력하는 소수의 작가들에 의해 그 표현영역이 점차 확장되는 추세에 있다는 점이다.  표현기법은 물론 재료의 연구 그리고 내용 면에서 국전 시절의 아카데미즘과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조형적인 측면에서도 물상의 외적인 형태미에만 한정해온 단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감각을 반영한다든지,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투영시킨다든지, 또는 복잡다단한 현대의 사회상에 시선을 돌린다든지 하는 보다 광범위한 시각으로 세상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일은 전통적인 사실주의 이념에 충실한 작가들이 사회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는 경우에도 조형적인 아름다움 즉 순수미를 추구하는 탐미적인 태도는 견지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80년대를 풍미한 민중미술과는 다른 모습이다.

  제10회 국전의 개혁이 보수세력의 반발로 후퇴하는 모습이었지만 새로운 조형성을 추구하는 세계적인 추세를 감당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해방 이전에 이미 서구의 모더니즘 미학에 눈을 뜬 일부 일본 유학 1세대 작가들을 포함하여 미국식의 새로운 교육체제 아래 공부하는 신세대들의 현실적인 감각을 막는데는 역부족이었다.  추상미술은 이미 세계적인 추세였고 대세였던 것이다.  제10회 국전을 계기로 힘을 얻은 추상미술 지지자들은 서양화 동양화 조각 구분 없이 그룹을 결성하고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전위적인 미술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전위적인 미술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자 언론사에서도 미술전을 개최하여 이들의 뜻을 적극 뒷받침하고 나섰다.  조선일보사 주최의 현대미술작가초대전, 한국일보사의 한국미술대상전, 문화자유초대전, 중앙일보초대전 등이 그 대표적인 전시회다.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사들이 전위적인 미술활동을 지원하고 나선 것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새로운 뉴스와 정보를 전달하는  언론사의 시각은 여론 주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새로운 얘기를 전달하는 언론의 속성상 추상이라는 새로운 조형이념을 알리고 옹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때부터 사실주의를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은 사실상 언론의 뉴스권에서 멀어지게 되고 추상미술과 모더니즘 미학에 미술계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에 위기감을 가진 아카데미즘 지지자들은 세를 결집하여 그 존재를 굳건히 할 목적으로 그룹을 결성하는데 목우회가 그 대표적인 단체이다.  목우회는 ‘한국적인 아카데미즘을 계승하고 사실주의 집결체로서 뿌리를 내린다’는 취지 아래 조직된 대규모 서양화 작가 그룹이었다.  목우회는 회원전에 그치지 않고 1963년부터 공모전을 마련, 국전과 별개의 신인 등용문의 길을 터놓았다.  그리고 조각부를 신설하고 후에 동양화부를 추가로 설치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한국구상미술의 대표적인 단체로 자리한다.

  목우회가 시대 변화에 따라 퇴락의 길을 걷고 있는 아카데미즘의 지지대 역할을 하며 구상미술의 보루 역할을 한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소수 회원 개개인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목우회의 전체적인 면모는 스스로의 변화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과거의 영광에만 안주하고 있다는 인상은 지우지 못한다.  실제로 공모전을 통해 우수한 작가들을 발굴하면서 그 존재를 알리고 있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는 하나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한편 목우회가 아카데미즘을 표방한데 반해 1967년 결성된 구상회는 ‘추상이 구상보다 미술사조에서 한층 첨단을 걷고 있다는 등 그릇된 인식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취지로 사실주의와는 다른 길을 천명하고 나선다.  어쩌면 어느 하나의 조형이념이나 표현양식으로 규합된 단체라기보다는 사실주의와는 다른 자유로운 조형어법을 구사하는 구상작가들의 모임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인상파나 야수파의 경향이 경우가 있는가 하면 30년대의 향토적인 색채를 지향하는 경우도 있었다.  구상전도 목우회와 마찬가지로 1969년 제4회 회원전과 함께 공모전을 개최함으로써 지지기반을 확충해 나간다.  구상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뚜렷한 색채를 지닌 단체로 변화해 간다.  이러한 변화는 추상에 대응하면서도 한국적인 회화를 지향한다는 의지가 회원들 사이에서 하나의 공통된 정서로 작용, 30년대의 향토적인 서정성을 매개로 하는 독특한 색채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형적인 문제에서도 모더니즘 및 추상미학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현대라는 시대적인 감각에 부응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구상회에서 구상전으로 명칭이 바뀐 오늘의 모습을 보면 반추상적인 이미지는 보편적이고 거의 추상화로 진전한 작업까지 수용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공모전 출품작들 대부분이 수상을 의식한 나머지 소수의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 경향을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는 비판이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다.  구상전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어디에서나 쉽게 구별해 낼 수 있다는 얘기는 반드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점이 아니다.

  1974년 출범한 신미술회는 사실주의를 신봉하는 작가들의 모임으로 구상회화 단체로는 색깔이 가장 뚜렷하다.  신미술회야말로 아카데미즘 미학을 철저히 추종하는 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짐으로써 구상회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철저한 대상 묘사를 중심으로 하는 조형적인 이념은 세상의 변화와는 무관하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어쩌면 이들과 같은 그룹이 나름대로의 존재 이유를 천명하는 것은 사실주의를 교조로 받아들이는 작가들뿐만 아니라, 사실주의 작품을 선호하는 적지 않은 미술애호가들의 변함없는 성원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신미술회의 전반적인 작품 경향은 소수의 개별적인 미감의 창출이라는 성과와는 상관없이 과거의 습관적인 화법에만 천착하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지 신미술회가 지향하는 사실주의 조형개념은 여전히 한국구상미술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최근 형상성의 회복이라는 세계미술계의 조류를 사실주의의 회복으로 확대 해석하고 싶은 작가들도 없지는 않겠으나 유미주의 표현이 가지고 있는 영역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다.  존재이유야 감소되지 않겠지만 시대의 전면에 나설 수는 없다는 뜻이다.  즉 시대감각을 상실한 탐미주의는 개인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한국 구상미술의 입장에서 볼 때 1980년대는 아주 특별한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80년대 초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소수의 화가들이 반체제와 민주화라는 이념을 내걸고 결성한 ‘현실과 발언’은 민중미술이라는 이전의 구상회화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표현양식을 만들어내면서 대 사회적인 메시지를 표현행위로 삼았다.  이들은 군사정권의 해체를 통해 민주화를 달성한다는 행동강령을 바탕으로 현실비판적인 내용을 제재로 삼았다.  이들의 언어는 공격적기고 투쟁적이었다.  그들 자신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회적인 현실을 직설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때로는 풍자적이고 은유적이며 상징적인 언어에 의한 간접적인 표현방법도 사용했지만, 대부분은 현실 고발적이었다.  무엇보다도 현직 대통령의 사진을 이용하는 등 표현의 대담성은 정부 당국의 통제를 불러일으키는 등 사회적인 문제화함으로써 예술의 현실 참여를 정당화시키고자 했다. 

  이들의 활동은 점차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재야 민주화 세력의 호응을 받으면서 점차 확대 조직화되었고 적지 않은 국민의 호응도 뒤따랐다.  그러다가 이슈를 남북통일 문제로 확산시키는 과정을 밟는다.  재야 민주화운동의 양상을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로 들어서면서 동서 냉전시대의 종식에 이은 동구 공산주의 사회의 몰락과 함께 군사정권이 민간정권으로 넘어가게 되자, 더 이상 현실참여의 명분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결국 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은 표현언어에서는 리얼리즘의 방식을 따랐지만 내용에서는 현실 비판이라는 강렬한 대 사회적인 메시지를 채택했다.  이들의 주된 목적은 예술지상주의가 아니었다.  현실 참여와 대 사회적인 메시지를 최우선의 자리에 놓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민주화가 이루어진 오늘의 상황에서는 현실에 대한 솔직한 발언을 통해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의식을 일깨우는 데 일조를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반면에 예술의 형식이라는 측면에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메시지를 강조한 나머지 예술적인 해석 및 감동을 소홀했다는 점이 그 하나의 이유이다.

  어떻든 간에 민중미술은 한국현대미술사에 80년대를 대표할 수 있는 미술운동의 하나로 기록될 것은 틀림없다.  오늘 민중미술의 중심에서 활동하던 작가들 대부분이 자연을 대상으로 하든가, 온건한 사회적인 메시지로 방향을 바꾸는 등 이념의 변화과정을 겪고 있다.  이들의 변화가 앞으로 구상화단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게 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한국화(동양화)는 전통적인 그림으로서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서구의 새로운 조형의 물결을 수용하는 데는 서양화에 비해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재료를 가지고 서구의 새로운 조형개념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친 것이다.  더구나 작가 의식 자체가 서양화 작가들보다 보수적인 것도 문제였다.  따라서 한국화 분야에서 전위적인 그룹이 결성된 것도 서양화보다 훨씬 늦다. 

  1960년 서울대 출신들로 구성된 묵림회는 ‘순수한 전통정신을 견지하며 새로운 현대의 형식을 추구하는 것’을 이념으로 하였다.  전통적인 화법을 계승하는 쪽과 전통적인 형식을 파괴하면서 서구의 현대적인 조형개념을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쪽으로 양분하듯 하나의 통일된 양식이나 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들 중에서 일부는 추상 또는 반추상으로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특정 대학 출신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화단의 전체적인 경향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에 반하여 1936년 조직된 후소회는 비록 이당 김은호의 제자들의 모임이라는 한정된 인적구성에도 불구하고 전통의 계승 발전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색채가 선명하다.  김은호가 북종화 계열의 채색화 작가였던 점을 상기하면 그 제자들 또한 마땅히 채색화 작가들이어야 하건만 실제로는 수묵 채색 구분이 없었다.  오히려 숫자 면에서는 수묵화 쪽이 비중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후소회를 보더라도 채색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수묵화 일색이다.  후소회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1982년부터 신입 회원을 받아들이는가 하면 90년대 들어서면서 공모전을 신설, 전통화의 계승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입장으로 전환했다.  아울러 화법이나 표현양식 및 형식에서도 전통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는 일단의 실험적인 작가들까지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는 달리 처음부터 전통적인 채색화 작가만으로 구성된 모임도 있다.  1975년 결성된 춘추회는 처음에는 소수의 홍익대 출신의 채색화 작가들의 사적인 모임의 형태로 출발했으나 80년대 중반 이후 일기 시작한 채색화 붐에 부응하여 출신교 구분 없이 회원을 대대적으로 확충함으로써 대표적인 채색화 그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역시 공모전을 신설하여 채색화에 뜻을 둔 재능 있는 작가들에게 참여 기회를 넓혀주고 있다.  춘추회의 조형적인 색깔은 한동안 신사임당 류의 사실적인 화조화의 범위를 크게 넘지 않았다. 

  하지만 회원의 확충과 공모전은 필연적으로 소재 및 제재의 다양화는 물론이려니와 표현양식과 형식의 다양화를 가져오게 된다.  최근의 회원전 및 공모전의 작품 성향은 형태의 변형 왜곡에다가 추상적인 이미지의 도입, 그리고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이미지까지 도입하는 등 다채롭다.  춘추회의 공적은 모임 자체의 존재보다도 채색화 붐을 착실히 뒷받침함으로써 채색화 인구의 저변확대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채색화가 유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묵화에 전념하는 작가군도 적지 않다.  신수회를 비롯하여 연진회, 신묵회, 한국화회 등은 그 대표적인 단체이다.  이들 단체는 특정 학교 동문 또는 특정인의 제자들의 모임이라는 한정된 인적 구성에도 불구하고 전통과 수묵이라는 통일된 이념을 따른다.  모임에 따라 소재 및 제재 그리고 개개인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전통과 수묵이라는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같은 길을 걷고 있다.  80년대를 전후하여 동양화 수집 열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를 떠올리면 긴 침체기에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다.  수묵을 버리고 하루아침에 아크릴릭이나 채색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근래의 화단풍조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은 갈등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일까, 수묵화에 대한 변함없는 신념으로 작업하고 있지만 열기를 느끼기가 어렵다. 

  이렇듯 수묵화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이 저조한 화단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 것을 지켜간다는 긍지만은 남다르다.  이들은 전통적인 수묵산수화를 중심에 두면서 개별적으로는 현대적인 조형성을 모색하는 등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한국회화의 지평을 열어간다는 의지로 일관하고 있다. 

  조각에서는 어떤가.  1천년을 훌쩍 소급하는 한국의 조각사를 생각하면 김복진을 시작으로 하는 현대조각(서구적인 조형개념에 의한)의 역사는 일천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현존하는 적지 않은 삼국시대 및 고려. 조선시대의 불교조각의 전통에서 보면 현대 구상조각의 성과는 미미하기만 하다.  적지 않은 작가를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직 일별하여 한국적인 구상조각의 표현양식을 확립하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한국 구상조각의 대표적인 단체로 인정받고 있는 한국구상조각회는 1977년 홍익대 조각과 출신의 구상조각가 모임으로 출발하였으나 1990년 제1회 MBC구상조각대전 개최를 계기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범화단적인 구상조각의 모임으로 일신했다.  현대조각, 즉 추상조각의 득세에 밀려 구상조각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결성한 이후, 공모전을 개최함으로써 한국 구상조각의 실질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정도가 됐다.  이들은 인체조각을 중심으로 하되 사실적인 형태에 고집하지 않고 회원 개개인의 창의성과 한국적인 조각으로서의 합의점을 추구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다.

  최근 공모전을 보면 전통적인 인체상을 포함하여 서로 다른 재료를 혼용하는 혼합기법은 물론이요,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이미지를 하나의 제재로 묶는 구성적인 작업, 설치에 근접하는 작업, 회화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작업 등 현대조각의 다양한 언어 및 어법을 구사하고 있다.  그러기에 비구상 조각과의 경계 설정이 모호한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변화는 구상조각의 생존전략과 결부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구상조각을 표방하는 한 인체조각에 대한 보다 진지한 탐구는 지속되어야 한다.  구상조각의 모임이라는 명분은 바로 인체조각에서 그 존재이유를 찾을 수 있는 까닭이다.

  

  5.

  한국 구상미술은 지금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과거 국전양식으로 치부되는 아카데미즘을 바탕으로 하는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또는 인상주의 화풍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큰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이들 표현양식 구시대의 유물이거나, 또 아무리 시대가 변할지라도 변함없이 미술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 표현양식은 적어도 회화의 근본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이미 보편화되고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조형개념에 대해서는 문제삼을 일이 없다.  현실적으로 그 내부에서도 작가 개개인의 재능 및 노력에 의해 과거의 작품과는 차별적인 형태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수의 사실주의 작가들이나 인상주의 화풍을 따르는 작가들이 이룩한 개별적인 해석의 새로운 표현기법 및 방법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우리는 그들이 생산해낸 새로운 작업을 통해 예술이란 어느 한 시대의 조형개념 및 시각으로 전체를 재단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하고 있다.

  오늘 한국 구상미술은 의외로 그 폭이 좁다.  다양성이 부족한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어떠한 특정의 조형 이념만을 강조하는 한국 미술대학의 잘못된 교육체제와 도제교육에 따른 특정 화풍의 추종이 만들어낸 한국적인 기현상인지도 모른다.  창의성을 가로막는 사회적인 분위기는 비단 교육계나 화단 자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론이나 미술전문지 등의 편파적인 편집 방향 또한 자유분방하고 다양해야 할 미술현장을 왜곡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초현실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경우에는 아무리 특이하고 예술적인 가치가 높다고 할지라도 전혀 관심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어느 면에서 한국화단에서는 남과 다른 독특한 작업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이익을 당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풍토 속에서야 어찌 창의적인 작업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일정한 예술적인 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면 양식이나 형식은 다양할수록 좋다는 진리가 통하지 않는 것이 한국미술계의 현실인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 구상미술은 몇 가지 양식만으로 그 전체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폭이 좁다.  물론 열거한 대표적인 표현양식에 들지 않으면서도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확보한 작가들이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개별성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소수의 특정 미술사조로 전체를 말한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현재 한국의 구상미술은 개인적인 창의성을 부추기는 비옥한 땅은 아니다.  비록 새로운 시대감각을 반영하는 표현양식 및 형식이 아닐지라도 개성을 찬양함으로써 다양성을 부여하는 진정한 창작정신이 살아 숨쉬는 풍토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80년대 후반 이후 논쟁의 하나가 되고 있는 한국성, 즉 한국적인 미술양식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도 자기세계를 확립한, 개성 있는 작가 층이 엷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구상미술의 미래는 어떠한 모습일까.  아니, 어떠한 모습이어야 할까.  한마디로 예술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민족적인 주체성 또는 정체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우리 민족의 정서에서 그 실마리를 풀어가야 할 것이다.  세계가 지구라는 하나의 국가개념으로 좁혀질수록 자국의 민족적인 문화 예술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필요하다.  21세기의 문화 예술은 삶의 문제와 떠나서는 그 존재가치를 얻을 수 없으리라는 판단에서다.  환경문제가 온 지구인의 화두가 되고 있듯이 민족의 존립은 정신적인 자산으로서의 문화 예술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21세기가 문화 예술의 경쟁시대라는 예측은 우리 미술, 특히 구상미술이 가야 할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

  구상미술에서 과거의 표현양식 및 형식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예술적인 가치란 표현양식이나 형식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기에 그렇다.  화단 일각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민족적인 정서에 바탕을 둔 한국성, 즉 한국적인 미술의 특징을 산출해내려는 움직임이 있어 왔다.  박생광이 이룩한 한국적인 소재 및 색채 그리고 조형적인 해석은 그 하나의 좋은 본보기이다.  이처럼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작가들이 증가할 때 한국 구상미술은 새로운 삶의 지표를 얻게 될 것이다. 

                                                               

<1998년 월간 미술세계 게재: 이 글은 논문이라기보다 에세이 형식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