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련 논문

논문 (1) - 한국미술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펜보이 2007. 7. 19. 15:28
 

  한국미술의 양식화 및 정체성 확립을 위하여

                                            


  신항섭(미술평론가)

 

 

  국제화 시대와 한국미술의 위상


  하나; 세계화의 실체와 한국의 입지

 

  20세기와 21세기가 교차하고 새 천년이 시작되는 1999년 말에서 2000년 초에 걸쳐 우리는 우리 시대에는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 맞이 행사에 온통 정신을 빼앗겼다.  그 때만하더라도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면 갑자기 다른 세상이 찾아올 것만 같은 환상과 기대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 과연 우리에게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주변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달라진 것은 없다.  열띤 분위기와 기대감이 사라진 곳에는 공허함만이 남아 있을 뿐, 20세기의 삶의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 것은 신기루였단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잠시 세상사를 잊게 해주는 환각의 시간 속에 있었다.  우리가 그러한 환상 속에 사로잡혀 있을 때 멀리 스위스에서는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세계화를 도모하는 다보스포럼이 준비되고 있었다.  완전한 무역의 자유화를 통해 세계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으려는 다보스포럼의 세계화 전략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보스포럼은 무역자유화뿐만 아니라 정보대혁명, 환경 및 생명공학, 기업과 문화, 정치 외교 군사 등 인류가 처한 전반적인 문제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형태의 토론의 광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경계하는 것은 서구 선진국 중심의 세계화가 그 중심적인 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는 당연히 세계를 단일 국가의 개념으로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국가간의 경계를 나누는 국경이 존재하고 또한 종교 및 사상적인 대립이 상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세계화는 실현 불가능한 꿈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세계화는 국가간의 경계를 허물거나 종교 및 사상의 통합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늘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는 경제적인 측면, 즉 자본의 통합을 통한 단일 국가체제를 뜻한다.  세계무역에서 미국의 달러화 결제 비율이 50%를 넘고 있음은 세계경제의 주도권이 이미 미국에게 있음을 말해준다.  100% 무역의 자유화가 이루어지면 모든 산업은 거대자본이 장악하게 된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미국의 자본력을 따를만한 국가는 없다.  미국달러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연합이 경제적인 단일국가의 개념을 도입, 유러화를 발행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으나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달러화를 견제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유럽연합의 총생산이 미국의 77%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유러화의 한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IMF를 통해 이미 경험했듯이 한국의 경제는 완전히 미국식 자본주의에 흡수된 것이나 다름없다.  IMF 체제하에서 한국은 막대한 자본을 외국회사들에게 넘겨야만 했다.  겉으로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자본유입이지만 실제로는 자본의 상실인 것이다.  IMF를 극복을 위한 처방에 따라 합작을 명분으로 하는 외국자본 유입, 또는 우량 제조회사 및 금융회사의 매각은 결과적으로 국부의 유출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경제는 제한적이나마 피할 수 없이 외국 거대자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한국의 세계화는 이처럼 국부의 유출을 통한 거대 자본의 통제하에 들어가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거대자본은 결과적으로 미국자본을 의미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한국은 타의에 의해 이미 세계화의 물결에 빨려들어 가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완전한 무역자유주의의 스케줄을 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국제환경 변화는 이제 약소국인 한국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 되고 말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이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를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국적으로 미국화를 의미하는 세계화에 무조건 따라야만 할 것인가.  그렇다.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세계화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세계화를 추진하는 사람들의 목표는 단순히 경제적인 세계통합으로만 만족할까.  그렇지 않다.  세계화의 완성이란 문화의 통합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경제적인 통합에 만족할 리 없다.  경제적인 통합과 함께 문화적인 통합으로 완벽한 단일국가체제를 만들려는 것이다.  그런데 예속경제를 거부할 수 없는 우리에게 한가지 위안이 되는 점은 문화는 독립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는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전통문화에 대한 확고한 자각 위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생산함으로써 그 존재를 유지시켜 갈 수 있다.  어쩌면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민족적인 그리고 국가적인 자존심을 지켜갈 수 있는 것은 문화밖에 달리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의 흐름은 경제처럼 제도화하거나 강제적일 수가 없다.  문화는 바로 집단적인 삶의 형태로써 나타나는 것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민족적인 정체성을 잃고 선진문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면 경제와 마찬가지로 예속을 면할 수 없다.  오늘 세계화를 주도하는 세력은 경제적인 통합에 만족하지 않고 서구중심, 그 중에서도 미국중심의 문화적인 대통합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시나리오에 무조건 동조할 것인가.  정말 서구적이고 미국적인 문화가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문화보다 우월한 것이며, 또한 양질의 것인가.  서구문화 또는 미국문화를 찬양하거나 배척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솔직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적인 안전판을 확보하기 위해 전통문화마저 포기한다면 그것은 곧 정신적인 식민지를 자처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둘; 세계화와 한국미술의 생존전략

 

  20세기 후반의 한국미술은 서구 지향적인 길을 걸어왔다.  1910년대 일본 유학을 통해 서구미술을 간접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래 해방 이전까지 한국미술은 주권을 상실한 피지배민족의 상황에 대한 반발 또는 역반응으로서 민족적인 정서에 기댔다.  그것이 비록 일본통치에 대한 적극적인 대항의 표시 및 수단이 되지는 못했을망정,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제재를 통해 민족적인 정서를 밖으로 드러내는 식의 저항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저항의 표현으로서는 소극적이었던 반면 전통적인 정서와의 지속적인 연결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부 일본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 경향을 보인 경우도 없지는 않았으나, 일본적인 정서로부터 자신을 경계지으려는 입장이 해방 이전의 미술계의 주도적인 흐름이었다.

  이와 같은 과거에서 알 수 있듯이 미술은 시대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입장천명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일제시대의 민족적인 정서 표출이 집단화된 형태로 전개되었던 것이 아니기에 저항의 표현이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피지배 민족의 상황에서 현실인식은 공통의 견해를 갖기 마련이고, 그 묵시적인 공통의 견해가 민족적인 정서를 환기시키는 방향으로 귀결하였다면 하나의 운동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사상적인 운동이란 반드시 실제적인 의견통일로써만 발단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세계화를 치닫는 오늘의 상황을 일제시대와 같은 주권상실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시대적인 상황변화에 따른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 경제적인 주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은 또 다른 형태의 주권상실시대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다.  오늘날 국가간의 경쟁개념은 국방력에서 경제력으로 바뀌었다.  그러기에 경제가 예속된다면 국가의 주권을 상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IMF 상황에서 경험하였듯이 경제력이 약하면 경제강국에 손을 벌려야 하고, 그 대신에 반대급부로서의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경제가 자립하기는 현실적으로 요원하다.  자본이 절대적으로 허약한 한국으로서는 대단위 자본이동이 용이한 세계 경제체제에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IMF 지배를 자초한 것이다.  이처럼 금융지배구조로 바뀌고 있는 세계경제의 패턴 변화는 한국과 같이 개발도상국가에게는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비관적인 결론이지만 저자본 국가인 한국의 경제적인 독립은 점차 멀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세계화를 주도하는 세력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경제적인 통합에 의한 세계화라는 대세를 인정하더라도 정신적인 영역인 문화예술의 독립성은 지켜져야 한다. 

  일부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민족주의도 경계해야 되지만 주체성을 상실한 맹목적인 세계화도 거부되어야 한다.  최근 오스트리아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주의가 지나치면 극우주의가 될 우려가 많다.  거꾸로 맹목적인 세계화는 민족 자체의 소멸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경제적인 자립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세계화라는 대세를 인정하는 가운데 문화예술의 자립만큼은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5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민족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선택이다.  여기에서 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크다.  문학 음악 연극 영화 건축 사진 공예 등 다른 분야의 예술과 함께 미술은 바로 민족문화를 계승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정된 시나리오에 의해 세계화가 착착 진행된다면 고유의 민족 문화예술을 지켜가지 못하는 군소 국가는 마침내 세계화를 주도하는 세력에 흡수 동화되고 말 것이다.  경제에 이어 문화적인 동화가 이루어지면 거기에서 살아남을 민족은 없다.

  세계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함께 살기 위한, 즉 인류 공동의 번영을 위해서는 민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화적인 독립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성립이 안 된다.  고립된 민족주의는 마땅히 경계해야 되지만 오히려 다양성을 위해서는 일정한 정도의 민족주의는 필요하다. 

  한국미술의 생존전략도 이와 같은 논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세계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가치란 무엇인가.  혹시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란 서구 중심적인 가치체계에 준하는 것이 아닌가.  20세기 후반의 한국 현대미술이 그랬던 것처럼 서구적인 미학에 편승하고 동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시 묻자.  서구적인 미학이 우월하고 동양적인 미학은 열등한 것인가.  사실이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서구미술이 우월하고 또 서구미술이 생산해낸 미학적인 성과가 보편적인 가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세계미술사가 서구미술 중심적으로 기술되었다고 해서 서구미술이 우월하다는 시각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어쩌면 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문화는 오히려 다원화의 길을 재촉하는 역반응의 근원지가 될 수 있다.  어느 면에서 문화의 다원화야말로 세계가 존재하는 이유인지 모른다.  세계는 하나의 국가 개념으로서는 의미가 없다.  다양한 국가와 민족이 공존하는 사회야말로 진정한 세계인 것이다. 

  세계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문화의 다원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이미 영어가 세계의 공용어로 채택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세계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정복의 대상으로서 문화를 꼽고 있을 것이다.  문화의 통합이 진정한 세계화의 마지막 스케줄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입장은 어떠해야 할까.  민족의 존립여부, 다시 말해 생존여부가 달린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그나마 우리의 존재를 천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소극적인 저항의 수단으로써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제재를 탐닉하였듯이 경제적인 예속화의 상황에서도 무언가 우리의 존재를 알리고 또 환기시킬 수 있는 미술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 운동의 방법론으로서는 민족적인 정서 및 전통적인 가치를 토대로 하는 고유의 표현양식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중국의 ‘국화’나 일본의 ‘일본화’가 독립적인 표현양식으로서 당당히 그 존재를 과시하듯이 한국미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양식의 산출이 급선무인 것이다.  한마디로 전통과 민족적인 정서를 매개로 하는 문화적인 독립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문화적인 독립은 바로 민족의 생존과 결부된 문제인 것이다.  즉 살아남기 위한 전쟁으로서의 문화적인 독립을 새로운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문제에 대한 내부적인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진정한 문화적인 독립에 필요한 고유의 민족적인 정서의 발현과 이를 통한 표현양식화의 길로 나가야 한다. 


  셋; 한국미술의 독자적인 표현양식의 성립 가능성

 

  한국미술은 이웃 중국의 ‘국화’나 일본의 ‘일본화’에 비교할 때 고유의 표현양식을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이다.  수 천년의 장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한국미술’이라고 일별할 수 있는 조형적인 특징이 없는 것이다.  반면에 다른 예술장르에서는 한국적인 특징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음악이 그러하고 건축이 그러하며 공예가 그러하다.  하지만 미술에서는 한국적인 표현양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개별적인 성과사례로서의 한국적인 특징을 말할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뚜렷한 양식상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고유의 표현양식에 대한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한국미술 속에는 분명히 중국의 ‘국화’나 일본의 ‘일본화’처럼 어느 미술양식과 비교할지라도 확연히 구별되는 조형적인 특징이 존재한다.  다만 우리는 어떠한 연유에서건 한국적인 특징을 요약해내지 못했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조선시대에 미술을 일반화하지 못한 폐쇄성에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능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미술을 정신행위의 하위개념에 둠으로써 재능 있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접근을 막았던 탓이다.  다시 말해 대상을 실제의 모양대로 묘사하는 기능 위주의 재현적인 미술에 대한 가치를 낮게 평가함으로써 그림에 접할 수 있는 환경조건을 가진 사람들조차 미술을 경원하는 풍토를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재현적인 미술을 완전히 배제한 것도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재현적인 미술활동을 일반적으로 장려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궁중 산하에 화원제도를 두어 기능을 바탕으로 하는 화가들을 관리했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는 궁중의 장식미술을 담당하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궁궐을 장식하기 위한 장식화 또는 왕족 및 사대부의 초상을 그리는 등 목적화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유정신의 상징인 미술활동이 외부로부터 간섭이나 억압을 받는 상황에서는 결코 좋은 작가도 좋은 작품도 나올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궁중이나 사대부가 요구하는 목적화 이외의 창의적인 작업은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미술이 독자적인 표현양식을 갖지 못한 일차적인 책임은 바로 이와 같은 사회적인 환경에 있었다. 

  대한제국이 들어선 이후 화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사회에서도 그림에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외부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길을 모색할 수 있는 분위기는 마련되었다.  그러나 그림공부를 할 수 있는 일반적인 교육기관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봉건시대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자유가 점차 확대되는 추세로 사회환경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에 대한 꿈을 가진 젊은이들이 크게 증가하지 않는 것도 또 다른 문제였다.  미술의 사회적인 기반이 약한 까닭으로 인해 미술인구의 증가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일제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시대가 곧바로 이어짐으로써 그나마 소수에 의해 간신히 유지돼온 전통미술의 양식화의 길은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식민지시대 역시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예술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다.  일제는 무엇보다도 전통문화의 단절을 통해 민족정신 및 정서를 자극하는 예술활동의 싹을 자르는 정책을 폈다.  이로부터 대부분의 전통예술 활동은 중단되고 대신에 일본 전통예술이나 서구미술과 접촉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 강점기로 이어지는 근대사에서 자생적인 한국미술이 싹틀 수 있는 분위기 및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예술활동이란 그것이 비록 정책적으로 장려되지 않을지라도 그를 수용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사회적인 분위기가 조성될 때 활성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문화란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 삶의 양태인 것이다.  예술도 문화의 한 속성을 지니는 만큼 그를 수용하는 터전이 마련됨으로써 발전적인 길을 걷게 된다.  문화는 마치 유기체와 같은 것이어서 외부로부터 이입되는 형태가 될지라도 그 민족의 성향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여 보다 새로운 가치체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가령 ‘일본화’의 경우 한반도에서 받아들여 일본열도의 풍토와 민족적인 정서에 응답하는 형태로 재창조함으로써 독자적인 양식화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자생적인 문화의 경우에도 오랜 시간을 경과하면서 그 민족의 정서와 혼연일체가 됨으로써 마침내 양식적인 틀을 갖추게 된다.  한국미술이 자생적인 생명력을 갖지 못한 것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미술가라는 직업을 낮게 평가하는 조선시대의 사회적인 구조에서 비롯된다.  만일 사대부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돼온 문인화를 제외한 채색화 또는 민화가 장려되는 분위기였다면 이미 ‘한국화’가 성립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세계화라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국제환경 속에서 한국미술은 또 다른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미술의 양식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전통미술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전통미술이 어떠한 외부적인 상황변화에도 거뜬히 견딜 수 있는 자생적인 생명력을 키우지 못한 데 있다.  그것은 역시 양식화를 이루지 못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세계화라는 새로운 상황변화를 반드시 위기로만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위기가 새로운 기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의 태도로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제재에 관심을 보냈듯이 세계화에 대한 반발로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적인 미술양식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다.  한국미술은 이제까지 외부로부터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 일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세계화는 거꾸로 우리 민족에 대한 외부의 도전인 셈이다.  그러기에 그 도전에 결연히 맞서야 한다.  생존의 논리 차원에서라도 세계화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미술의 양식화는 아주 시급한 일이다.

  이제껏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장단점을 정확히 인지하는 데 소홀히 해왔다.  한국미술의 특징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분석하는 일에 소극적이었다.  이는 한마디로 민족의 생존을 위한 전략이 없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개인은 물론 국가와 민족이 하루아침에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인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온 민족인가를 좀더 깊이 그리고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한국미술이 가야할 방향이 보인 것이다.  그 방향을 정확히 따라가다 보면 한국미술의 양식화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미술의 정체성 찾기


  하나, ‘한국성’의 개념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다시 말해 모든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삶의 조건은 자연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자연을 극복하고 지배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지만 성과는 아주 미미하다.  홍수 태풍 산불 지진 화산 등 대자연의 법칙에 의한 재해 앞에서 인간은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신봉주의자들은 언젠가는 자연이 인간에게 굴복되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과학을 만능의 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아니라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서구인들이다.  서구인들은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양인들은 이와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므로 어떻게 하면 자연의 법칙에 잘 동화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왔다.  즉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자 한다.  그래서 인간 삶과 관련된 모든 행위로서의 인위는 그것이 비록 삶의 수단으로서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만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동양에서의 인간 삶은 자연환경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풍토와 기후 그리고 생태조건으로서의 자연환경은 본질적으로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대륙에 연한 반도국가라는 지리적 조건과 그로 인한 자연환경 및 풍광의 영향을 받으며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왔다. 

  반도라는 지리적인 조건은 육로를 통한 대륙과의 교류 및 진출, 그리고 해로를 통한 드넓은 세계와의 만남이 용이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세계를 향해 열린 땅인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섬나라인 일본의 대륙진출의 교두보가 되어야 했고, 거꾸로 중국대륙이 섬나라 일본을 정벌하러 가는 통로가 되었으며, 주변 열강의 세력다툼의 틈바구니에 끼어 끝내는 국토와 민족인 양분되는 비극을 불러들이는 비운의 땅이기도 하다.

  어쩌면 한반도는 그만큼 중요한 지정학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단순한 주변국가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조건으로서의 자연환경은 다른 나라가 탐낼 만큼 잘 갖추어져 있다.  사계절이 뚜렷한 것은 물론이요 자연경관이 수려함과 아울러, 강수량이 풍부하고 일조량이 많으며 땅이 비옥하여 그야말로 살기 좋은 터전으로서의 조건을 완비하고 있다. 

  이처럼 천혜의 자연조건 아래서 사는 한국인은 개조 단군의 후예로서 단일민족국가체제를 형성하면서 농경사회를 이루어 왔다.  농사는 근면한 민족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자 수단이다.  노력한 만큼 소출을 보장받는 농사야말로 더불어 살아가는 이상적인 삶의 형태인 것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동양사상을 그대로 실천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민족이 이동하지 않고 한 곳에 정착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자연에 순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에 순응한다는 것은 자연이 베푸는 혜택에 만족하며 산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반도의 자연 및 기후조건에 순응하여 거기에서 얻어지는 먹거리로 연명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는 땅이 좁은 데다가 산이 많고 상대적으로 농토가 좁아 오늘과 같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는 풍부한 어족 및 각종 수산자원을 가지고 있어 인구가 많지 않았던 옛날에는 그 어느 나라에 견주어도 살기에 적합한 지상낙원으로 받아들여지는데 부족함이 없었으리라.

  인간은 이처럼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자연의 혜택에 의지함으로써 그곳의 풍광에 몸을 내맡기고 먹거리로 살찌우면서 은연중 그 자연에 동화되는 삶의 방식 및 성품을 가지게 된다.  이는 인간의 신체, 즉 피와 살 그리고 골격은 바로 자연환경의 산물임을 말한다.  자연환경에 의해 신체가 형성되고 그 신체와 더불어 감성에 의존하는 성품이 결정되는 것이다.  자연환경이 거칠면 모진 성격을 가지게 되며, 반대로 자연환경이 풍요로우면 정감이 넘치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  생존의 법칙에 의해 인간의 품성 또한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와 함께 신체 속에 기거하며 신체를 사역하는 정신 또한 그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은 일정한 행동강령을 통해 공동생활을 위한 기본질서를 마련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의식활동, 즉 정신적인 영역으로서의 사상 및 철학이 뒷받침되고 있다.  이때 통치수단으로서 이용되는 사상 및 철학과 이념의 토대는 신앙 혹은 종교로부터 그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그 민족의 구심체로서의 이념 및 사상의 토양으로서의 신앙 혹은 종교가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오늘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민족은 자연신앙을 비롯하여 민족신앙인 단군 신앙과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등의 다양한 종교를 접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신앙 및 종교와 관련된 사상체계 아래 국가를 건설하고 민족의 안위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체험이야말로 한국인의 생활관습 및 의식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한반도의 문화는 자생적이기보다는 외래적이었다.  외래적인 요인으로서 가장 결정적인 영향은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사용한다는데 있다.  문자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문자를 사용하는 문명인들은 언어와 문자를 통해 사고하게 된다.  즉, 문자가 없으면 사고의 폭이 좁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아주 높은 지적 수준은 추상적인 언어로서의 문자에 의해 형성된다는 뜻이다.  더구나 문자의 기록성은 문화의 흐름을 빠르고도 직접적으로 전하는데 아주 긴요하다.  고대로부터 한반도 국가들이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는 지리적으로 이웃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같은 한자를 사용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한국문화 도처에서 중국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역사적으로 모든 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음을 말해준다.  

  단일민족 국가체제야말로 문화적인 독립성의 절대요건이다.  단일민족은 하나의 언어 그리고 문자를 통해 기본적인 삶의 방식으로부터 신앙 종교 사상 철학 그리고 모든 생활관습에 이르기까지 공동체로서의 강한 연대의식을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서적인 공감대조차 단일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에서건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는 앞선 중국의 영향을 거부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문화의 흐름은 앞선 곳에서 뒤진 곳으로 가게 마련이어서 한반도가 중국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예로부터 한반도 국가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전반에 걸쳐 중국의 체제를 받아들이는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5천년의 역사 동안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문화는 한반도라는 특수한 자연환경과 거기에 동화되어 온 사람들의 정서 및 삶에 용해됨으로써 중국과 차별적인 독자성이 생겨났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서구사람들은 동북아시아 문화권은 중국과 일본이 중심을 이루고, 그 사이에 있는 한국은 중국의 아류로서 개별적인 특징이 없는 것으로 간주할 정도이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서구제국에 문호개방이 늦은 탓도 있지만, 일본의 악의적인 식민지 정책이 한국문화를 말살함으로써 서방세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데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문호를 개방하고 개화정치를 도입하는 시기에 일본의 강점이 이루어짐으로써 한국의 대외적인 창구를 일본이 가로막고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5천년 역사를 지닌 단일민족으로서 독자적인 문화가 없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건만 세계역사에 동참하게 된 20세기 후반까지도 세계인의 한국의 문화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행한 것은 한국경제가 급속히 성장한 1980년대 이후 세계는 한국을 새롭게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경이적이 고속성장을 해온 한국경제는 바로 한국인의 근면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한국인의 근면성이 어디에 연유하고 있는지를 먼저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한국인이 국민적인 자의식을 갖게 된 것은 광복이후 높은 교육열의 결과 문맹률을 세계 최저수준으로 끌어내린 성취욕구 및 의지에 근거하는지 모른다.  더구나 유교적인 도덕 및 윤리관 그리고 거기에 연유하는 생활관습으로 말미암아 근면함을 가장 큰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적인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다 일제치하의 피지배민족으로서의 굴욕과 가난에 대한 강한 극복의지가 근면성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사계절이 뚜렷한 반도국가여서 시간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는 자연환경 및 기후는 농사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제때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이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오늘 한국인의 성품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성급함은 바로 이러한 자연환경 및 외부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성급함이 반드시 나쁜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았다.  경제의 고속성장은 바로 24시간 공장 기계를 멈추지 않는 세계 유일의 근면성의 산물이다.  이는 노력한 만큼 성취도 빠르게 나타난다는 지극히 산술적인 사고방식의 소산이다.

  성급함이 지나쳐 때로는 일을 그르치는 일도 없지 않으나 결과적으로 오늘의 고속성장의 원천은 무슨 일이든지 그 결과를 빨리 보고야 말겠다는 성취욕구 및 의지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장하는 경제와 달리 고유의 전통문화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아직도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도 우리의 적극적인 홍보가 부족한 탓으로 돌려도 좋다.  경제를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다른 문제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고 변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화란 외부로부터 유입된 형태라고 할지라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서 그곳 특유의 환경 및 정서에 의해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변화에는 신앙 및 종교를 포함하여 그 민족의 사상 및 철학이 개재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한반도에는 단군 신앙을 비롯하여 갖가지 자연신앙 그리고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등의 종교가 성행했다.  이러한 신앙 및 종교는 민족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 한반도에 꽃피운 문화는 어쩌면 종교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들 종교가 한국인의 삶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고구려 벽화를 비롯하여 신라 석굴암, 고려불화 및 청자 그리고 조선백자 등 한국미술의 대표적인 이들 문화유산은 모두 종교와 관련이 있다.  종교가 한반도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반증하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외래종교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처음 발생지로부터 많이 변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문화라는 것도 외부에서 이입되어 시간이 흐르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정서에 녹아들어 변모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까지 그 변모된 모습을 요약하고 함축하는 일에 소홀히 해왔다.  즉 고유의 전통문화를 양식화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특징이나 민족적인 정서와 관계 있는지 모른다.  아니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적인 요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유교사상에 기반을 둔, 양반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시대의 정치 및 사회체제에 그 원인이 있다.  서민문화를 장려하지 않는 양반사회의 집단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은 그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서민사회를 규제하고 억압하는 문화정책으로 이어졌던데 연유한다.

  이처럼 문화적인 풍토가 척박한 땅에서는 정서도 메마르게 마련이다.  특색 있는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없다는 뜻이다.  문화는 그 국가 또는 민족이 가지고 있는 정서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그 국가 민족의 삶 속에 흐르는 정서적인 성향이 문화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한국문화에는 분명히 중국과 일본에 다른 것이 있다.  단순히 심증에 머무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이 그것을 엄연히 분별해낼 수 있다.  가령 중국의 전통적인 기와집 지붕의 선은 가파르면서도 장식적이다.  일본의 기와집은 보다 직선적이고 단순하다.  반면에 한국의 기와집은 흐름이 느리고 완만한 곡선을 보여준다.  이들 집 모양은 누가 보더라도 서로 다르다.  이는 바로 문화적인 특징이다.

  이렇듯이 한국문화는 도처에서 중국과 일본에 뚜렷이 구별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도 중국과 일본 문화를 먼저 접한 외국사람들은 한국문화에는 개성이 없다고 인식하고 있다.  세 나라를 두루 여행해본 사람으로서 미에 대해 그리 우둔하지 않다면 이러한 특징을 구분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세 나라를 여행한 외국사람이 많지 않다는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동안 서방세계에 한국의 존재를 올바로 인식시키기 위해 ‘한국미술 5천년’전을 시작으로 귀중한 국보와 보물들을 해외에 알리는 노력을 해왔다.  이로 인해 한국 전통미술에 대한 서구의 인식이 점차 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을 하는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점은 한국미술이 중국이나 일본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질문 앞에 ‘바로 이것이다’라고 내놓을 수 있는 미술양식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  실제는 있으면서도 독립된 표현으로 양식화하지 못한 탓이다.  여기에는 이론적인 뒷받침과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책임이 있다.  물론 문화란 강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존재하는 사실에 대한 확인과 더불어 이론 및 실제를 통해 한국미술의 양식화를 위한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요구를 외면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우리 내부로부터 한국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표현양식의 산출을 위해 그 바탕이 되는 ‘한국성’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성’이란 한국인의 성정, 다시 말해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 갖지 못한 한국인 특유의 성품이면서 동시에 한국인의 삶 속에서 생성된 한국문화의 특성 또는 특징을 의미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반도라는 자연환경에 순응하면서 동시에 외부로부터의 도전에 대응하면서 단일민족으로 존재해온 한국인의 살아온 모습이 바로 한국문화의 실체이자 ‘한국성’이다.  문화가 인간 삶의 양태이자 그 실체이며 흔적이라면 ‘한국성’은 바로 우리가 살아온 과거와 현재 속에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한반도라는 특수한 지리적 조건 및 자연환경과 더불어 살아오는 동안 형성된, 다른 민족이 가지고 있지 못한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특징과 그 영향으로서의, 한국인의 독특한 삶의 양태가 바로 ‘한국성’이라고 할 수 있다. 


 둘, ‘한국성’ 성립조건으로서의 사상적인 배경

 

  역사적으로 문화예술이 번창하는 시기에는 그 국가 또는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체로서의 지배층의 특별한 관심과 지원이 뒤따랐다.  이러한 결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화예술이란 인간 삶의 조건과 결부되는 사회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삶의 조건이란 자연환경 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집단적인 사회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곳에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환경을 말한다.  다시 말해 집단적인 사회체제를 가지고 있는 곳에서의 삶의 환경은 인위적이다.  집단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주거환경과 제도적인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제도는 삶의 양태를 규정하게 되는데 그 인위적인 환경 속에서 문화가 생겨난다.  물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사는 원시적인 삶에도 문화란 존재하기 마련이다.  삶의 안위를 담보로 하는, 자연을 숭배하기 위해 만들지는 물품 및 그 의식 자체도 문화의 한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 행하고 만드는 행위 자체가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의 다양한 얼굴 가운데 예술은 보다 전문적인 학습 및 노력을 통해 성립된다.

전문적인 학습에는 육체적인 노력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활동이 뒤따른다.  따라서 전문적인 학습체계를 갖추고 또 그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까지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게 된다.  여기에는 가진 자, 즉 그 국가나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배층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 속에서 발생, 각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는 그 시대를 장악한 지배층의 속성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문명화된 세계의 문화는 정치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못한 근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종교와 관련된 문화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종교가 정치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예술 또한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일이 허다했다.  오늘 남아 있는 예술의 대부분이 지배층의 영광과 장식을 위해 존재했었다.  그리고 종교와 밀착관계를 이룸으로써 종교적인 목적에 봉사하는 형태로 예술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어쩌면 자연발생적인 문화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명화된 세계는 그 세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문화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명사회에서 행해진 예술행위 및 그 결과물은 대부분 정치적인 목적성을 수반하고 있기에 그렇다.

  한국문화예술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 날 남아있는 유형의 문화유산은 거의가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계층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봉건사회에서 서민을 위한 문화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문화란 반드시 유형의 유산만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서민사회의 생활습속 또한 문화의 하나인 까닭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예술성이라는 평가기준으로 볼 때 근대 이전에 이루어진 우리의 문화유산의 대부분이 양반사회를 위한 것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지배계층을 위한 인위적인 문화는 목적성을 가짐으로써 애초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수단이 되어야 했다.  이때 권력의 정당성은 신앙이나 종교적인 사상에 의해 구축되어 왔다.  권력이 힘을 갖자면 필연적이고 논리적인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하는데 이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신탁이 필요했다.  즉, 지배자가 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는 근거를 신의 대리인이라는 형태 속에서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탁에 의지해온 권력도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외부적인 도전과 자극에 의해 위협받게 되면서 권력의 정당성은 차츰 의심받고 붕괴되기 시작한다.  더구나 사상 및 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층이 늘어난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철학이란 ‘사물의 근본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서 ‘자연과 사회 전체에 걸친 일반적인 법칙성을 탐구하는’ 것이기에 왕권 또한 순수한 학문의 입장에서 연구대상이 됨으로써 초월적인 지위를 누리면서 절대자로서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봉건시대에는 철학과 같은 학문적인 연구가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지는 못한 상태였으나, 시대가 바뀌는 과정에서 철학을 통해 의식이 열리고 인식체계가 성립하게 됨으로써 신의 존재에 의탁하는 절대권력이 허구임이 드러나게 된 것은 아주 중요한 사회적인 의미를 가진다.

  17세기에 이르러 수 천년 동안 봉건사회 체제를 유지해온 한반도에서 실용학문으로서의 실학이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잇따른 외부의 침입에 의해 왕권의 기반이 허물어지고 국민의 생활이 피폐해지기 시작한데서 비롯되고 있다.  당파를 일삼다가 외침을 막아내지 못함으로써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왕의 권위가 손상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외침에 의해 나라의 기조가 흔들이고 국민의 삶이 피폐해지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쥔 왕의 책임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왕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흔들리는 민심을 무마하고 삶의 향상을 위한 안정적인 정책이 필요불가결한 일이었다.  새로운 개혁정책을 수행하는데는 정책변화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사상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실학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인 요청에 응답하는 형태의 개혁사상으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조선조의 실학의 태동은 청대의 실학사상에 근거하지만 그 내용과 전개에서는 훨씬 더 현실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처럼 변화의 기운이 움트는 시기에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로 평가되는 영조 정조시대가 도래한다.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는 조선조 21대 임금으로서 탕평책을 써서 당쟁의 격화를 막고 서얼의 관리 등용, 인권을 존중하는 사형수 삼심법 시행, 신문고 제도의 부활, 군역을 감소시키는 균역법, 동색간의 혼인금지, 화차제작 성의 개축 군기수급, 인쇄술 개량, 농업장려 등의 개혁조치를 단행한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당시 재야에 기반을 넓히던 실학을 진작시키는 한편 풍속 및 도의의 교정에 힘쓰는 등 사회 문화 산업 예술 전반에 일대 부흥기를 마련하였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1752-1800, 재위 1777-1800)는 탕평책을 계승하여 실학파와 북학파의 장점을 수용, 정책 수립에 참고하였다.  실학파와 북학파의 학풍을 함께 장려함으로써 학문적인 기반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규장각을 두어 경사를 토론하게 하고 활자를 개량하여 인쇄술의 발달에 기여하는 등의 문화정치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궁차징세법의 폐지와 함께 영조의 영조 때의 문물제도의 정비작업을 완결,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것도 중요한 치적이다.

  이처럼 영,정조 시대에 가장 중요한 변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실학의 대두와 관련이 있다.  실학은 ‘불교 도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주자학의 공리공담적 폐단을 반대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며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부국유민을 목적으로 하는 실용적인 학문으로서 사회, 경제적인 성격이 짙었다.  성리학이 유학사상을 철학적으로 전개시킨 반면, 조선조 후기 실학은 현실중시의 입장에서 실용과 공리를 중시하는 경세치용의 학문’이었다. 

  영, 정조시대에 실용학문인 실학을 토대로 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역사적인 필연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파를 일삼다가 외침을 막아내지 못함으로써 국가기조가 흔들리고 기강이 해이해지는 등 통치질서가 와해되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 이전의 정치상황 탓이다.  특히 왕을 중심으로 하는 사대부 및 양반사회의 경제적인 몰락은 신분변화를 재촉하게 되었다.  더불어 농민생활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민심 이반현상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농민반란 등의 예상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새로운 사회정책 및 농촌정책이 필요했다.  이와 같은 당시의 사회 경제적인 변화는 다름 아닌 현실개혁의 당위성을 불러오게 된 것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근거와 원동력이 바로 실학이었다.  실학은 유교적인 전통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가운데 현실적인 인간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근대적인 철학이었던 셈이다.  실학사상은 유교경전과 과거의 역사에 전적으로 의존해온 정치관행을 바꾸고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예술의 개혁을 앞당기는 역할을 한 것이다.

  미술분야에서도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 한국적인 독창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진경산수화의 효시로 평가되고 있는 겸재 정 선(1676-1759)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실학사상의 파급효과의 일부이다.  현실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사상적인 토대로서의 실학은 당시 예술에도 큰 파장을 가져왔다.  겸재는 영조시대의 화원이었다.  그는 화원으로서는 최고 대우인 첨지중추부사까지 지낸 경력을 가지고 있을 만큼 당대 최고의 영예를 누린 화가였다.  영조는 문화예술에도 이해가 깊어 이전까지 15명이던 도화서의 화학생도의 정원을 30명으로 늘리는가 하면, 잉사화원에 종6품 1명을 증원하는 등 처우를 개선해 주었다. 

  이러한 정책적인 배려에 힘입어 겸재는 화원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새로운 창작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겸재가 중국화풍 일색인 당시 상황에서 돌연 한국 산하를 직접 취재하여 실경산수화를 그리게 된 것도 실학의 학문적인 풍토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겸재는 실경산수화를 그리기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화풍을 답습하는 평범한 화원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오파의 산수화 기법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다.  화원으로서 채색기법에도 익숙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되면서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개념의 산수화를 통해 독창적인 필묵법을 창안하는 이론적인 기틀을 마련한다.  금수강산을 비롯하여 동해안 지역과 서울의 인근지역, 특히 인왕산을 즐겨 그렸다.  이들 그림은 순전히 그 자신이 직접 현장을 답사한 결과이다.  다시 말해 보지 않은 것은 그리지 않는다는 철저한 현장중심의 작가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작가적인 관점이었다.  실제에서 실생활을 통해서 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실이자, 선이며, 아름다움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자연을 직접 답사한다는 것은 그 실체를 이해하고 그 전모를 파악하는데 필수적인 일이다.  이러한 취재과정을 통해 미적 감흥을 고양시키고, 화의를 진작시키며, 심상을 구체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의 확인에서 비롯된다.  또한 이로써 실체에 대한 확증이 서고, 그러한 확증을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자연의 취재는 실체에 육박해 들어가는 방법임과 아울러 그 전모를 파악하는데 필수적이다.  그 실체를 이해하고 전모를 파악함으로써 화상의 구상이 가능해진다.  그래야만 스스로 실제를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자유로운 화의를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를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자유로운 화의를 전개한다는 것은 현실에 입각하되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창작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겸재는 현실적인 눈으로 진실을 추적해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실제의 풍경을 요약 함축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생략과 덧붙임 등 기존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해석으로 한국의 산하가 가지고 있는 형태적인 특징을 부각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여기에서 그는 표현방법과 기법의 새로움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민족적인 정서의 솔직한 발현이라는 접근방식을 채택하는 일이었다.  그의 산수화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표현은 넓고 힘찬 필선에 의한 중첩기법이다.  세부를 과감히 생략하는 가운데 그 전체를 압축하는 힘차고 두터울뿐더러 둔탁하며 명확한 선은 한국인의 정서를 반영한다

  분청사기라든가, 조선백자에서 볼 수 있는 격식을 타파한 대담하고 솔직하며 우직한 형태의 선묘화가 말해 주듯이 두텁고 단도직입적인 선이야말로 한국인의 심성의 발로이다.  어느 면에서 세련되지 못한 이러한 형태의 선은 유독 한국에서만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고구려벽화에서도 힘차고 명확하고 강직한 형태의 선을 찾아볼 수 있다.  겸재의 선이 고구려벽화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질만한 개연성은 없다.  그러기에 더욱 시간과 공간을 무시한 채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러한 형태의 선은 바로 한국인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는 심증이 강하다.

  겸재의 그림에서 굵고 힘차며 단조로운 선은 형식적인 틀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금강산과 인왕산과 총석정을 소재로 한 그림에서 쓰이는 선이 저마다 다른 까닭이다.  그렇다.  겸재는 형식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단지 실상을 접하면서 그 실상이 가지고 있는 형태적인 특징을 강조하는 것으로써 의미를 찾았다.  바꾸어 말해 실경을 취재한다는 것은 그 경관이 가지고 있는 실제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강산과 인왕산의 형세가 다르기에 다른 형태의 선으로 묘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진경산수는 응당 중국의 그 어느 화풍과도 명확히 구별되는 바가 있는 독창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진실을 추구하되 진실을 얻기 위해 실제와 마주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실제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창의성을 받아들이고 민족적인 정서의 발현을 기대함으로써 굵고 우직하며 힘찬 선으로 요약되는 독자적인 화법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한국 미술계가 직면하고 있는 ‘한국성’이란 문제는 겸재의 작품세계를 통해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다만 겸재가 살았던 시대상은 현실에 비추어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겸재의 진경산수를 잉태케 한 실학사상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현대사상으로서의 새로운 옷을 갈아입지 않는 한 미술에 그대로 적용시키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겸재가 지향한 현실중심의 세계관은 오늘의 우리 시각에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  바꾸어 말해 한국의 현대미술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는 우리들의 삶과 정서에 귀기울여야 한다.  이는 한국미술의 현재와 미래가 서구미학 중심 일변도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적인 상황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미술에 관한 모든 문제점을 우리 내부로부터 찾고 동시에 해결책 또한 내부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태도는 곧 겸재의 현실적인 시선과 일치한다. 

  현실을 외면한 미술은 공허하다.  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과 도시의 환경이고 삶의 모양새이다.  그리고 또 다른 측면에서의 현실은 한국인의 자의식이자 주체성이다.  한국인이라는 자의식을 떠나서는 미술에서의 진정한 개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미술의 궁극이 유일무이한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면 자의식으로 눈 뜬 진정한 자기 자신에게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  민족과 국가가 없는 나는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한국성’을 찾아가는 사상적인 토대이자 첩경인 것이다. 

   

  셋, ‘한국성’이 요구하는 조형적인 특징

 

  한국미술이 독자적인 양식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형적인 면에서 뚜렷한 특징이 있어야 한다.  기존의 미술양식은 물론 어느 민족의 전통적인 미술양식과 비교하더라도 명확히 구별되는 점이 있어야 한다.  하나의 독립된 미술양식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우선 조형적인 특징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은 중국대륙과 섬나라 일본의 중간 위치에 놓여 있다는 지정학적인 여건으로 말미암아 모든 면에서 이들 두 나라와 직접적으로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한국인 자신이 아무리 독자적인 민족문화를 외치더라도 세계는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개방이 늦은 탓에 이미 중국이나 일본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세계인들의 인식 속에 한국이 자리할 여지는 거의 없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한국을 새롭게 인식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중국이나 일본 문화에 비해 뚜렷이 구별되는 바가 없다면 무엇으로 한국을 독자적인 문화국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개방이 늦어 중국이나 일본에 불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설령 한국이 일본보다 먼저 세계에 알려졌다고 한들 과연 그 무엇으로 한국미술의 독자성을 인식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  한국미술이 중국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생각처럼 그리 많지 않다.  서구인의 입장에서 한국미술을 보자면 중국의 변조문화쯤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반면에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적지 않다.  일본적인 문화, 일본적인 미술양식이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미술이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하여 다른 점을 명백히 주장할 수 있는 조형적인 특징의 산출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기존의 한국미술 속에는 한국적인 특징이 전혀 발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한국미술에도 엄연히 중국이나 일본에 구별되는 조형적인 특징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식화에 소홀히 함으로써 마치 한국미술에는 독자적인 조형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을 따름이다.

  미술은 시각예술이다.  사상이나 내용이 아무리 선명하다고 할지라도 독자적인 조형성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양식상의 독립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상이나 내용이 다소 불분명할지라도 조형적인 독자성이 확립되어 있다면 독립적인 미술양식으로서 인식시키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그렇다면 조형적인 독자성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간단하다.  먼저 형태를 이루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 즉 조형적인 요소를 통해 특징을 변별해내는 방법이다. 

  조형적인 요소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점, 선, 면, 색채이다.  이들 네 가지 요소의 조합 및 변조에 의해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점은 그 자체만으로는 형태적인 특징을 결정하는 힘이 약하다.  선과 면 그리고 색채와 함께 함으로써 형태적인 특징을 만들어내는데 기능하게 될 뿐이다.  물론 현대회화에서는 단지 점만으로도 독립적인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점 자체가 미술양식을 결정짓는데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점 자체만으로는 형태가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조형이란 말 그대로 형태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형적인 요소로서의 점, 선, 면은 평면회화뿐만 아니라 입체조각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면과 면이 만나 입체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점에 비하면 선은 형태를 만드는데 아주 긴요하다.  선은 스스로를 다양한 형태로 변형시킬 수 있다.  직선과 곡선 등 자유자재로 그 형태를 바꿀 수 있기에 조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아울러 선이 이동하는 방향에 따라 갖가지 다양한 형태의 선이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선의 움직임에 의해 면이 결정된다.  직선과 직선이 만나면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등의 갖가지 면이 만들어지고 직선이 회전운동을 하면 원이 된다.  그리고 면과 면이 만나서 입체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선과 면을 어떤 의지로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가에 따라 원하는 형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은 조형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셈이다.  선은 경우에 따라 곧바로 면으로 변하기도 한다.  선이 넓어지면 면이 되는 것이다.  물론 기하학적인 개념에서의 면이란 반드시 선과 선이 만남으로써 성립된다.  이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서구의 수학개념의 결과일 따름이다.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동양미학의 관점에서 선은 면이 될 수가 있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곧바로 형태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가령 상형문자는 선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선 하나가 곧바로 축약된 이미지로서의 형태자체를 결정하기도 한다.  또한 문인화에서 난초 잎은 분명히 입체적인 형태이지만 간결한 먹선 하나로 충분히 표현된다.  여기에서 선과 면의 개념은 무시된다.  이는 서구의 합리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비합리적임이 분명하다. 

  20세기를 풍미한 추상표현주의는 바로 동양의 비합리적 비이성적인 미학에서 발단한 조형개념이다.  서구의 합리적인 조형개념으로는 추상회화란 존재할 수 없다.  형태를 전제로 하는 조형개념에서 볼 때, 더구나 이성적인 시각에서 볼 때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그림이란 그림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이라는 양식이 형태를 빌어 성립되기는 하되, 그 형태란 고도의 정신적인 가치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이 문인화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문인화는 형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세계가 무엇인가.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세계는 곧 추상세계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추상표현주의는 이처럼 문인화의 열린 미학개념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에서 자유로운 선이 가장 중요한 조형적인 요소로 등장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선이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써 독립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는가를 검증하고 확인해 가는 과정이 바로 서구 현대미술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선이야말로 현대미술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해 가는데 가장 긴요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선의 표현력은 무궁무진하다.  점 및 면과 손잡지 않고도 얼마든지 독립적인 가치를 생산해낼 수 있기에 그렇다.

  선은 형태를 결정하고 면을 이끈다.  따라서 조형이라는 문제에서 선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이 뚜렷한 하나의 성격을 가짐으로써 형태 또한 그에 상응한 특징을 가지게 된다.  즉, 선에 어떠한 성격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개별적인 형식 및 양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조형적인 개별성 또는 독자성은 성립될 수 없다.  겸재 정 선을 진경산수의 효시로 삼는 것은 그 선이 독특하고, 그 선으로 독자적인 형식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겸재의 힘차고 두터울뿐더러 둔탁하고 명확한 선은 이전의 작가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이처럼 형태로부터 선을 독립시켰을 때 성격이 명확히 드러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적인 표현양식을 위해서는 먼저 한국인의 정서에서 비롯되는 독특한 선의 이미지 및 그 개념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선의 원형의 일부를 우리는 고구려 벽화 및 조선조의 도자기 그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조의 다양한 이미지의 도자기 그림은 한국인의 성정 및 기질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특히 관요보다는 민요에서 나온 도자기 그림들은 조형적인 완성도는 떨어질망정 자유로운 필치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시각적인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활달하고 개방적인 필치에 의해 묘사되는 그림들은 서민적인 취향 및 체취가 짙게 풍긴다.  비록 세련되지는 못했을지라도 솔직 담대하며 거리낌없는 표현은 힘차고 담백하다.  거기에서는 잘 그리려는 의도도 무르익은 기교도 찾아볼 수 없다. 

  어느 경우에는 장난 삼아 한 두 번 붓을 휘두른 듯 어설프기 짝이 없는 그림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림은 속필로 그려지고 있다.  계산되지 않은 그림이기에 주저할 바가 없었던 까닭이리라.  그렇다.  조선조 도자기 그림에서 표현되고 있는 선의 성격은 대체로 빠르고 힘차다.  물론 형태미에서도 간결하고 단순하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형태를 간략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민화에서 쓰이는 선 또한 단순하고 간명하다.  민화는 선으로만 완결되는 그림과 달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채색작업이 대부분이기에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힘차고 둔탁하며 명확한 선의 이미지는 도자기 그림과 다르지 않다.  선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동일하다는 뜻이다. 

  이렇듯 조선조의 도자기나 민화에 표현되고 있는 선의 성격을 찾아냄으로써 한국인의 정서가 요구하는 선의 조형적인 특징을 요약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조선의 도자기 그림과 민화에서 볼 수 있는 선에 대한 시각적인 인상을 열거해 보자.  시각적인 인상이란 당연히 조형적인 특징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조선 도자기 그림 및 민화의 선은 굵고 거칠고 힘차고 명료하고 간결하고 단순하고 빠르고 투박하고 강렬하고 직선적이고 개략적이고 완성도가 떨어져 보인다.  그런가 하면 그같은 선에 내포되고 있는 정서적인 분위기는 솔직하고 우직하고 담대하고 직설적이고 직접적이고 어설프고 거리낌없고 주저하지 않는 바가 느껴진다. 

  이러한 선의 시각적인 인상 및 정서적인 분위기는 한국인의 성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림의 선은 개개인 및 그 민족의 성정의 발로임을 말해준다.  선이라는 것은 이성보다는 감성의 결과물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면 선과 함께 조형적인 요소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색채를 보자.  색채는 선보다도 훨씬 더 감성적이다.  시각적인 인상과 관련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색채이다.  즉 색채는 시각적으로 선은 물론이요, 형태에도 우선한다.  그림에서 첫 인상은 색채에 의해 결정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대회화에서 일체의 조형적인 요소를 배제한 채 단지 단일색채만으로도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색채의 자기표현성은 그림에 따라 선과 형태에 우선한다. 

  그러기에 독자적인 색채형식을 만들어내면 그것만으로 한 작가로서의 독립이 가능하다.  일본화가 독자적인 양식으로 인정받는데는 전체적인 색채이미지를 중간색조로 통일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본화의 중간색조는 일본인의 삶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어느 누가 강제적으로 중간색을 쓰자고 주장한 결과가 아니라는 뜻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화가들 스스로가 선호하는 색채이미지가 모여 일본화의 한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많은 화가들이 공통적으로 즐겨 쓰는 색채가 집단화 형태로 발전하여 미묘한 색조의 변화를 즐기는 일본화의 조형적인 특징을 이루게 된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어떤가.  한국의 그림에서는 예로부터 자연색보다 한층 강조된 원색이 많이 쓰였다.  이는 음양오행사상과 관련된 색채의식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상이 색채의 용도를 강제한다고 할지라도 개개인의 성격에 맞지 않으면 지속하여 쓸 수 없는 것이 색채이다.  하기야 조선시대의 민화에서는 내용을 중시한 나머지 오방정색(황 청 백 적 흑)이라는 기본적인 색채질서를 벗어나지 않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민화의 대부분이 목적화였다는 점에서 보면 오방정색을 기본으로 하는 색채질서가 우연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방정색은 그림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삶 도처에서 발견된다.

  각종 관혼상제의 복식 및 민속기물 등에 쓰이는 색채는 거의가 음양오행사상에 근거하는 오방정색이고 그 중간색인 간색으로 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음양오행사상에 의한 강제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생활 속에서 은연중에 그와 같은 원색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설령 오방정색의 중요성을 정책적으로 강조하였다고 할지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선호하지 않는다면 이미 한국민족의 생활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개화기 이후 색채감정을 강제할 수 있는 국가의 공권력이 국민의 색채감정에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어 일상생활에 쓰이는 색채는 원색에서 점차 중간색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가고 있으나 이러한 변화가 자연스러운 생활감정의 발로라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무의식중에 텔레비전 등과 같은 정보수단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 민족적인 색채감정이 여전히 솔직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역시 순수미술로서의 회화분야라고 할 수 있다.  순수미술에서의 색채이미지는 시류와는 상관없는 본성에 대한 호소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이다. 

  해방 이후 한 때 채색화는 일본화의 아류라고 하여 적대시했던 적이 있었다.  채색화는 일본 통치와는 상관없이 전래의 회화양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일본화가 채색화라 하여 경원시하는 경향은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채색화가 다시 한국화의 한 분야로 당당하게 자리할 있게 된 것은 박생광의 화려한 채색화가 높이 평가되면서였다.  그 이후 한국화단에서 채색화 인구는 급증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특기할 일은 한국 채색화는 일본화에 비해 한층 원색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색채 성향은 민화라는 전통회화에 대한 재평가 작업과 무관하지 않다.  즉, 오방정색으로 상징되는 한국적인 색채에 대한 관심 및 연구의 영향으로 원색 사용빈도가 높아지게 되었는지 모른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색채를 직접 선택하는 화가 스스로가 원하지 않고서는 원색을 그처럼 대담하게 구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한국인인 선호하는 원색은 어떠한 성향을 보이는가.  역시 선과 마찬가지로 시각적인 인상과 정서적인 분위기를 통해 살펴보자.  원색의 시각적인 인상은 화려하고 강렬하고 활달하고 명랑하고 명쾌하고 명료하고 선정적이어서 시각적인 호소력이 강하다.  또한 정서적인 분위기로는 대담하고 흥겹고 솔직하고 개방적이고 직선적이고 숨김이 없고 미진하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색채이미지는 한국인의 성정과 거의 일치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  한국인의 그림에 나타나는 선과 색채는 거의 그대로 한국인의 기질과 맞아떨어진다.  외국인이 보는 한국인의 성격이 솔직하고 감정적이며 성급하고 활달하다는 공통성이 선과 색채의 특징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무엇을 말하는가.  선과 색채는 결과적으로 그 민족의 생활감정 및 그 정서에 근거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한국인이 선호하는 선과 색채의 특징을 살려 작업한다면 한국적인 그림 및 조각의 양식이 가능하다.  그렇게 된다고 가정했을 때 이웃 중국의 국화나 일본의 일본화와 시각적으로 그리고 조형적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작업이 한데 모였을 때 자연스럽게 ‘한국성’이 담긴 한국 고유의 미술양식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넷, ‘한국성’을 실현한 작가와 작품

 

  한국적인 조형성 즉, ‘한국성’의 요건을 살펴보았다.  강건하면서도 굵직한 선과 오방정색으로 요약되는 원색적인 성향의 색채배열이 바로 ‘한국성’을 떠받치는 조형적인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키는 작가들이 있는가.  물론이다.  그 숫자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할 수 있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한국성’을 충족시키는 조형적인 특징을 변별해 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한국성’을 실현한 작가들만이 한국미술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성’이란 한국미술의 양식화를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일 뿐, 그 자체가 곧 예술적인 성과를 의미한다는 뜻은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성’을 실현하지 못한 작가일지라도 개별적인 세계를 확립했다면 당연히 그 성과를 인정해야 한다.  반대로 설혹 ‘한국성’의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을지언정 예술적인 가치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 ‘한국성’만이 작가적인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덧붙여 ‘한국성’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의 한 가지를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일부에서는 ‘한국성’과 관련하여 ‘한국인이 그리면 그것이 곧 한국그림’이라는 단순논리를 전개한다.  여기에서 간과하고 있는 점은 그림이 단순히 손이라는 신체적인 기능의 산물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림이 그려지는데 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손을 움직이는 것은 신체의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다.  정신적인 영역에 속하는 미의식이 손의 행위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림의 형식은 물론이요, 내용을 지배하는 것은 손이 아니라 미의식임을 알 수 있다.  예술창작에서 신체를 사역하는 미의식이 ‘한국성’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상태인데 어찌 한국적인 그림이 될 것인가.  미의식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서구미학에 감염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한국인이 그린 그림일지라도 ‘한국성’이 담긴 한국인의 그림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한국인이 그린 그림은 무조건 한국성이 담긴 그림으로 간주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한국성’은 작가 자신이 한국인으로서의 자의식으로 무장하고 나서 한국적인 아름다움, 즉 한국적인 미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자각하고 인식하는 한편, 그러한 미적 태도를 통해 작업했을 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다.  이 때 작가는 ‘한국성’에 대한 미적 태도는 있되 그를 미학적인 수준으로 논리화해야 할 의무는 없다.  이론적인 뒷받침이 선행될 때만이 ‘한국성’의 실현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작가는 스스로의 행위와 그 결과를 이론적으로 정리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술가에서 기대할 수 있는 창작성 또는 천재성이란 논리적인 성과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서 제시되는 ‘한국성’을 실현한 작가들의 경우 작가들 스스로가 ‘한국성’이라는 문제를 부단히 의식하면서 작업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측면에서든지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비록 ‘한국성’에 관한 정확한 개념을 이해하고 있지 않았을지라도 ‘한국적인 정서’를 의식하면서 작업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다.  서구미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상황이었다면 한국적인 정서 또는 그 이미지를 표현할 수는 없었으리라 보는 까닭이다.

  어쩌면 ‘한국성’을 실현한 작가들은 스스로의 미적 감수성을 순수한 상태로 열어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외부적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오직 한국인으로서의 미의식에 충실함으로써 내부로부터 싹트는 한국적인 정서에 순응할 수 있었으리라.  한국적인 정서야말로 ‘한국성’을 일깨워주는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한국성’을 실현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진정한 한국미술의 양식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박생광은 ‘한국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오방정색을 중심으로 하는 화려한 전통적인 색채를 구사했기 때문인가.  물론 그의 색채는 이전의 어떤 작가와도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  전통적인 채색화일지라도 오방정색을 순화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쓰는 작가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의 색채는 짐짓 화려하기 짝이 없다.  이처럼 순색을 그대로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그는 순색이야말로 회화적인 색채로서의 아름다움을 가장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더구나 오방정색이 가장 한국적인 색채이미지임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원색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여과되지 않은 순색으로 일관하는 그의 그림에 대해 회화성 즉, 예술성이 결여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기존의 색채이론을 뒤바꾸어야 마땅한 원색배열로 전혀 새로운 조형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그 새로움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 아닌 가장 한국적인 그림으로서의 한 원형을 제시한 데 있다. 

  선에서도 한국인의 기질적인 특성이 그대로 나타난다.  형태를 에워싸는 굵고 명확하며 간결한 윤곽선이야말로 한국인의 심성을 상징한다.  거기에 애매하거나 숨기는 이미지는 없다.  명백하고 뚜렷한 선에 의해 드러나는 형태에서는 힘이 느껴진다.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직설적인 표현어법이 바로 굵고 힘찬 선에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박생광의 작품은 소재 및 제재의 문제를 떠나 조형적인 특징만으로 볼 때 ‘한국성’을 가장 충족시키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응로는 수묵화에서 이미 ‘한국성’을 실현하고 있다.  일부 산수화 및 문인화의 대부분은 굵고 힘찬 선이 형태를 이끌어간다.  특히 투계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우직하면서도 강건한 선은 형태의 본질에 육박하려는 단호한 의지를 담고 있다.  단 일회적인 운필로써 형태를 완결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심상의 명확성은 물론 손의 기능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 줄만큼 뛰어난 형태묘사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그 필선에는 한국인의 기질적인 특징이 실려 있다.  뿐만 아니라 문인화적인 격조가 스며 있다. 

  또한 문자도 연작은 그 자신을 한국화단에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자도는 조형적인 전개과정을 보면 오히려 서구적인 미학개념에 가깝다.  평면적인 이미지를 도입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일련의 문자도에 나타나는 평면적인 이미지는 굵고 명확하며 힘찬 직선적인 윤곽선에 의해 만들어진다.  자기확신에 찬 선과 구성으로 문자를 기호화하는 조형어법을 보면 서구적인 미학개념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파리 생활은 시대가 요구하는 조형성을 수용하는 계기가 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서체화 형식을 따르는 서구 작가들의 작업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바가 있으면 예술적인 성과 또한 높다.

  성재휴는 산수화로 독자적인 세계를 확립한 경우이다.  그의 산수화는 기존의 준법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화법과 다른 조형적인 특징을 실현하고 있다.  둔중하고 힘차면 간명한 운필로 요약되는 새로운 조형개념의 산수화를 창조한 것이다.  선과 면을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하는 새로운 조형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운필법은 일체의 설명적인 요인을 생략하고 단순화함으로써 초소한의 이미지만으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형태의 본질에 육박해 들어가는 듯한 응축된 힘을 내포한 강렬한 선의 움직임은 시선을 압박할 정도이다.  면을 지향하는 듯 넓적하면서도 힘이 실린 윤곽선 하나로 형태를 완결하는 일회적인 묘사법은 대범하고 담대하다.  그토록 단순한 선으로 형태를 압축해낼 수 있다는 것은 수묵화의 본질이 생동하는 필선의 힘에 다름 아니라는 인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처럼 독특한 필선과 함께 황청적 등의 채색을 가미함으로써 기존의 수묵담채화와도 다른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산수화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김기창은 한마디로 대작가의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다양한 형식 가운데서도 가장 그다운 작업은 바보산수 연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에 집중되고 있는 수묵담채에 의한 인물화는 굵고 힘찬 윤곽선이 특징이다.  문인화적인 격조가 담긴 이러한 형태의 선은 1970-80년대의 바보산수로 이어진다.  바보산수는 이전의 양식적인 질서에서 일탈한 전혀 새로운 개념의 산수화로서 그의 독자적인 조형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인 삼원법 따위의 조형개념에 개의치 않는 자유로운 구도 및 구성 그리고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형태묘사를 주도하는 활달한 필세가 강건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형태의 선은 이미지의 선명성은 물론 내용까지도 명료하게 드러난다.  ‘바보산수’라는 해학적인 의미의 명제가 암시하듯이 양식적인 고루함에 빠진 전통적인 수묵산수화의 고상한 태도를 비웃는 듯한 인상이다.  형태를 압축하고 함축하는 윤곽선만으로 형용함으로써 시각적인 인상이 강렬하다.  고상한 취향을 추구한 전통적인 산수화의 격식을 타파함으로써 보다 서민적인 풍취가 짙게 풍기는 작업이다.  이렇듯 힘차고 활달한 필치는 역시 중국화나 일본화와 구별되는 점이 적지 않다.

  서세옥은 수묵화의 현대화 또는 현재화라는 과제에 부합하는 작업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문인화에서도 이전의 전통적인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롭고 개성적인 작업을 해왔다.  특히 형태해석이라는 문제와 관련해 현대적인 조형성을 전제로 하는 새로운 감각의 문인화에 관심을 보였다.  소재에 대한 변형 왜곡을 서슴치 않았는데 이는 형태해석과 관련이 있다. 

  그러다가 추상세계에 돌입하면서 수묵화의 현대화 또는 현재화라는 시대적인 요청에 응하는 형태의 ‘인간’ 연작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수묵만으로 표현되는 ‘인간’ 연작은 인간의 형태를 최대한 간략히 하여 유사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나열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러한 형식의 작업은 전혀 새로운 조형적인 접근방식이다.  이미지의 단순화에서 비롯되는 구성의 단조로움이 예상될 수 있으나 대형 붓에 의해 이끌리는 호쾌한 선의 운동성은 화면에 숨 쉴 틈 없는 팽팽한 긴장을 조성한다.  그것은 박동하는 선과 형태에 응축된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굵은 나뭇가지가 툭툭 부러지는 듯한 형태의 선 하나 하나에 실린 미묘한 변화의 기운이야말로 힘의 내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그의 작업은 단순한 묵선 만으로 무한한 변주를 가능케 하는 형태의 본질에 관한 보고서이다.  동시에 한국미의 특질 그 중심에 들어가 있는 현대적인 수묵화로 볼 수 있다.

  김환기는 추상작업 이전에 구상회화로서 이미 독자적인 미의 세계를 확립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1950년대부터 굵고 힘이 실린 검정색 선을 구사하기 시작하여 점차 세련미를 보태면서 비교될 대상이 없을 만큼 완벽한 조형미로 완성시킨다.  수묵화의 일회적인 필선과는 달리 겹쳐 긋는 가운데 선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처럼 선만으로 형태를 거의 기호나 부호에 가까우리 만치 간략하게 압축하는 그의 작업방식은 기교적인 장식미가 도달할 수 있는 극점을 보여준다.  선이 만들어내는 그처럼 세련되고 아름다운 인위적인 조형미를 일찍이 본 일이 있었던가.  이렇듯 약화형식의 작업은 직선과 곡선을 적절히 안배하여 세련된 조형미를 바탕으로 하는 독자적인 형식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그의 선은 과슈작업에 이르면 문인화처럼 일회성이 강조되는 선이 나타난다.  따라서 거침없으면서도 명확한 선묘는 시각적인 쾌감과 함께 감성을 해방시킨다.

  더욱이 십자구도라든가 점과 선에 의한 구성을 내용으로 하는 1970년대 이전의 비구상 작업에서는 오방정색에 근거하는 원색을 도입함으로써 민족적인 색채이미지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을 반영한다.  이러한 원색의 사용은 역시 오방정색에 근거하는 민족적인 정서와 관련한 색채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는 이미 한국적인 조형적인 특징이 무엇인가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수근은 색채에 관한한 지극히 절제된 감각을 보여준다.  적어도 그는 유채화에서 필요한 색채이론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색채는 금욕적인 대상으로 이해될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업에서 색채가 무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회화적인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유채색을 의식적으로 경원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가 추구하는 회화적인 이상은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파악하는 한국적인 정서란 토기 조선백자 분청사기 화강석으로 만든 조형물 등의 자연적인 색채와 연관성을 갖는 백의민족의 그 정신적인 순결성이었는지 모른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 두터운 질감은 화강석의 결정구조와 다름없다.  그런가 하면 검정색으로 함축되는 간결하고 투박하며 강직한 인상의 선은 조선백자 및 분청사기의 둔탁한 도화를 연상케 한다.  결코 세련되었다고 할 수 없지만 강건하고 소박하며 우직하면서도 정직한 인상의 선의 흐름은 도무지 꾸밈이 없다.  누구의 눈길도 거부하지 않는 듯한 검정색 선이야말로 그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정신의 순결성을 의미한다.  어눌한 가운데 명확한 자기인식에 이끌리는 선의 순박함과 친숙성은 그만의 형식미로 귀결한다.  세련미와 완성을 거부하는 듯한 간명한 형태의 검정색 선만으로도 충분히 한국적인 조형미를 실현하고 있다.

  전혁림은 박생광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오방정색을 사용, 한국적인 미의 원형을 탐구하고 있다.  단청의 색채배열 방식을 기조로 하는 그의 색채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중국이나 일본 그림과 차별되는 점이 있다.  특히 오방정색이라는 색채이미지와 함께 전통적인 문양을 도입함으로써 한국적인 정서를 한껏 강조하고 있다.

  표현방법에서는 면 분할에 의한 평면적인 이미지를 추구함으로써 시각적인 인상이 명료하다.  색면 대비로 요약되는 형식미는 자유로운 구성적인 이미지를 통해 실현된다.  작품에 따라서는 기하학적인 평면구성에 근접하는 차갑고 이지적인 면이 강조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삼원색 중심의 색채이미지는 활달하고 명랑하며 호소력이 강하다.  특히 어느 경우에는 검정색으로 면을 구획함으로써 색면 간의 경계를 명확히 함과 동시에 한층 명확한 색면대비 효과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러한 비구상적인 이미지는 전반적으로 단순한 색면 구성이 아니라 현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대상이 있다는 뜻이다.  집, 창, 걷는 사람, 화조, 한려수도-풍어제, 한국의 풍물 등의 명제가 말하고 있듯이 실제, 한국적인 풍경이나 풍물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이다.  이로써 한국적인 정서가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으로서의 자의식의 결과인 것이다.


  다섯, “한국성” 정립을 위한 실천적 방향

 

  독자적인 미술양식이 성립되는 과정을 보면 그 중심에는 그 사회 및 문화를 움직이는 사상이 존재했다.  르네상스는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이 배경이 되고 있으며, 동시에 과거 그리스 로마시대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복고주의 사상이 뒷받침되고 있다.  이는 한마디로 그 시대상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라는 사회적인 각성의 결과인 것이다.  즉,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의 발로인 셈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각성은 한 두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 사회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함으로써 그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도의 집단적인 형태의 운동에 의해 실효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기존의 미술양식이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미술양식이 등장하는 데는 많은 미술가들의 동조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미학, 또는 새로운 조형성에 대해 공감하고 거기에 동참하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미술운동이 있을 때마다 그러한 분위기를 유도할만한 새롭고도 획기적인 미학 및 조형성이 선행되었다.

  지구가 하나의 촌락 개념으로 좁혀지고 있는 세계화 시대에 새삼스럽게 한국적인 미술양식을 만들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우리 민족이 이 지구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바로 민족문화의 계승 발전이다.  이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정치 경제 사회체제에서 서구의 절대적인 영향력 속에 들어가 있는 한국으로서는 단일민족으로서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인 자주독립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 

  세계화의 개념을 표피적으로 이해하자면 세계인이 국가와 민족의 개념을 허물고 하나가 되자는 것이다.  마르크시즘이 지향했던 공동의 분배원칙이 이상주의로 끝나고 말았듯이 세계화도 이상주의로 끝날 공산이 크다.  아니, 좀더 냉정히 말하자면 세계화가 지구가족의 공동의 번영을 이상으로 내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서구를 중심으로 하는 선진국들이 기득권을 포기할 마음이 없는 까닭이다.

  세계화의 진행방향을 보면 가진 자의 논리로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신봉하는 세계화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가속화시킬 따름이다.  가진 자가 내놓지 않는 세계화는 허망한 것이다.  오히려 세계화는 국가와 민족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놓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울러 그 결과는 가진 자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것이다.  이는 이미 승패가 정해진 게임과 다름없다.

  돌이켜보면 세계화 이전에는 각 국가 및 민족의 문화는 어떤 형태로든지 계승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전개되는 자유시장경제체제가 확고한 틀을 잡게 되면 국가 및 민족의 문화적인 특성은 순식간에 사라질 위험성이 한층 높아질 것이다.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의 문화적인 속성상, 가진 자의 무차별 물량공세는 경제력에서 열세에 있는 문화를 급속히 잠식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세계화는 오히려 각 민족의 고유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과 함께 그로 인한 저항이 더욱 거세지는 계기를 마련하는 역기능을 낳을 수도 있다.  최근 우리 문화예술계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고 있는 현상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인 문제는 서구 중심의 경제강국들이 경제력을 무기로 하여 국가 민족간의 문화예술의 장벽을 허물어 마침내 문화예술의 대통합을 꿈꾸고 있을뿐더러 이미 그 시나리오가 착착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적인 현실 속에서 한국미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양식의 확립뿐이다.  이는 아주 시급한 과제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제기한 한국미술의 양식화를 위한 일련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양식화를 위한 제안이 반드시 모든 미술가의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또는 이보다 현실적인 새로운 방안이 제기되지 않는 한 여기에 공감하는 미술가들만이라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앞에서 제시된 한국성이 담긴 조형적인 특징에 합치되는 작가들만의 전시회를 통해 과연 한국적인 미술로서의 양식적인 특징이 뚜렷이 보이는가 여부를 검증해야 한다.  이러한 집단적인 노력과 병행하여 여기에서 제시한 조형적인 특징을 실현하고 있는 작가들 스스로가 한국미술의 양식적인 특징을 보다 구체화할 수 있는 자발적인 노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즉, 이를 통해 조형적인 특징의 명료한 시각화는 물론 사상적인 심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미술의 양식화는 궁극적으로 세계화 또는 국제화의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나와 국가 및 민족의 존재성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이다.  그러기에 한국미술의 독자성을 알릴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국제전을 비롯하여 각종 화집 또는 인터넷 등의 정보매체를 통해 세계인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적극적인 홍보활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 작가들이 참여하는 국제전과 같은 형태의 전시회는 한국미술의 독자성을 보다 선명히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 모든 노력이 계속되었을 때 서서히 세계인의 의식 속에 한국미술의 특징이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한국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한 조형적인 특징이 실현되었을지라도 예술적인 가치를 획득하지 못하면 소용없는 일이다.  한국미술의 독자적인 표현양식이 자리잡게 되었을지라도 보편적인 가치로서의 예술성을 인정받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적인 가치야말로 시대와 공간은 물론 국가와 민족 그리고 개인의 경계를 뛰어넘는 초월적 가치이면서 인간사회의 진정한 이상이기 때문이다. (끝)

                                                                

<이 글은 월간 '아트코리아' 2000년 3월호-6월호에 걸쳐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