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현대회화전’에 대한 에세이
보다 러시아적인 회화를 위한 정염의 詩
신항섭(미술평론가)
러시아의 미래는 없는가. 사회주의 체제를 청산하고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전환, 자본주의 정책을 추구해온 러시아가 불과 10년여만에 실패를 선언하고 말았다. 불과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미국과 함께 세계를 동서로 양분하는 초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해온 사실을 상기하면 러시아의 급속한 몰락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문화 예술에 대한 러시아의 국민적인 높은 관심 및 열정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예술 현장의 정염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경제력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러시아 예술이 짧은 시간 안에 경제적인 실패와 운명을 같이하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적어도 러시아 예술의 굳건한 전통과 수준 높은 예술적인 성과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러시아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문화강국의 면모를 유지하리라는 데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예술활동의 위축이 예상되기는 한다. 그렇더라도 러시아는, 그리고 러시아 예술은 새로운 자극을 기다리며 새로운 도약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예술에는 그러한 잠재력이 있다.
1980년대 말 글라스노스트(개방) 이후 러시아는 현대사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급격한 사회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 와중에서 사회주의 시절 통제된 예술정책 아래 숨을 죽이고 있던 화가들은 순식간에 찾아든 표현의 자유와 마주하여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모든 통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화가들은 자유를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허탈감을 먼저 느꼈다. 표현의 자유만 주어지면 세상이 놀랄만한 작품을 통해 억압된 상황 속에 갇혀 있던 예술적인 진실과 갈망 그리고 정염을 마음껏 토로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표현의 자유가 손안에 들어오자 화가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봉사해온 작가들은 물론이요, 거기에 거부감을 표시해온 작가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너무 오랜 동안 어둠 속에서 지냈기에 자유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스스로 깨우치고 새로운 세계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그들이 자유를 얻어 맨 먼저 할 수 있었던 일이란 겨우 화실의 창을 열고 먼지를 떨어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정말 세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을 때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봉사해온 작가들은 부동의 땅으로 여겨온 활동무대를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들에게 넘겨주어야만 했고, 새로운 활동무대를 보장받게 된 새 시대의 주인공들은 그 자신들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일이 부과되었음을 깨달았다.
새 시대의 주인공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주의 리얼리즘 조형개념의 사망을 선언했다. 아니 그들의 선언이 있기 전에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그림자를 감추고 말았다. 그 다음에 새 시대 주인공들은 억압된 사회에서 내면에 축적해 놓을 수밖에 없었던 표현의지를 아주 자유롭게 풀어헤치는 일을 착수했다. 그 하나의 방법은 억압된 내면을 말끔히 비워내는데 가장 효과적일 수 있는 추상적인 표현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그렇다. 20세기 말에 등장하는 러시아의 추상회화는 1920년대의 아방가르드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잘못 생각하면 글라스노스트 이후의 러시아 추상회화는 서구 추상미학의 뒤늦은 추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글라스노스트 이후의 추상회화의 여러 경향들은 표면적으로는 서구 추상회화와 비교해 크게 다른 점을 찾아 볼 수 없다고 생각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개방 이후 표현의 자유를 서구의 추상미학에서 찾으려고 한 일부의 화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영광을 반추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따지고 보면 서구 추상회화라는 것이 20세기 초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성취한 광범위한 세계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었던가. 설령 현대 미학을 진보 발전 진화의 개념으로 파악함으로써 과학을 미술의 표현영역으로 받아들인 입장에서는 할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순수추상 회화의 경우에도 그렇다. 그러나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창안해 내지 못한 여러 가지 방법적인 근거를 대가며 차별화를 주장한다고 해도 서구 추상회화의 완전한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사회주의 이념의 벽에 갇힌 채 부단한 자기변화를 모색하지 못했을 뿐 추상회화의 원류로서의 위상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러시아의 세기말 추상회화는 사회주의가 만들어 놓은 침묵의 지하에서 빠져 나와 과거로부터의 회생이라는 아픔을 겪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60년여간의 긴 공백을 일시에 메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조형언어 및 어법으로야 그 긴 공백도 단숨에 메울 수는 있다. 서구의 현대적인(이미 과거가 되었지만) 추상회화의 표현기법이나 표현언어는 시각적인 이해 및 방법에 대한 이해만으로도 아주 짧은 기간 안에 숙지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물론 예술이라는 것이 단지 시각적인 이해로 그 본질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고 착각이다. 문화적인 토양이 없이는 차원 높은 예술이 성립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오늘 우리가 글라스노스트 이후의 러시아 회화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1870년대의 ‘이동파’의 사실주의 정신에 이은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운동을 일으킨 그 혁명적인 회화의 실체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러시아에서 볼 수 있는 아방가르드는 추상회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에서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보다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전위적인 표현양식 및 형식뿐만 아니라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와 같이 재현적인 형식이 아닌 한 아방가르드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순수 추상을 포함하여 형태의 변형 왜곡은 물론이요, 형태의 재해석,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 형태의 해체와 재구성 등 20세기 초 러시아 아방가르드 이후에 등장한 조형언어 및 어법은 모두 아방가르드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따라서 서구에서 말하는 현재의 미술로서의 컨템포러리와는 개념상 차이가 있다. 이러한 개념적인 차이는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서구 추상미학과는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여기에는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대한 자부심이 결부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개념의 차이는 회화 현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러시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범위가 넓은 만큼 하나의 통일된 조형적인 논리로 분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추상표현주의 이후의 서구 현대미술을 사실상 주도해온 미국의 그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회화에는 아카데미 교육에 따른 사실적인 조형감각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에서 열린 감성 및 감각을 중시하는 서구의 컨템포러리와는 다른 조형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전체적으로 명확한 형태감각, 이미지의 명료성, 선명한 색채, 깊고 무거운 러시아적인 정서로 함축되는 특색이 자리하고 있다.
순수 추상의 경우에도 조형적인 힘이 넘친다. 막연한 내적 충동에 의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세상과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통한 내면세계의 표출인 것이다. 추상이 아닌 형상을 추구하는 구상적인 아방가르드 회화 역시 아카데미 교육에 의한 충실한 사실적인 이해가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기에 형태를 변형 왜곡하고 재해석하는 경우에도 감상자를 납득시키는 힘이 강하다. 조형 및 이론적인 근거가 확실한 것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회화를 이해하는 데는 몇 가지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아방가르드라는 새로운 미학개념의 출현에 따른 러시아적인 정서를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러시아미술사는 서구 유럽에 비하면 일천하기 짝이 없다. 17세기 중엽 근대 러시아의 기틀을 확립한 제정 러시아의 상징적인 인물인 표트르 1세에 의해 설립된 페테르부르그 미술아카데미가 그 출발점이라고 보는 것이다. 미술아카데미의 교육 프로그램이 프랑스 아카데미를 본보기로 삼았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그렇다. 더구나 미술아카데미의 창설에도 불구하고 18세기가 끝나는 시점까지 초상화와 장식화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풍경화 역사화 풍속화 등이 출현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러시아회화는 성상화(이콘)에서만큼은 독자적인 조형공간을 확립하고 있다.
러시아의 성상화는 12세기 초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처음에는 비잔틴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형태였다. 블라디미르, 노보고로드, 키에프 등지의 러시아 정교 교회당 건물을 장식한 성상화는 13-14세기에 이르면서 차츰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러시아적인 특색을 띠게 된다. 특히 14세기 이후의 성상화는 그 조형의 자유로움에서 아주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준다. 실제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여러 가지 형식적인 흐름 가운데 러시아 성상화의 영향은 하나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리스도와 성모 그리고 성자들을 그린 성상화는 지역에 따라 그리고 작가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조형적으로나 구성적인 면의 그 자유분방한 표현은 아방가르드의 교범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페테르부르그 미술아카데미는 생명 없는 고전적인 기능주의에 천착하고 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미술이 자기생명력을 기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19세기 후반 크람스코이, 게, 페로프, 레핀, 수리코프, 레비탄 등 아카데미의 경직된 교육체제에 반기를 든 일단의 진보적인 화가들에 의해 조직된 이동미술전협회(약칭 이동파)의 등장이야말로 러시아 회화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이들의 그림은 비로소 러시아의 자연과 러시아인의 삶을 소재로 하여 생명력과 향기를 불러넣었다. 더구나 아카데미라는 엄격한 제도적인 틀에서 그림을 해방시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시각을 가지고 주요 도시에서 순회전을 개최함으로써 민중의 삶과 함께 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러시아 사실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아카데미 교육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카데미 운영을 관장하는 경직된 사고의 관리들에 대한 반발이었을 따름이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의 등장과 상관없이 아카데미는 사회주의 시절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러시아미술의 근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페테르부르그와 모스크바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내 각 공화국들에도 아카데미와 같은 형태의 미술대학이 설립되어 기초에 충실한 예비작가들을 길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어 19세기 말에 이르면 ‘예술을 사회사상에 종속시킨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등장한 미술세계파가 등장, 모더니즘의 기치를 내세운다. 브루벨을 비롯하여 바스코트, 베누아, 소모프, 보리소프무사토프 등이 이 그룹에서 활동하며 탈 사실주의, 그리고 보다 현대적인 조형성을 모색하면서 아방가르드의 출현을 촉진한다. 이들은 20세기 초까지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그룹으로부터 영향받은 쿠즈네초프를 중심으로 한 ‘푸른장미파’가 새로운 조형성을 도입하였다. 뒤이어 1917년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모스크바 살롱’ ‘다이아몬드 재크’ ‘당나귀꼬리’ ‘표적’ ‘청년동맹’ 등 일련의 새로운 시대감각이 반영된 작품전이 개최되면서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확산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인상파 야수파 또는 입체파 등의 조형개념을 원용하는 상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에는 콘차로프스키를 비롯하여 렌툴로프, 마쉬코프, 라리오노프, 곤차로바, 말레비치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1913년 말레비치에 의해 시작된 추상주의 운동은 진정한 러시아미술의 저력을 확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전혀 새로운 미술운동은 혁명 이후에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파리에 있던 샤갈이 미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는 등 러시아 미술의 영광을 위한 계획이 착착 진행되는 듯했다. 한편에서는 칸딘스키, 말레비치, 필로노프, 로드첸코, 타틀린, 레베제프 등 혁신적인 작가들은 이전의 재현적이고 문학적인 제재를 배제한 순수한 지적인 탐구의 결과로써 제시되는 단순한 화면 구성을 조형의 원리로 삼았다. 물론 이 중에서 필로노프는 분석미술이라는 형상을 전제로 하는 독자적인 세계를 확립한 경우도 있다.
어찌됐든지 러시아의 새로운 추상미술 운동은 아방가르드, 즉 전위적인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비로소 세계미술사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그렇지만 그 영광도 잠시뿐이었다. 1932년 스탈린은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을 위해 자유로운 창의성이 요구되는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스탈린의 사회주의 이념에 동조하는 일단의 작가들에 의해 소비에트미술가동맹이 결성되면서 사태는 급변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모든 예술을 통합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동안 러시아미술은 개인적인 창의성이 극도로 억제되는 암흑기를 맞이한다. 스탈린 사후에 부분적으로 사회주의리얼리즘을 벗어나는 실험적인 미술운동이 허용되는 듯했으나 글라스노스트 이전까지의 러시아미술계의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와 함께 러시아미술을 이해하는 데는 또 하나의 길이 있다. 그것은 북방 소수민족에게서 볼 수 있는 채색 목각 인형을 비롯하여 장식 부조, 화려한 채색의 민속의상, 그리고 각종 생활기물에 그려지는 민화 등이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상화 즉, 이콘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공간감을 무시한 자유분방한 구성 및 평면적인 형태해석에 따른 단순한 형태미 등은 아방가르드가 지향하는 조형적인 원리를 직접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초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에서 그랬듯이 오늘의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러시아적인 정서와 관련된 이미지들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개방 이후 얼마동안 러시아미술계는 혼란스러웠다. 닫힌 문이 열리자 러시아미술에 대해 목말라 있던 서구미술계는 다투어 러시아에 들어가 비공식적인 미술을 뒤지고 다녔다. 서구미술계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스탈린 사후 일부 용감한 젊은 작가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시도된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 강령을 부정하는 비공식적인 예술운동과 그에 관련된 작품이었다.
1956년 당중앙위원회에서 흐르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한 비밀연설을 계기로 숨막히던 스탈린시대의 강압정치에서 벗어나는 해빙무드가 조성되면서 소수의 젊은 미술가들이 반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시작했고 마침내 1964년 에르미타지에서 이들에 의한 미술전이 열렸다. 여기에 참여한 작가는 크라브첸코, 우프란드, 오브치니코코, 젤레닌, 체미아킨, 리아가체프 등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이 허용되던 시절에 이들의 전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등장과 동시에 붓을 꺾었거나 자신의 어두운 아틀리에로 숨어들 작가들을 크게 고무시켰음은 물론이다. 에르미타지 전시회가 알려지면서 서방에서는 처음으로 1967년 로마 세그노화랑에서 기획한 “15인의 젊은 모스크바화가들”이라는 이름의 전시회가 열림으로써 햇볕을 보게 된다. 그로부터 서방세계는 다투어 러시아현대미술을 소개하는 전시회를 개최, 개방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미술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동서 냉전시대가 글라스노스트로 종지부를 찍게 되자 서방미술계는 거침없이 러시아에 들어가 냉전시대의 미술과 개방 이후 새로운 경향의 미술을 가져다가 전시회를 열었다. 그런데 서방미술계는 개방 이후 그처럼 짧은 기간 동안 쏟아져 나온 다양한 형태의 미술과 마주하면서 적잖이 혼란을 느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어떠한 특정의 경향을 중심으로 한 전시회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어쩌면 1967년이래 개방되기 이전까지 열린 수백 회에 달하는 개인전 또는 그룹전의 대부분이 같은 경험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러시아미술의 특수성과 관련이 있는지 모른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일단의 작가들은 억압된 사회와의 관계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비공식적인 전시회를 통해 그들의 의지를 표명하면서도 해빙의 무드를 어떻게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는가를 고민하게 되면서 그 하나의 방편으로 외국 화랑 및 미술관과의 연대를 모색한다. 비록 비공식적이라고 할지라도 외국 전시회는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수단으로서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체제를 직설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도덕적이며 이성적인 자아를 매개로 하는 작업으로 감시의 눈을 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대담한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개방 이전까지는 대부분 우의적이거나 은유 상징 암시적이며 때로는 이중적인 의미 내용으로 자신들의 욕구를 드러냈다. 그들의 조형언어는 20세기초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 보다 현대적인 것이었다. 어쩌면 서구 현대미술과의 갭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서구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작품도 적지 않았다.
개방 이후 아방가르드 작품 가운데 특이한 하나의 현상은 인간과 우주, 또는 탈 현상계에 관한 에세이, 지구 밖 외계에 대한 명상, 억압된 자아에 대한 고통,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굴종과 반성 등 거대한 주제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들의 화면 공간에 대한 이해는 초현실주의 회화가 이룩한 공간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러시아라는 거대한 땅을 밟아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스케일이 크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조형공간을 장악하는 힘은 아카데미 교육에 기초하지 않고서야 어찌 가능할 것인가.
개방 이후 새로운 역사의 전면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은 통틀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반하는 아방가르드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해서 도덕적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이른지 모른다. 예술이란 궁극적으로 개별성의 확립으로 매듭지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무튼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러시아 미술은 개방을 기다려 왔다.
과거 소비에트연방은 70여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인데다가 지리적으로도 서유럽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음으로써 생활방식이나 습관 등 모든 면에서 하나의 통일된 관점으로 이해하기가 사실상 힘들었다. 개방 이후 독립국가연합으로 그 체제가 바뀌어 사실상 다민족국가로서의 개념이 희박해졌다고는 하더라도 여전히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울러 미술에서도 그만큼 다양한 색채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실 개방 이후 러시아 현대미술, 즉 아방가르드는 어떤 특정 양식이나 형식이 주도하는 상황이 아니다. 개인적인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형편이기에 어느 하나의 경향으로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90년대 말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서구 추상미학을 추종하는 세력과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전통 속에서 현대성을 모색하는 세력으로 크게 구분해 볼 수는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분류방식이 전적으로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없다. 러시아 현대미술은 그처럼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을 복잡하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다양할 뿐이다.
이번 ‘갤러리 코리아’에서 기획한 ‘러시아 현대회화전’은 90년대 회화에 한정하고 있다. 90년대는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통제된 사회로부터 개인적인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차츰 적응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국영기업이 민영화되고 사유재산이 부분적으로 인정됨으로써 부동산의 매매가 이루어지며 새로운 자본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경제를 실험하는 시기인 것이다. 이처럼 급변하는 사회적인 기류 속에서 화가들도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 사회주의 시절에 화가는 국가로부터 화실과 기본적인 재료를 제공받았다. 다시 말해 국가공무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개방과 더불어 그러한 혜택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서구 화가들처럼 스스로가 작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고 생활 또한 자급자족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 대신 생활의 짐을 안게 된 셈이다.
이러한 상황변화는 화가들로 하여금 그림을 생계수단으로 삼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그림을 팔아야만 하게 된 것이다. 90년대 초 러시아에도 아주 초보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상업화랑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 때의 화랑들은 대부분 외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지극히 상업적인 운영방식을 취했다. 그러다가 러시아 내 신흥 자본가들의 숫자가 늘어남과 함께 새로운 고객 층이 형성되면서 기획 전시를 위주로 하는 서구적인 화랑들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이들 상업화랑을 상대로 그림을 팔아 생계를 해결하는 화가들의 숫자도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상업화랑으로부터 관심을 끌지 못하는 화가들의 삶은 사회주의 시절보다도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러시아 현대회화전’에 참가하는 화가들은 대부분 상업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각종 미술단체 및 미술관 등의 기획전에 초대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이 상업적인 성과에 눈을 돌리고 있다고 해서 예술적인 순수성을 잃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이들은 예술가의 자존심을 파는 데는 아직 익숙해 있지 않다. 다만 그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그림을 팔아야 한다는 소박한 시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러시아의 현대미술은 단적으로 말해 건강하다. 무엇보다도 화가들 자신이 러시아적인 예술의 전통과 그 가치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들 자신을 만든 러시아의 미술아카데미와 같은 교육방식에 대해 부분적으로는 의문을 갖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서구미술이 아카데미 교육방식을 버리고 단순히 개인적인 창의성만을 부추기는 교육으로 일관해온 지난 1세기의 결과가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보고 있는 까닭이다.
서구적인 시각에서 아카데미는 개인적인 창의성을 죽이는 엄정한 규율, 규제로 인해 비생산적이라고 폄하한다. 하지만 개방 이후 러시아 현대미술을 보면서도 그와 같은 주장을 반복할 수 있는지 냉정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 미술아카데미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위해 기능해온 부분은 인정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카데미 교육방식이 반드시 전근대적이고 비창의적인지는 개방 이후의 러시아 미술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창의성만을 미덕으로 여겨온 서구미학이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세기말적인 징후를 보이고 있는데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에 비해 아카데미 교육방식으로 일관해온 러시아의 현대미술은 새로운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아카데미는 19세기 말 이후 서구미술계가 등한시해온 대상에 대한 철저한 관찰 및 이해를 바탕으로 사물에 대한 숭고한 이념을 깨우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아카데미에서 훈련된 사람들은 물질적인 이념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서구미술에 대항하기라도 하듯 실제적이고 현상적인 것의 소중함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러시아 현대회화전’의 작품들이 바로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아카데미 교육이 세상에 대해 무지한 순응주의자들만을 양산한다거나, 사실주의에 대해 교조적인 시각만을 강요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다. 물론 러시아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사람들 중에서는 아카데미가 그들 자신의 예술적인 신념과 자유를 억압하고 제도권 안에 묶어두려는 데 대해 저항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아무런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서구의 현대미학을 수용하는 문제에서도 내부적으로 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를 부정하면서도 개인적인 자유와 신념을 쟁취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소홀히 함으로써 자칫 서구미학의 맹신주의자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아무런 대안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아카데미를 부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것이 되었다. 차라리 아카데미는 예술적인 표현의 자유를 얻기 위한 기초 역량을 닦는 것을 포함하여 인체와 사물 그리고 세상을 정확히 인지 인식하는데 필요한 미적 감각과 안목을 갖추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보다 진실한 태도일 것이다.
개방 초기에 서구 미술계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외국전시회에 열중했던 작가들 중 서구에서 자리를 굳힌 사람은 생각처럼 많지 않다. 그 자신의 예술적인 신념과 상관없이 서구미술계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따라간 데 대한 당연한 결과이다. 그들이 간과한 러시아적인 전통, 즉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요해온 아카데미는 좋든 싫든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자 그 자신의 원천이라는 점을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적인 신념이란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은 것이어서 예술에의 열정만 있다면 언젠가는 자기 감동에 의한 진실을 말하게 된다. 비록 아카데미가 관리들에 의해 조종되고 있을지라도 거기에서 그들이 배운 것은 작가로서 자립하는데 필요한 것이었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러시아 미술을 희망적으로 보는 것은 아카데미의 교육방식이야말로 20세기 현대미술이 처한 위기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다. 단순한 개인적인 추측이 아니라 ‘러시아 현대회화전’ 참가 작가들의 작품이 그같은 점을 뒷받침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떠올리면 20세기초 아방가르드 정신에 대한 아쉬움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되었을 뿐, 러시아 민중의 현실적인 삶의 실체에 접근하지 못했다. 단지 사회주의 체제를 찬미하는데 봉사하는 것으로 자족했다.
어느 사회 어떠한 체제이건 간에 예술가 개인의 일상적인 경험이 예술에 반영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적어도 시대를 앞서가지는 못할지언정 그 자신과 함께 가는 민중들의 삶의 참모습을 외면해서는 참다운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없다. 현실과 개인적인 경험이 반영되지 않은 유미주의 또는 기능주의에 충실하는 것만으로는 설득력이 약하다. 즉 감동이 약할 수밖에 없다.
스탈린 헌법이 발효되기 시작한 이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동조해온 작가들은 개방의 물결에 밀려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있다. 사회주의 이념에 길들여져 있는 그들의 감성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미학에 적응할 수 있는 힘도 명분도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오늘의 러시아 작가들도 마냥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반기를 들면서도 거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개방 직후 아카데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무덤이 되어야 한다고 외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 대한 반감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서구미학에 열광하던 작가들 사이에서도 어느 길이 러시아가 가야할 길인가를 돌아보게 되었다. 차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객관성을 가지게 되면서 서구의 현대미술을 보다 포괄적으로 보는 여유를 찾게 되었다고 할까.
‘러시아 현대회화전’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보면 희망적인 메시지로 넘친다. 새로운 미학을 추구하는 그들은 대 선배인 20세기초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들과의 영적인 교감을 믿고 있다. 그리고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새롭고 영원한 낙원을 건설하겠다는 의지와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미래는 생각처럼 밝아 보이지 않는다. 자유시장경제가 실패로 끝날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의 불안한 모습은 예술가들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활동은 경제력에 비례한다. 경제력이 커지면 예술 또한 역동적인 모습을 띠게 마련이다. 오늘 현대미술이 미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현상이 이를 말해 준다. 그렇더라도 예술의 희망적인 미래를 경제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예술의 진면목은 예술가의 숭고한 정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러시아 작가들 중에서는 개방 이후 러시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를 보면서 거기에 대항한다. 개개인에 있건 또는 국가에 있건 과거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볼 수 없던 많은 부정적인 요소는 예술로써만이 치유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에서인지 모른다. 반면에 사회상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러시아의 전통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으려는 작가들도 많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일은 사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작가들의 비판적인 시각 이면에는 어김없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러시아의 미래와 연관지으려는 소박한 의도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아방가르드로 상징되는 러시아의 예술적인 자부심이 깔려 있다.
설사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훈련 숙련된 노동의 미학과도 같은 단순한 작업에 대한 역사적인 부담을 공통의 과제로 안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머지 않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가져온 공백을 뛰어넘는 예술의 위대성에 대한 감동 및 감탄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개방 이후의 아방가르드에서는 러시아정교와 연관지을 수 있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 적지 않다. 또한 러시아의 대평원과 무성한 삼림 그리고 거기에 터전을 두고 살아가는 러시아인의 굳건한 삶에 대한 애정이 담긴 작품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종교에 대해 전혀 경험이 없는 세대들도 러시아 정교 및 러시아 땅이 그들의 삶과 예술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상당 부분 수도원 교회 등에 안치된 성상화에 대한 정서적인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 오늘의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근본적인 이념은 사회주의로 인해 잃어버렸던 러시아적인 삶과 정서 그리고 종교에 관한 물음이 깔려 있다. 그들은 이를 근거로 하여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형식적 통일을 꿈꾸고 있다. 러시아적인 삶 정서 종교는 잠재적으로 작가들을 자극하는 것이다.
일부 러시아미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러시아적인 전통을 강화할수록 예술적인 가치는 저하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러한 시각에도 아랑곳없이 러시아적인 전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러시아 예술의 자산이다. 러시아미술의 전통 또는 예술적인 전통은 어떠한 외부적인 비판도 수용하고 또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라는 통제된 사회 속에서 이룩한 발레라든가 음악을 보면 러시아미술 러시아예술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기능적인 훈련의 결과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시각을 어느 정도 존중하면서 보더라도 그렇다.
서구미학으로 세계를 통합하려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러시아의 저력과 독자적인 행보의 가능성은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 이 시간 세계미술을 주도하고 있다고 믿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서구적인 경험과 가치를 정당화시키며 예술의 세계를 재편하려는 그들의 음모는 과연 올바른 것인가.
민족예술이 세계와 동일시되지 않는 것이 왜 문제인가. 예술이 하나의 가치관으로 통합되어야하고 또 반드시 진보적이고 발전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인가. 예술적인 이상이란 서로 간의 생활 경험 환경에 따라 다른 것이다. 특히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연대감이 강한 민족일수록 그 예술은 그 민족만의 특수한 경험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 특수한 민족의 예술에 대해 가치가 낮다고도 할 수 없다.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되는 피카소의 입체적인 회화가 아프리카의 리베리아 조각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진정한 미적 가치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미술전시회는 어떠한 목적 어떠한 의도에서 기획되든지 간에 서로 다른 경험과 지식에 의해 형성된 다양한 비판적인 시각을 피해나갈 방도는 없다. 어차피 전시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기획되고 또 거기에는 소수의 개인적인 안목에 의해 선택된 작품들만이 진열되게 마련이다. 러시아를 여행하고 또 러시아에 대해 좀더 깊이 이해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라면 이번 ‘러시아 현대회화전’에 출품되는 작품들이 드넓은 평원과도 같은 러시아미술의 아주 적은 부분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 피상적인 글로는 러시아 현대미술의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것을 밝혀둔다.
<1998년 "갤러리상", 1999년 "광주시립미술관", 2003년 "대구문화예술회관" 순회전 전시회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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