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련 논문

논문 (2) - 문인화의 위상, 그리고 현대회화로서의 비전

펜보이 2007. 7. 24. 23:09
 

  문인화의 위상, 그리고 현대회화로서의 비전


   신항섭(미술평론가)

 

 

  문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필요성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 세계미술계는 세기말적인 징후를 뚜렷이 보이고 있다.  다가오는 21세기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면서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입장으로서의 명확한 시나리오가 없다.  그저 막연히 지금보다는 좋은 시대가 되겠지 하는 달콤한 꿈에 사로잡혀 있을 뿐, 이렇다 할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세계미술계는 지금 이념의 부재상태에 있다.  전통적으로 미술가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손의 기능을 아이디어 및 방법론의 하위개념으로 전락시킨 현대미술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이다.  과학에 의존하고 아이디어를 방법론으로 내세운 현대미술은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달이나 그에 따른 또 다른 기발한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지속적인 진보 발달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현대미술은 속도를 기반으로 하는 부단한 자기부정 및 변신을 발전의 논리로 채택함으로써 아주 빠른 시간에 그 종점(?)에 도달했다는 인상이다.  그 종점이 다행히 20세기말을 의미한다면 큰 문제는 없다.  즉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을 전제로 하는 종점을 뜻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이념의 부재상태를 그대로 방치할 수밖에 없다면 현대미술은 21세기에는 전통적인 조형개념에 그 자리를 넘겨주어야 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  이러한 예측은 이미 80년대 말부터 세계미술계에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 즉 형상에의 복귀라는 새로운 움직임으로 구체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미술은 어떤가.  세계 현대미술을 거의 시차 없이 수용해온 한국 현대미술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모습의 현대미술이 공존하고 있지만 세기말을 상징할 수 있는 특정 방법론이나 미술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아이디어의 고갈에 처해 있는 양상이다.  이러는 과정에서 일부이긴 하지만 전통미술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영향력 있는 작가나 미술단체에 의해 주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수의 작가 개개인의 개별적인 모색이 전체적인 시각에서 하나의 경향성으로 파악되고 있는 정도이다. 

  전통미술에 대한 관심은 한국화 분야의 당면과제이기도 하다.  오늘까지 민족적인 정서의 표출이라는 형태로 존재해온 한국화야말로 전통성이라는 문제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화의 현대성과 관련해서도 전통성이라는 문제는 결코 논외할 수 없는 과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화 분야에서의 전통성은 단지 과거의 유산을 재발견한다는 정도의 소극적인 시각에 머물고 있거나 아예 부정적으로 보는 일도 적지 않다.  전통성이야말로 한국화의 현대적인 해석을 가로막는 족쇄와 같은 존재일 따름이라고 단언하는 경우까지 있다.  이와 같은 시각은 대부분 서구적인 현대 조형개념을 한국화의 현대화(?) 작업에 직접적으로 도입하려는 데 연유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에는 우려할만한 점이 있다.  즉 한국미술에 대한 조형개념의 현대화가 의미하는 것이 다름 아닌 서구적인 미학의 틀에 대입시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미술의 현대화에 대한 가치기준을 서구미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달리 말해 20세기의 과학문명을 이끌어온, 합리적인 사고에 중심을 두는 서구적인 패러다임을 한국미술에도 그대로 적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예술적인 가치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소치이다.  자유정신의 산물인 예술을 합리적인 사고로만 이해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현대미술이 변화되어온 과정을 보면 거기에는 오히려 서구적인 합리주의가 아닌, 동양의 자연주의적이고 초월적이며 비과학적인 사고 및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이미 서구 현대미술이 인정한 사실이다.  추상표현주의는 그 단적인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한국화의 현대성, 또는 현대적인 해석은 동양적인 사상에 바탕을 두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며 미래지향적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한국화의 현대성이라는 이름 아래 모색되고 있는 새로운 조형세계의 가능성 또한 다름 아닌 한국미술의 전통 속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어쩌면 오늘 한국화 분야에서 한국적인 회화전통과 관련해 나름대로 그 원형을 가장 잘 지키고 있는 분야는 수묵화가 아닐까.  특히 그 중에서도 오늘까지도 순수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문인화야말로 민화와 함께 한국적인 정서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표현양식이 아닐까.

  문인화는 오늘의 한국화단에서 열외의 입장에 있다.  엄연한 한국회화의 한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주요 공모전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문인화의 화목이자 독립적인 제재인 사군자가 서예의 한 분야로서 취급되고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물론 문인화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문인화는 사대부와 선비들의 여묵일 뿐이라는 전래의 소극적인 회화관에 근거하고 있다.  바꾸어 말해 문인화는 화원들의 그림과 달리 본격적인 그림이 아니라, 사대부 및 선비들이 학문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심신을 쉬기 위한 여흥의 하나에 지나지 않다는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기능을 위주로 하는 직업적인 그림, 즉 화원의 기교적인 그림을 격하하는 뿌리 깊은 화원천시 풍조에 기인한다.  문인화를 본격적인 그림으로 인정하면 양반들 또한 격이 낮은 신분의 화원, 즉 환쟁이와 다를 바 없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에 문인화는 독립적인 회화의 한 장르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직업적인 화가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할 장르인데도 이렇듯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닫힌 공간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바꾸어 말해 문인화의 현대적인 조형성에 대한 가능성 즉, 무한한 조형적인 변주를 특징으로 하는 표현의 개방성이 사장되어온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순전히 양반사회와 서민사회를 엄격히 구분해온 조선시대의 파행적인 정치관 및 미숙한 세계관의 소치이다.  이렇듯 편협한 시각은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의 여지를 스스로 봉쇄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문인화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기 이전에 문인화에 대한 이제까지의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한국화는 새로운 가능성의 땅에 들어서는 것이 된다.  한국화 분야를 포함하여 한국미술계 전체가 서구적인 이념의 실험장으로 전락하고 있는 듯한 현실에서, 그리고 그 결과 이념의 부재상태에 있는 현 상황에서, 문인화는 이를 극복하는 데 따른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한국 미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문인화와 한국 문인화의 역사 및 관계를 살펴보고, 문인화가 한국 현대회화 속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함께 궁극적으로 한국화에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문인화의 정의 및 유래


  문인화는 명칭이 시사 하듯이 직업적인 전문화가가 아닌 문인 즉, 높은 학문적인 지식과 시 또는 문장에 능숙한 사대부 및 선비들의 그림을 일컫는다.  한마디로 학문적인 소양이 높은 사람들이 시와 문장을 짓거나 글씨를 쓰다가 머리를 식히기 위한 여흥으로 그린 사군자 또는 산수화 등 비전문적인 그림을 뜻한다.  하지만 문인화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는 직업적인 화가들의 그림과 구별하기 위한 편의적인 해석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문인화를 보면 문인들의 그림이라는 시각은 극히 단면적인 측면만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인화의 초기에는 분명히 문인들의 그림에 국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직업적인 화가들의 그림과 구별되는 점이 많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직업적인 화가들에 의해서도 문인화가 하나의 보편적인 표현양식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사실상 전문적, 비전문적인 구분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중국에서 문인화가 시작된 것은 당대로서 이때는 이미 중국화의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온 파묵법과 발묵법이 나타나는 등 중국회화사에 있어서 가히 문예부흥기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당대는 미술이 극도로 신장발달이 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성숙되어 있었던 것이다.’ (권덕주, 중국미술사상에 대한 연구)

  문인화의 시조로 알려지고 있는 왕유는 바로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화가의 한사람이다.  왕유가 활동하던 시기의 당은 사회적으로 문학과 예술이 장려됨으로써 글줄이나 읽을줄 아는 사람이면 시를 노래하고 감상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기에 문학열이 고조됨으로써 문인이나 학자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미술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 왕유는 당시까지 정통화법으로 인정돼온, 소위 금벽이 번쩍이는 농채의 극사실적인 표현기법을 벗어나 수묵의 선염법에 의한 사의적 화풍(몰골수묵산수)을 제시함으로써 일대변혁을 가져온 것이다.’ (김종태, 중국회화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유를 문인화의 시조라고 하는데 대해 김종태는 수묵을 사용한 오도자에게 왕유가 그림을 배웠다는 점을 중시하면서 오도자를 진정한 문인화의 창시자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문인화의 시조가 어떻든 간에 문인화는 수묵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단 채색이 아닌 수묵으로 그린 사의적인 그림을 문인화의 범주에 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당대에 시작된 문인화는 본격적인 산수화의 발흥과 함께 중국회화의 주류의 하나를 형성하면서 송, 원, 명, 청대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문인화가를 배출한다.  어쩌면 오늘 문인화는 중국회화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확고한 회화장르로서 존재하고 있다.  물론 산수화를 비롯하여 인물, 화조, 영모, 절지, 사군자 등 다양한 소재 및 제재를 거느리고 있기에 문인화의 개념이 초기와는 달리 크게 확대 해석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문인, 학자, 사대부, 도사, 승려 등 학문적인 소양이 높은 사람들에 한정돼온 수묵화가 전문적인 화가들의 가세로 널리 확산되면서 신분에 따른 경계가 허물어진 것이다.

  특히 초기 문인화의 시작과 관련한 사회적인 움직임은 불교의 선가의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문인화의 개조 왕유가 독실한 불교신자이면서 시와 미술에 선의 정신을 투영시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발묵의 중심지인 중국의 강남 지역은 선종의 중심지라는 점에서 왕유를 비롯한 문인화가들의 정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작품 속에 용해되고 있음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문인화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쓰이기는 동기창 이후의 일이지만, 문인화의 내용이라고 할 회화에 있어서의 정신주의, 즉 형사를 초월하여 작가의 흉중의 일기를 표현코자 하는 경향이 문학자나 화가들에 의하여 크게 고조되고 또 이론화된 것은 바로 북송시기의 일이며, 그 중심적 인물이 바로 소동파와 미불 그리고 황산곡 등이었다.’ (권덕주, 중국미술사상에 대한 연구)

  송대를 거쳐 원대말에 이르러 원말 4대가라고 불리는 예찬, 황공망, 왕몽, 오진의 출현으로 흉중의 상을 표출하는 간결하고 절제된 필획의 새로운 기풍의 문인화가 출현한다.  이를 이어받은 명대에는 동기창의 상남폄북론에 힘입어 정신적인 깊이를 추구하는 남종문인화의 전성기가 도래한다.  그리고 청대에는 양주팔괴라는, 정신적인 면뿐만 아니라 화풍에서도 개개인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형식타파의 자유로운 문인화가들을 배출하게 된다. 

  중국 문인화의 시작은 문인고사, 사대부들의 여흥 여기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비전문가, 전문가의 구분 없이 중국회화의 주류가 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중국 문인화는 단순히 전문가의 그림에 대응하는 비전문가의 그림이라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중국회화를 대표할뿐더러 동양회화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채색화에 대응하는 수묵이라는 재료를 사용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형태묘사에 집착하고 채색을 중시하는 북종화에 대응하여 정신적인 세계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 또한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성립시키는 요인이다.


  중국 문인화의 특징


  중국 문인화는 적어도 1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회화사를 얘기할 때 도안화시대(250-400BC), 인물화시대(BC400-AD906), 산수화시대(906-1920)로 구분하는데 문인화의 시작은 바로 산수화시대에 속한다.  따라서 문인화는 곧 산수화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문인화가 반드시 산수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중국회화에서 산수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장르에 비해 현저하게 높다는 사실로 미루어 문인화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산수화가 문인화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볼 때 중국문인화의 성격을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해 산수화는 수묵을 위주로 하는 그림이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수묵은 그림 이전에 문인 학자들의 필수적인 재료의 하나이다.  즉 글씨를 쓰는 일상적인 재료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묵산수화라는 회화양식이 문인과 학자들에 의해 그 틀이 완성됐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국에서 문인 학자들이 그림 그리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 장언원의 ‘역대명화기’에 주창한, 문자와 그림이 그 뿌리가 같을 뿐만 아니라, 내면 표출에 필요한 용필법이 공통적이라는 설에 힘입은 바 크다.  또한 북송시대에 이르러서는 글씨나 그림이 작자의 인품의 반영이라는 또 다른 해석이 문인화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따라서 문인 학자들이 글씨와 병행하여 그림 그리는 일은 이로써 사회적으로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당대에 이러한 문화적인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육조 이후에 이미 그 예술적인 기반을 확립한 글씨와 병행하여 회화 또한 그에 상응하는 예술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성숙된 데 따른 결과이다.  즉, 성당기에 크게 발전한 회화 예술의 자연스러운 자기 지위 향상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든 수묵산수화를 새로운 회화의 표현양식으로 정착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왕유를 중심으로 한 오도현, 왕치 등의 뛰어난 화가들이 문인화의 기법을 새롭게 창안, 수묵산수화의 예술적인 기반을 확고히 다져놓게 되자 일반 직업적인 화가들도 이에 가세하게 된다.  이쯤에 이르면 벌써 산수화가 문인들만의 그림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게 된다.  하지만 수묵산수화와 함께 문인화라는 표현양식이 여전히 그 존재성을 잃지 않게 된 것은 당대 이후 수많은 문인 학자들에 의해 지고한 예술성이 담긴 뛰어난 명화들이 무수히 제작됐기 때문이다.  문인 학자 그리고 직업화가 구분 없이 수묵산수화를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문인화로 분류, 그 예술적 가치가 한 차원 높게 평가하게 된 것은 명대의 문인화가 동기창의 출현과 함께 한다.

  ‘동기창은 중국회화사상 처음으로 남북종설을 주창, 문인화를 화원들의 그림과 구분하였다.  다시 말해 그 자신의 문집 중의 ‘화지’에 ‘선가에 남.북 2종이 있으니 당시에 처음 구분이 생겼다.  화에도 남.북 2종이 있어 역시 당시에 구분된 것이나, 다만 화가의 지리적 남북에 의한 구분만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동기창은 ‘남.북 분종의 주안이 순전히 작가의 작화상의 의경에 입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동씨가 제시한 남북 분종의 다른 또 하나의 기준은 문인화와 원화체의 구분이다.  문인화와 남종화가 같은 것으로, 그리고 화원화와 북종화를 역시 동일하게 보고 있다.’(중국예술사상에 대한 연구, 권덕주)

  여기에서 동기창이 굳이 문인화를 화원화와 구별 지으려는 것은 ‘작화상의 의경’ 즉 그림은 단순히 손의 기술이 아니라, 그림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정신적인 가치를 더욱 중요시해야 한다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은 생각에는 고래로부터 중국인의 의식세계를 지배해온 천일합일 사상이나, 무위자연을 역설하는 노.장사상 그리고 도가사상 및 선가사상 그리고 유가사상 등이 자리한다.  이들 사상은 한결같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데 있다.  자연에의 순응을 기본으로 하여 대자연이 지니고 있는 상도에 따르면서 그 자연과 일체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상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인격의 도야해야 하는데 학문이나 예술은 그 하나의 해법의 하나로 보았다.  정신의 고양을 위해 그림을 그리되 실재의 재현에 그치지 않고 그 실재를 이끄는 정신의 존재를 시각화하는 일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전문적인 솜씨가 아니면서도 정신적인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던 셈이다.  문인화에서 요구되는 화의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림이란 궁극적으로 현실적인 풍경, 즉 사실적인 형태미를 초월하는 데 있는 것이다.  설령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거나 모방하는 경우에도 결과적으로는 작가 자신의 비전에 의해 재해석되기 마련이다.  중국 문인화가 전통적인 산수화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일깨워 준다.  중국의 그림은 문인화를 포함하여 중국이라는 대자연에 대한 중국인의 새로운 비전의 제시라는 점이다.  어쩌면 중국회화는 문인화를 통해 보다 뚜렷한 중국적인 세계관을 확립할 수 있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문인화를 통해 정신적인 가치라는, 시각적인 세계를 초월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성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이전에는 세계 어디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산수화가 자연을 빙자하고 있지만 문인화는 자연미를 뛰어넘는 곳에 의연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문인화의 성립과 개요


  한국은 아시아대륙의 변방에 위치한 조그만 반도국가라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인해 고래로부터 그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앞선 문명을 이끌어가는 중국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시아대륙의 맹주인 중국이 먼저 국가가 성립되고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중국과 인접하고 있는 한국은 자연히 중국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문화란 소통이 이루어진다면 선진한 곳에서 후진한 곳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따라서 개국이 늦은 한국으로서는 앞선 중국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인 황하를 중심에 두는 중국대륙은 오랜 역사 못지않게 문화도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  무엇보다도 한자라는 독특한 상형문자를 가지고 있는 중국의 문화는 서양문명에 대응하는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 발전시킴으로써 동아시아 군소 국가의 문화의 원류가 되고 있다. 

  특히 한국은 적어도 15세기 세종대왕에 의해 한글이라는 고유의 문자가 창제되기 이전까지는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그대로 빌어다 써야만 하는 입장이었기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회화의 경우에도 중국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다.  고구려 벽화가 중국의 그것과 구별되는 점이 많다고 할지라도 한국 고유의 회화양식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은 역시 그 이전부터 중국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에 문인화가 시작된 것은 언제일까.  이에 대해 이동주는 ‘한국회화소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국에서 문인화가 시작된 것은 대략 고려 말로 추정하고 있다.  회화에 있어서 한.중 관계는 아마도 신라통일 이전의 삼국시대에 화공의 교류, 특히 중국화공의 도입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 뒤로는 화공의 직접적인 교류보다는 이 땅의 화공, 화승의 계층과 문인화가의 일단에 의하여 그림이 제작되었으며, 미관과 화법은 대체로 작품의 수입 교류와 문인취미, 중국화론 전파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때로 고려 충렬왕 때와 같이 동시대적으로 영향을 받고, 때로는 조선시대의 병자호란 후와 같이 근 백년을 격하여 새로운 화풍을 도입하는 등 정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회화의 도입과정에서는 역시 중국과의 정치적 상황에 크게 좌우되고 있었다.  중국문화에 의존해온 한국문화의 발전경로를 말해 주는 대목이다.  문인화가 한국에서 시작된 것을 고려 말로 추정하면 중국은 명대 후기에 속한다.  이 시기에는 이미 원4대가들에 의해 그 터전이 확립된 문인화가 오파를 중심으로 그 저변을 확대하면서 심주, 문징명, 동기창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문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선 이후의 일이었다.  조선시대는 국시를 유교로 하면서 문인 사대부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정치 사회체제를 지향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유교사상은 서화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불교국가였던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불교미술 중심의 서화예술은 큰 도전에 직면한다.  즉, 불화 및 단청 등 불교문화의 진흥에 기여해온 전문적인 화공 및 화사들의 채색화가 천시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유교적인 학문을 숭상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에 따라 문인들이 여기로 즐기는 비전문적인 그림인 문인화가 대세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인 여건 변화에 따라 유교사회인 조선시대에 문인화가 사회중심체인 문인 사대부 사이에 하나의 보편적인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게 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이동주는 ‘이러한 시대풍조에 따라 조선 초기의 조정과 문신 사이에서는 매.죽.란 같은 먹그림으로부터 갖가지 화기가 대성행하였다.  군왕으로는 문종, 성종 같은 분들이 사군자에 화명을 남기고 사대부중에는 강희안, 강희맹 같은 명화가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화명을 떨쳤다.  말하자면 조정의 기호와 더불어 선비계급에 상당한 감식인과 기력이 있는 그룹이 생기고 정치권력의 안정에 따라 선비의 묵희 취미를 수요로 하는 감상화, 특히 선비취미의 수묵화가 발달한 셈이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문인화가 이처럼 문인 사대부 사이에 보편적으로 성행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와 중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예술성 및 개성적인 면에서 큰 성과가 없었다.  역시 직업적인 화가가 아닌 문사 사대부는 정치적인 상황에 민감하여 서화에 매진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에 휩쓸리는 등 사회불안이 이어짐으로써 한가하게 서화를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므로 역시 좋은 문인화를 남길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문인화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문인 사대부와 전문화가인 화원의 숫자가 3 : 1 정도였다고 하니 문인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면 선비 가문에서 재능 있는 화원들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화업을 누습하는 풍조가 나타난다.  화업을 누습하는 풍조는 화풍의 형성으로 이어지고 여기에서 한국적인 문인화의 틀이 형성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김원룡은 ‘한국회화소사’에서 ‘명말 오파와 청초 화단의 영향으로 남종화가 전면으로 진출하는 후기에서는 중국회화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한국적인 회화를 수립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어 한국문인화사의 최전성기를 맞이한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중국문인화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상적인 토대는 다름 아닌 선종이었다.  문인화가 수묵일색의 간결하고 자유로운 기법에 의탁할 수 있었던 것은 형식을 타파한 선종의 사상적인 흐름을 회화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인 데 있다.  ‘산수화와 문인화(사군자 등)가 특히 송대에 와서 절정을 이룬 것은 화가들 십중팔.구가 선리에 정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선가 수양의 묵적은 산수의 계오에 의지하여 명심견성하는데 있을 것이고, 산수화가의 표현의 완성도 역시 명심견성하는데 있을 것이다.  이들 간에 서로 차이점이 있다면 선가는 명심견성으로 그 목적이 끝나는데 반하여 화가의 작업은 명심견성한 연후에 그것을 필묵으로 옮겨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과정까지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허영환, 동양화 1000년)

  문제는 이렇듯 선미를 바탕에 둔 문인화가 배불숭유 정책을 쓴 조선시대에, 더구나 사회지도급의 문인 사대부들 사이에서 성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조선시대에 불교는 배척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전체를 지배했던 사상적인 체계가 하루아침에 몰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불교가 지닌 사상적인 깊이 때문에 내면적으로는 선비들의 정신적인 지주 노릇을 계속한다.  불서는 심학을 속으로 탐구하는 것이라고 하여 세칭 내전이라 하고, 유서는 외전이라 하여 마치 유학이 비록 심성의 공부를 아니하는 것은 아니나 불교에 비하여 피상적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겉으로는 불교를 배척하면서도 은근히 매력을 느꼈음인지 특히 많은 유학자들이 고승과 교유하였음이 사실이다.’ (동서문화연구소 외, 한국학개설) 

  한마디로 문인화는 불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물론 현재에 와서는 종교적인 자유가 주어지고 양반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기에 여전히 불교에 영향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문인화의 성립 및 그 전개 과정에서는 불교의 자유정신이 깊이 개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대가 바뀌고 세태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문인화의 본질을 이루는 자유정신의 근본은 선리, 즉 깨달음에 직도하는 불교의 수행방법과 일치하는 점이 적지 않다.  조형적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조형적인 본질로 직도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는 문인화의 특징은 곧 선의 수행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한국화와 문인화의 위상


  조선시대에서 근대를 거쳐 현대로 오는 과정에서 한국화는 수묵화와 채색화로 나뉘어 저마다 전통에 기반을 둔 고유의 조형세계를 전개해 왔다.  이 과정에서 우위를 차지한 것은 공교롭게도 비전문적인 그림이라고 치부되는 문인화였다.  이러한 결과는 문인 즉, 사대부와 선비들의 사회적인 신분이 화원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림으로서의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향유하며 소유하는 사회적인 기능에서 화원들이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던 데 비해 문인들은 이를 독식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화원의 본격적인 그림을 단순히 목적화로 한정해 창작의 영역을 제한할 수 있었고, 반면에 문인들은 스스로 여묵이라고 말하면서도 순수한 창작의 즐거움을 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인들의 그림을 비전문가의 그림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결과론이지만 문인들의 여묵 중에서 상당수가 순수 회화적인 면에서 높은 예술성을 실현하고 있는 까닭이다.  어느 면에서 문인들은 우위의 신분을 무기로 예술성이 높은 그림과 기능 및 기술에 의탁하는 예술성이 낮은 그림을 명확히 구분하려는 저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스스로의 그림을 여묵이라든가, 묵희라고 하면서 예술적인 가치 면에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잡았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문인을 우위에 두고 화원을 하대하는 조선시대의 회화적인 관습은 근대에 들어오면서 점차 바뀌게 된다.  개화사상의 한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문 미술인의 작업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면서 이들에게도 창작의 자유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  전문 미술인의 신분을 제약하는 귀족주의의 왕조시대가 종지부를 찍으면서 화가들은 보다 자유로운 조건에서 화의를 펼칠 수 있게 되었고, 이들의 그림에 대한 이전의 편견도 불식되었다.  이에 따라 귀족 중심의 화단에서 전문 미술가들 중심으로 전환하게 된다.  여기에서 문인들의 그림은 자연스럽게 화단활동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만다.  역시 본격적인 그림으로서는 기능 또는 기술적인 면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기에 전문가들에게 주도권을 넘기게 된 셈이다.

  이러한 이유 이외에도 진정 모든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타파할 수 있을 만큼 좋은 문인화 작가가 나오지 않게 된 사회적인 환경의 변화도 그 하나의 요인이다.  뿐만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에 강점되고 주권을 상실함으로써 고유의 전통문화 예술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전통의 단절이라는 예술 활동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결과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일제는 전통미술을 단절할 목적의 하나로 조선미술전람회를 만들어 모든 개인적인 창작활동을 일원화하려고 획책하게 된다.  공모전을 통해 입상 및 수상작을 내고 최고작품에 조선총독부상을 수여함으로써 사회적인 권위를 부여, 성공을 꿈꾸는 작가들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는 정책을 편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미술의 존재를 서서히 말살해 가려는 치밀한 식민지 정책의 소산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문인화는 점차 쇠퇴하게 된다.  물론 1922년 창설된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사군자가 동양화부에 속함으로써 서양화, 조각, 서예 등과 함께 독립적인 장르로서 자리했다.  그러나 사군자는 동양화와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서예부로 편입되고 만다.  그러다가 제11회 때에 이르러 서화부문을 축소시키는 대신 공예부를 신설한다는 취지 아래 서예부를 폐지하고 만다.

  이에 앞서 1818년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고희동이 미술의 주체적인 근대화 및 활성화를 위해서는 미술단체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 안중식, 조석진, 오세창, 김규진, 정대유 등과 함께 서화협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6월 창립총회를 갖는다.  이어 1921년 4월에는 서화협회전을 개최, 그림 글씨 고서화 등 100여점을 전시한다.  그러나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로 상대적으로 존재가 약화되면서 36년 제15회 전시회를 끝으로 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결과는 재야 단체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서화협회와 같은 민족적인 성향이 강한 미술단체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조선총독부의 치밀한 계산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는 곧 전통적인 정신 및 색채가 짙은 서예 및 사군자 등의 존재를 서서히 퇴조시키기 위한 미술정책의 일환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실제로 조선미술전람회의 각 부문 입상작 대부분은 일본식 신미술 교육을 받은 작가들이 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순수한 전통적인 양식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조선미술전람회의 보이지 않는 목표는 유미주의적인 화풍 및 표현미에 치중하는 일본적인 미의식을 유도하는 데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군자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미의식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문인화는 자연스럽게 퇴조한다.  이렇듯 제도권에 발을 붙이지 못한 문인화는 화가들의 화실에서는 필력을 다듬는 기초 작업으로 전락하거나 서예가들의 여묵으로 숨어드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일제치하 이후 이러한 문인화의 처지는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있다.

  해방이 되고 이듬해 11월 문교부 고시에 의해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서도 사군자는 독립적인 장르로 복권되지 못한 채 서예부에 속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1982년 국전의 운영방식을 대부분 그대로 흡수한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오늘까지도 문인화가 서예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게 된 원인은 이처럼 전통문화 속에 숨은 민족적인 정신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주도면밀한 음모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민족미술의 근간이자 상징인 문인화가 독립적인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채 서예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에도 문인화는 엄연히 존재하고 또 꾸준히 명맥이 이어져 오면서 그 인구만 하더라도 수천 명에 이르고 있으나 미술계나 일반적인 인식은 여전히 비전문가의 그림이라는 시각에 머물러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행한 일은 일부 의식이 있는 작가들에 의해 문인화의 위상을 높이고 전통성을 회복하려는 일단의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인화와 서예의 관계


  서예는 글씨로써 예술적인 경지를 추구한다.  그림이 예술이듯이 글씨 또한 그림과 마찬가지로 예술이라는 것이 중국 사람들의 시각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글씨가 예술이라는 시각에는 얼른 동조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중국화를 이해하게 되면 글씨도 예술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림과 글씨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화에서는 그림과 글씨가 거의 동일한 가치로 취급된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중국의 문자, 즉 표의문자인 한자의 생성과정에서 그림이 그 근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한자는 상형문자이다.  사물의 형상을 본 떠 만든 글자인 것이다.  그러기에 장언원의 ‘서화동원론’이 아니더라도 처음부터 그림과 글씨는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한자는 완전히 문자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 시점에서도 여전히 그림으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구체적인 형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화 자체에서 글씨를 표현적인 이미지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화는 적어도 당대부터 그림 속에 글씨를 써넣는 일이 유행하였다.  작가의 서명인 낙관이나 화제가 조형적인 요건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당대에 와서 화제와 낙관이 성행하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그림의 문학성이라는 새로운 사조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또한 뛰어난 문인화가들의 등장과도 관련이 있다.  한편 당대에는 사혁의 ‘육법’을 비롯한 여러 가지 화법을 회화적인 가치기준으로 삼는 새로운 풍조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시문을 인용하여 그림을 설명하게 되었다.  이래서 그림의 문학화가 이루어진다.

  그림 속에 들어가는 화제는 자연히 그림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요구와 직면한다.  따라서 서체는 회화적인 측면, 즉 조형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글의 내용도 중요하거니와 글씨 자체에서도 그림의 격과 보조를 맞추어야 된다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당대로부터 서법은 그림의 전체적인 격조를 결정짓는 요인으로까지 작용한다.  특히 문인화에서 화제는 숫제 그림의 이미지를 앞서는 경우마저 생긴다.  작품에 따라서는 서예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글씨가 큰 부분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중국화에서 그림과 글씨는 이처럼 오랜 역사적인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시각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다만 현대회화에서는 글씨 자체의 조형성만을 문제 삼는 서체화, 즉 캘리그라피라는 새로운 표현양식을 등장시킴으로써 오히려 글씨 자체의 조형성을 독립시키고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글씨에서 조형적인 요소를 추출해내는 서체화는 선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형태를 찾아가는 선으로서의 그림이라는 뜻이다.  이를 연역하면 결과적으로 서체화라는 것도 형상에 대한 해석으로 귀결한다.  한자가 물상의 형태를 본뜬 상형문자에 연원하듯이 서체화 역시 형상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서화동원론에서 보면 글씨와 그림이 같은 뿌리라고 했지만 그것은 단지 고향이 같다는 의미일 뿐이다.  고향이 같기에 설혹 형제가 아닐지라도 형제처럼 지낼 수 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글씨와 그림이 한 뿌리라는 의미는 역설적으로 뿌리만 같지 실제로는 다르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시각적으로도 글씨와 그림이 서로 같은 예술 장르라고는 할 수 없다.  글씨는 문자언어이며 그림은 조형언어이다.  이는 서로가 엄연히 다른 개체임을 확증한다.  따라서 한 사람에 의해 글씨와 그림이 동시에 행해진다고 해서 이를 서로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서로 같은 뿌리이니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하고, 또 그림에 앞서 글씨를 먼저 배웠고 글씨 쓰는 사람이 여흥으로 그림을 그리니 글씨와 그림은 한 집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글씨를 쓰면서 여흥으로 사군자를 치는 일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또한 문인화를 전문으로 하면서 글씨를 쓴다고 해서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예와 사군자는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일심동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약이다.  더구나 사군자가 서예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억지일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문인화를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일제치하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전철을 답습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선전을 창설하면서 사군자를 동양화와는 구분해야 한다며 서예부에 편입시킨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사군자는 문인화의 한 장르로서 예로부터 그림에 속했건만 동양화라는 명칭이 만들어지면서 서예로 편입시킨 것은 편의적인 발상이다. 

  사실 동양화라는 명칭도 따지고 보면 일제가 선전을 만들면서 한국적인 그림으로서의 특성을 없애기 위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인 것이다.  일본에는 엄연히 ‘일본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전통적인 그림을 ‘한국화’라고 하지 않고 ‘동양화’라고 한 것은 그 저의를 의심케 하는 일이 분명하다.  광범위한 아시아 지역을 가리키는 지리적인 구분으로 사용되는 동양이라는 말을 한국의 전통 그림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은 한국적인 그림으로서의 특색을 희석시키기 위한 교묘한 술책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사군자를 서예부에 포함시킨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사군자를 서예에 예속시킨 것은 일제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사군자가 문인고사 및 사대부 등 이른바 지식인층이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여 애호한 그림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문화적인 전통성을 단절하려는 일제의 식민정책에는 하나의 눈엣가시일 수 있었던 것이리라.  전통적인 그림으로서의 가치를 무시함으로써 독립적인 회화의 장르가 아닌, 서예에 예속된 단순한 여흥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려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문인화와 線畵(선화) 그리고 禪理(선리)


  문인화의 특징은 그림이 가지고 있는 일정한 양식이나 형식적인 규범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산수화나 화조화 사군자 등 일정한 화목만을 대상으로 하는 장르의 구분이 없을 뿐만 아니라 표현양식 및 형식에서도 약속된 규범이 없다.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표현방법이나 묘사기법에서도 어떠한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데 특징이 있다.  또한 전문적인 화가에서부터 비전문가인 문인고사 사대부들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그림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으로서의 조형적인 가치가 전혀 무시된 채 아무렇게나 그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문인화일수록 내적인 가치로서의 정신성을 중시함으로써 그림이 도달해야 할 이상은 높기만 하다. 

  어쩌면 문인화가 비전문가의 그림일 수 있었던 것은 기교에서 이상적인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는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신적인 가치를 우위에 두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림은 형식과 내용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보면 문인화는 확실히 형식의 엄격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러기에 내용을 더욱 중시하는 경향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은 그 내용이 아무리 고상하고 뛰어난 철학 사상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그림으로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형식은 또한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잘못하면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우니 아무렇게나 그려도 되는 것이 문인화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무법의 법이 요구되는 것이 또한 문인화의 특색이기도 하다.  문인화 역시 전문가의 그림과 다름없이 예술적인 가치 획득을 이상으로 삼는 것이다.  문인화가 전문적인 그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기교적인 미를 지양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림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조형성에 대한 이해를 위한 기초적인 기술을 익히는 일은 필요했고 또 이를 인정했다.

  문인고사 사대부들의 문인화에서 조형적인 기초가 되는 것은 글씨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앞서 기술했듯이 중국의 한자는 상형문자가 그 뿌리라는 사실로써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형상을 압축하여 문자언어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보면 글씨를 연습하는 그 자체가 그림의 연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실제로 사군자의 경우 한자의 서법을 응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필선의 모양을 통해 확인하기 어렵지 않다.  사군자는 서법에 적용할 수는 있으되 어디까지나 글씨와는 엄연히 다른 표현형식을 따른다.  글씨는 약속된, 즉 정해진 형태를 벗어날 수 없다.  그 형태를 다양한 이미지로 재해석할 수는 있으되 본래의 일정한 모양을 무시할 수 없다.  글씨는 처음부터 일정한 형태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이에 비해 사군자는 비록 그 형태미의 상당 부분이 한자의 서법을 응용했다고는 하지만 형태에 관한 구속력을 느끼지 않는다.  사군자는 이미 글씨가 아니라 그림이기에 글씨에 요구되는 일체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다.  정형화된 형태가 없는 까닭이다.  매화, 난초, 국화, 대라는 화목이 가지고 있는 형태 그 자체도 글씨처럼 획수와 모양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모양을 가질 수 있다.  사군자가 글씨를 쓰는 사람들이 즐겨 그리기에 서예의 범주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사군자도 그림이기에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 또한 잘못이다. 

  사군자는 그림의 제재로서 볼 때 그림에 대한 전문적인 기초 소양이 없더라도 어느 정도 노력하면 묘사하기 어렵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다시 말해 서도를 통해서 익힌 필획에 대한 이해 및 감각으로써 문인화가 요구하는 조형적인 요건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문인화가 선의 회화라는 사실은 이와 같은 시각을 더욱 명확히 드러내 준다.  어느 면에서 문인들이 사군자를 여기로 삼은 것도 이처럼 전문적인 기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 형식적인 개방성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와 함께 사군자에서 찾아내고 있는 여러 가지 좋은 의미에서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문인들의 청빈하고 강직한 삶을 반영한다.  ‘사군자를 즐겨 그린 화가들은 매화는 사람으로 하여금 속되지 않게 하고, 난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윽하게 하고, 국화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박하게 하고, 대나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운치 있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허영환, 동양화 1000년)  이렇듯 제재 속의 숨겨진 의미야말로 사군자가 문인화의 화목 중에서도 가장 친근하게, 그리고 널리 애호될 수 있었던 연유이다. 

  문인화는 산수 화조 인물 사군자 등 장르에 상관없이 모두가 수묵을 중심에 두는 선묘화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산수화의 경우 준법과 발묵 파묵 등 선묘로 한정해서 볼 수 없는 표현기법이 별도로 있기는 하되 형상을 만들어내는 그 묘사법 중심에는 선묘가 자리한다.  선으로써 시작하여 선으로 끝난다고 과언이 아니다.  문인화가 직업화가들 뿐만 아니라 비전문가인 문인들이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것도 서법에서 익힌 필획의 운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 있다.  문인화의 선묘는 소재 및 제재의 형태를 구체화하기보다는 그 형태 속에 담아야 할 정신성을 구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전문가적인 묘사력에 대해 구속력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묘사력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은 표현의 자율성을 보장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표현의 자율성이 주어지면 형태를 만들어내는 선묘는 자연히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선묘, 이것이야말로 문인화를 성립케 하는 요인이다.  문인화는 보이는 사실에 근거하되 실제 작업과정에서는 형태의 외형 묘사보다는 작가 자신의 심회의 표출을 중시한다.  형태 묘사가 살이라면 심회의 표출은 뼈를 의미한다.  문인화가 형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형식을 좌우하는 형태에 얽매이지 않음을 뜻한다.  따라서 문인화는 그림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형식을 유지하되 그 나머지는 심상 또는 사의에 맡기는 식이 된다.  문인화가 대체로 간결한 것은 형식에 갇히지 않기 때문이다.  형태에 대한 설명으로써 완성을 지향하는 전문적인 그림의 형식과 달리 정신성을 중시하는 까닭에 가능한 한 간결할수록 이상적이다.  정신성은 간명한 이미지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기 마련인 것이다.

  문인화에서 정신성은 압축된 이미지를 통해 드러난다.  긴장과 절제를 필요로 하는 정신의 영역은 선가에서 말하는 ‘直指人心(직지인심)’의 경계와 다를 바 없다.  중국 유명 문인화가들 중에서 많은 수가 불교 수행자이거나 불교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특히 선가의 구도 이념 및 방식이 문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이미 검증된 일이다.  선가의 수행방식은 불교가 가지고 있는 일체의 교리나 계행과 상관없이 마음의 지도만으로 깨달음의 경계에 직도하는 데 특징이 있다. 

  문인화의 작화 방식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전문적인 그림에서 요구되는 기초적인 기량의 숙달 없이도 화의를 충분히 표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으로서의 조형적인 완성 및 형식보다는 정신적인 가치를 우선하는 데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문인화는 전문가의 직업적인 그림에 견주어 볼 경우에는 기교에서 미숙한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그 미숙함은 그 속에 담긴 정신적인 가치로서 능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 회자되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기교면에서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다.  하지만 치졸한 필선과 단조로운 구성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담긴 선비의 고결한 정신적인 아름다움은 만인의 가슴을 흔들어놓고도 남음이 있다.  문인화의 진면목은 바로 이런데 있는 것이다.


 문인화와 추상회화 그리고 비대상성


  문인화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조형성은 물상의 형태에서 그 이미지를 빌려옴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실제상에서 벗어나는 회화로서의 조형공간을 실현하는 데 있다.  문인화는 수묵산수화나 사군자 화조 인물 등 장르 및 소재에 관계없이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이 강조된다.  주관성이 강하게 개입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이해방식에서 독자적인 비전을 가진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다.  동양의 회화는 형상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및 해석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시 말해 회화적인 공간에 실제의 공간을 그대로 옮겨오는 문제에 집착하지 않았다.  일루전에 의한 시각적인 착각을 유도하는 서구의 재현적인 조형어법과는 달리 문인화는 실제를 빙자함으로써 현실적인 분위기만을 나타낼 뿐이었다.  대신에 개인적인 사상 및 조형성을 중시했다. 

  문인화가 일정한 형식을 배제하는 것도 개인적인 이해 및 해석이 자유롭다는 점에 있다.  중국 문인화는 실제의 형태를 빌려오되 단순화하는 것을 조형의 원리로 삼았다.  형태 묘사는 오직 그 본질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었다.  반면에 서양의 회화에서 명암이나 원근법은 실제에 근사한 즉, 보다 실제적인 형태에 접근하기 위한 조형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동양의 수묵화, 특히 문인화가 형태의 본질만을 추구하는 것은 상형문자를 기초로 하는 한자의 특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자를 생활화함으로써 사실적인 형태를 단순화하거나 최소화하고, 또 상징적인 이미지만을 남기는 조형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는 것이리라.  이와 함께 한자의 구조적인 특징에 따른, 실제의 형태를 압축하고 함축하며 요약하는 선의 요결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는 것이리라.  사군자의 선묘적인 조형기법이 서체의 원용임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다.  따라서 문인화의 선묘는 잠재적으로 형태를 간략히 처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문인화는 조형적인 법칙이나 형식이 없는데도 누구든지 간명한 선을 추구한다.  형태의 구체적인 묘사가 가능한 경우에도 세부적인 묘사는 회피한다.  본질을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이미지만으로 회화적인 사상을 나타내려 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문인화의 조형적인 기본원리는 기법에서도 선묘에 그치지 않고, 발묵법과 파묵법을 유도해 냈다.  발묵이나 파묵은 형태 묘사에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발묵은 먹의 뿌림 번짐 흩어짐 따위의 이미지를 통해 현묘한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내는데 주로 쓰인다.  파묵은 농묵에 담묵을 가한다거나, 담묵에 농묵을 더하는 형식의 표현을 의미한다.  파묵은 한자의 뜻이 지시하는 것처럼 이미 존재하는 먹의 표현을 덧붙여 깨뜨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발묵 파묵은 형태 묘사를 방해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형태에 반하는 태도는 구체성의 파기 또는 사실성의 약화를 의미한다.  이는 곧 추상성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형태를 단순화하거나 생략하는 태도 또한 추상에 대한 경향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  문인화가 실재하는 물상을 소재로 하되 궁극적인 지향점은 다른 데 있음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 추상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문인화의 이상인 고결한 정신적인 세계는 우리의 감각으로 알 수 없는 추상세계이다.  다시 말해 비록 형태를 빌어다 쓰고 있을망정 문인화가 추구하는 바는 정신적인 가치이다.  정신적인 가치는 형이상학적인 세계인 동시에 추상 세계인 것이다.  그러기에 문인화가 실제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기에 파묵이나 발묵의 필연성이 있다.  파묵과 발묵은 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현대회화에서 추구하는 추상적인 이미지이다.  그렇다.  파묵 발묵은 서구미학에서 말하는 뜨거운 추상인 셈이다.  내적인 감정 또는 정신세계를 표현하는데 실재하는 형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는 어느 면에서는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감정 및 정신세계는 형태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파묵 및 발묵은 그 자체가 추상 언어이므로 감정 및 정신세계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다.

  문인화는 관념적인 그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그림이면서 작업하는 과정에서는 대상을 두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난초를 칠 경우 실제의 난초를 직접 보고 그리지 않는다.  소재를 보고 그리는 형태를 실사라고 한다면 문인화는 대부분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사군자에 익숙한 작가는 직접 보고 익히든 화첩을 보고 익히든 이미 마음속에 그 상이 충만해 있다.  그러기에 소재를 눈앞에 두지 않더라도 흉중의 상만으로 능히 원하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소재를 직접 보고 그리는 단계를 지나면 작가는 문인화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그 자신의 내부에서 싹트는, 자유정신이 지시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창작성에 대한 이해의 눈이 열리게 됨을 뜻한다.  여기에 이르면 소재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흉중에 들어와 있는 상은 그 내부에서 분열과 해체 재구성을 거듭하면서 작가 자신의 미적 감각 및 사상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 단계가 다름 아닌 관념의 세계이다.  실제를 떠나, 생각 속에서 피어나는 형상이야말로 관념의 증표이다. 

  이렇듯 문인화는 실제상이든 화첩을 통해서든 눈으로 익히고 손으로 익힌 형상에 대한 사실적인 이해를 뛰어넘는 곳에 존재한다.  이는 작가의 예술적인 상상력 및 그 자유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문인화의 자유정신이야말로 현대회화의 조형논리와 일치한다.  실제의 형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생략, 단순화, 변형, 왜곡하는데 그치지 않고 급기야는 일체의 형상 자체를 떠나는 추상으로 가는 현대회화의 조형적인 변주를 문인화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문인화의 파격적인 공간미는 일체의 사상을 소거한 순수 추상의 세계나 다름없다.  이 세상에 완전히 비어있는 공간은 없다.  그러나 문인화의 비표현적인 의미에서의 여백은 완전히 비어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표현하고자 하는 소재 및 대상을 제외한 여백은 현실의 공간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오직 회화적인 이상에 의한 순수한 형태의 비어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현대회화는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 자체를 전시장에 놓았을 경우에도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한다.  문인화는 이러한 생각을 이미 일천년 전에 실현한 셈이다.  비어 있다는 공간의 개념을 표현되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여백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그 비어 있는 공간은 무의미한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주로 연결되는 무한공간일 수 도 있다.  작가의 의식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인 것이다.

  문인화는 이처럼 회화적인 공간이라는 문제에서 현대회화의 추상적인 공간개념과 상통한다.  그러므로 표현 언어 및 어법에 제한이 없다.  다시 말해 표현형식이나 표현양식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조형 공간을 향유할 수 있다.  이러한 문인화의 폭넓은 조형성은 현대회화로서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문인화는 발생 초기부터 이미 조형의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면에서 문인화는 현대회화가 직면하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지 모른다.  특히 추상회화의 지속적인 생명력을 위해서는 문인화의 자유분방한 조형개념의 수혈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인화의 비전을 위한 몇 가지

 

  이제까지 문인화의 역사로부터 한국 현대회화로서의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문인화가 독자적인 장르로서 한국화의 한 축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하는지를 생각해 본다.  사실 오늘 한국미술에는 수묵산수화 채색화 민화 사군자 등 전통적인 양식이 존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일별하여 ‘한국화’라고 부르는 데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회화양식을 ‘국화’라고 부르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중국이나 한국의 전통적인 채색화를 일본적인 독특한 정서가 가미된 새로운 양식으로 변화시켜 ‘일본화’라고 부르는데 비해 한국의 전통회화는 한국적인 정서가 담긴 독자적인 양식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오늘 한국 화단에서 별다른 저항 없이 통용되고 있는 ‘한국화’라는 용어 또한 한국 사람이 그리는 전통 회화양식이라는 정도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한다.

  다시 말해 중국의 ‘국화’나 일본의 ‘일본화’에 비견될 수 있는 한국적인 표현양식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편의적으로 ‘한국화’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회화의 독립성 이전에 민족의 주체성과 관련된 문제일 수도 있다.  아무리 문화가 현대화하고 있을지라도 민족적인 고유의 정서를 반영하지 못한다면 문화의 독립은 백년하청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화 국민임을 자랑한다.  그러나 문화 예술이 점차 중요시되고 있는 세계적인 현실에서 볼 때 과연 한국을 내세울만한 것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물음 앞에 정말 내놓을만한 것이 변변치 못함을 깨닫게 된다.  미술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5천년 문화민족으로서의 고유성을 내세울만한 독자적인 미술양식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문화에는 독자성이 없는 것일까.  이 물음에 앞서 한국국민에게는 고유의 민족적인 정서가 없다는 것일까.  단언하건대 그렇지 않다.  한 민족이 단일민족으로서 5천년의 역사를 쌓아왔다면 그에 상응하는 독특한 민족적인 정서가 형성되어 있기 마련이다.  어느 민족이건 간에 수천 년 아니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그 민족의 문화나 예술은 고유의 민족적인 정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도 한국에는 이웃의 중국이나 일본에서와 같은 독자적인 미술양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미술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는 점이 아닐까.  조선시대, 아니 근대로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중국의 ‘국화’나 일본의 ‘일본화’와 뚜렷이 구별되는 미술양식을 합의 도출해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진정한 한국미술로서의 표현양식의 독립성을 위한 어떠한 운동이나 논쟁도 없었다는 말이다. 

  일제치하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동양화’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60년대 초반에 잠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다는 정도의 논의만 있었을 따름이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한국화’라는 용어도 ‘국화’나 ‘일본화’를 의식한 나머지 내용이야 어찌됐든지 그냥 쓰고 보자는 식으로 해서 가까스로 정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기에 ‘한국화’의 진정한 독립과는 상관없이 편의적으로 부르고 있는 상태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80년대 중반 이후 일부 미술잡지를 중심으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한편, 전시회를 통해 한국인의 기질적인 특성이 반영된 ‘한국화’의 성립을 전제로 하는 일단의 미술운동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그마저도 중단되고 있다.  이처럼 ‘한국화’의 표현양식에 대한 문제는 전통회화 작가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짐이 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문제야말로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화가들 그리고 미술계 모두가 떠안아야 될 공통의 짐이라는 점이다.

  물론 진정한 ‘한국화’의 표현양식의 독립은 하루아침에, 그리고 어느 개개인이나  몇몇 사람들만의 외침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거기에 동조하며, 한국미술의 전체적인 운동으로 확산시켜 마침내 그 결실에 대해 사회적인 공인을 받을 수 있을 때만이 ‘한국화’라는 명칭에 부합하는 독자적인 회화양식의 성립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회화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민족적인 정서에 대한 우리 자체의 내부적인 검증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한국인의 의식과 감정 속에 녹아 흐르는 공통의 정서를 찾아내어 거기에 응답하는 형태의 조형적인 특징을 산출해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일본화가 섬세한 선과 중간색, 기교적인 완성도 그리고 장식성을 특징으로 내세움으로써 중국이나 한국 그림과 다른 독자성을 실현할 수 있었듯이 한국화도 우리 민족의 정서적인 특성과 결부된 조형적인 특징을 함축 요약해냄으로써 중국의 국화나 일본의 일본화와 엄연히 구별되는 표현양식의 독자성을 확립해야 한다.

  한국화의 독자적인 양식의 확립의 가능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문인화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문인화 역시 중국에서 시작된 양식임에 틀림없으되 우리만의 정서를 매개로 하여 현대화 작업을 병행한다면 21세기를 기점으로 하는 한국적인 조형성, 즉 표현양식의 독립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인화에 대한 기존의 개념에서 탈피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물론 문인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장점, 즉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태도라든가, 자유분방함, 간결한 이미지, 표현적인 힘 등을 조형적으로 변환하여 재해석하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문인화가 전통회화의 한 양식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새로운 개념의 ‘한국화’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과거의 습속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시대감각이 반영된 표현양식을 통해 ‘한국화’의 성립이 가능하다고 보는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지향적인 문인화는 문인 사대부 고사들이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온 정신성에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미 과거와는 판이한 시대에 살고 있는 상황에서 정신적인 가치만을 중시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는 일이다.  현실과 유리된 예술은 그것이 아무리 고상할지라도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굳이 문인화가 아니더라도 예술은 시대감각을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현실에 대한 관심은 여러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겠으나 현실 참여만이 시대정신이고 시대감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다.  그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 사람들의 공통적인 정서를 파악하여 그를 작업에 반영하는 것도 시대정신이자, 시대감각의 하나일 수 있는 것이다.

  문인화의 전통성 또는 정통성에만 집착한 나머지 사군자에만 매달려 고법이나 답습하는 것도 시대감각과 어긋나는 일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성 및 정통성을 버리는 곳에서 현대적인 감각이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비약이다.  사군자의 경우 전통적인 화법을 익히는 데는 아주 좋은 화목이다.  물론 초기 교육과정에서는 전통적인 화법을 좇는 일 자체를 나무랄 수 없는 일이나 거기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창작의 세계를 경영해야 하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이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다각적인 시각 및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즉 전통적인 가치를 부단히 의식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자연스럽게 현실감각을 익히는 방법이 좋다.  그렇게 하다보면 소재는 물론이요 제재에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전통성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과의 연관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전통성은 재료와 결부된 문제이기도 하다.  수묵과 종이, 그리고 모필이라는 재료에다가 채색을 보태는 것만으로도 전통성의 문제와 관련해 그 절반은 해결하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재료는 조형적인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수묵과 종이로는 필경 전통적인 문인화에서 요구하는 조형적인 특징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와 함께 조형적인 문제에서도 현실적인 삶, 즉 시대감각을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통성만을 의식한 나머지 고법의 산수 및 사군자에 얽매어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참다운 예술적인 가치, 또는 미적인 가치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고 하지만 이미 전시대의 양식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존재했던 표현양식과 관련해 그 시대의 작품을 능가하거나 극복하는 일은 더욱 힘든 것이다.

  ‘한국화’라는 명칭에 부합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적인 회화는 무엇인가.  이와 같은 시각에서 보면 문인화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땅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문인화만이 ‘한국화’의 성립에 필요한 유일한 선택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한국국민의 정서가 유독 문인화에만 집중되고 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채색화는 물론이려니와 민화 또는 산수화에서도 얼마든지 한국적인 정서를 매개로 하는 독특한 표현양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문인화의 그 자유분방한 조형적인 변주는 현대라는 시제와 시대감각 등을 고려할 때 ‘한국화’적인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  해석의 방법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겠으나, 자유로운 선을 중심으로 하는 문인화는 확실히 구체적인 것보다는 생략적이고 함축적이며 간결한 이미지를 선호하는 현대인의 미적 감수성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표현양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어디까지나 문인화가 전통적인 가치를 중심에 두면서 새롭고 현대적이며 한국적인 표현양식을 확립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1999년 월간 '미술세계'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