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작
김혜진의 ‘박꽃’
사유의 창에 비친 의식의 빛, 박꽃
신항섭(미술평론가)
회화에서 하나의 소재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경우를 ‘소재주의’라고 한다. 따라서 소재주의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도 될 수 있고 긍정적인 의미도 될 수 있다. 부정적인 의미는 하고 많은 소재 중에서 특정 소재만을 반복적으로 다룰 경우 자칫 매너리즘에 빠지기 십상인데다, 창의성의 결여라는 문제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시각을 담고 있다. 반면에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동일한 소재에 집중함으로써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임과 동시에 세련미와 깊이를 실현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이처럼 ‘소재주의’는 양면성이 있다.
김혜진은 ‘박꽃’이라는 소재만으로 10여년을 훌쩍 넘겼다. 그래서 ‘박꽃작가’라는 별호가 자연스럽게 들릴 정도가 됐다. 이 정도면 그도 ‘소재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그의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그에게 ‘소재주의’는 보다 더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그의 경우 ‘박꽃’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방법, 즉 조형적인 어법 자체가 부단히 진화를 거듭함으로써 ‘소재주의’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조차 간단히 물리친다. 다시 말해 그의 작업은 ‘소재주의’와 연결시킬 수 있는 근거를 차단하고 있다. ‘박꽃’은 최초의 현실적인 이미지를 시작으로 하여 어느새 시각적인 이미지보다는 의식세계를 드러내는 觸媒촉매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기에 그렇다.
그의 그림에서 ‘박꽃’은 상징적인 사유체계로 진입하는 문고리이자, 조형적인 골격일 수도 있다. 초기에는 잠시 박꽃의 형태가 구체적이었다가 점차 생략 및 단순화, 그리고 변형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적인 형태미는 대부분 소거된다. 조형적인 모색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박꽃’의 이미지는 해체 및 재구성이라는 현대미학의 방법론과의 제휴를 통해 변주를 거듭하게 된다. 단순한 조형적인 변주만이 아니라, 의식의 활동영역을 넓혀가는 방식으로 사유의 미를 양육하는 것이다. 섬세하면서도 사려 깊은 미적 감각을 통해 발아된 사유의 미는 ‘박꽃’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을 통해 顯現현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여러 형태로 제시되는 ‘박꽃’의 이미지는 이미 현실공간을 떠나 그의 의식세계로 안내하는 ‘창’이자 ‘길’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꽃’의 이미지는 때로는 지극히 서정적인 모습으로 현실세계를 비추는 등불이 되기도 한다. 현실과 의식세계를 관통하면서 조형적인 사고가 만들어내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되새기도록 하는 것이다. ‘박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아름다움과는 차별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이다. 어쩌면 ‘박꽃’을 소재로 채택하게 된 것도 이와 연관성이 있는지 모른다.
밤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는 박꽃의 생리적인 특성은 사유의 대상으로서는 최적이다.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키기에 아주 적절한 소재인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업에서 볼 수 있듯이 박꽃은 문학적인 서술을 가능케 한다. 단순히 시각적인 이미지를 넘어서는 의미를 함축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달과 박꽃의 관계 설정만으로도 우화적인 또는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서정적인 분위기 그리고 운문체적인 내용을 담기에 적합하다. 그의 그림에서는 시적인 정서가 검출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부분적으로 불명확한 이미지 뒷켠으로 은폐되는 형태미와 간명하게 처리되는 구성은 시적인 함축미와 긴장감을 불러들인다. 그러기에 그림 하나하나가 그대로 서정시의 맛을 농후하게 발설한다. 그렇다고 마냥 나약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추상적인 이미지와의 조합을 통해 현실적인 박꽃의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여린 분위기를 간단히 제압하고 있다. 다만 사유의 깊이로 침잠케 하는, 부드럽고 온화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피워낸다는 점에서는 여린 분위기라는 인상도 틀리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박꽃’은 밤에 피는 꽃이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달이 뜨는 시각에 맞추어 수줍게 얼굴을 드러내는 꽃이다. 그러기에 달빛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 꽃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를 달리 말하면 달빛을 먹고 피어나는 꽃이라는 표현이 타당하다. 그러기에 그 이미지는 각별하기 마련이다. 태양광선을 피해 피는 박꽃은 태생적으로 연약하고 여리다. 이런 박꽃의 모양은 시심을 자극하기 십상이다. 밤에 피는 꽃이어선지 파리한 이미지의 달빛과 동행하는 박꽃의 이미지가 서정적인 세계에서 합치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에서 빛과 어둠은 조형적인 가치를 관여하는 중요한 이미지로 떠오른다. 특히 수묵작업에서 수묵은 어둠을, 그리고 素地소지로서의 한지는 빛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수묵은 형상을 결정하면서도 빛에 대응하는 상대적인 이미지로서의 어둠으로 부각된다. 그러고 보니 박꽃과 수묵은 빛과 어둠의 상징적인 언어가 된다. 수묵담채에서도 이와 같은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박꽃의 이미지는 달빛과 마찬가지로 빛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수묵의 심연에서 비어져 나오는 빛, 즉 박꽃은 더욱 예사롭지 않은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박꽃은 그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창이자 세상과 연결하는 소통의 터널로 상정하는 것은 아닐까.
그는 오랫동안 박꽃을 가꾸어왔다. 그것도 시골이 아닌 서울에서 박씨를 심고 넝쿨을 만들어 박꽃과 조롱박의 생장과정을 관찰하고 그 이미지를 탐닉했다. 그리하여 박꽃을 소재로 하는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수묵이라는 재료만으로 박꽃을 형상화했다. 어쩌면 수묵화라는 재료의 특성상 청초한 박꽃을 가장 순수한 이미지로 그려낸 시기였는지 모른다. 먹 색깔과 한지의 흰 색깔만으로 형용되는 박꽃의 이미지란 순수 순결의 상징일 수 있었다. 거기에서는 절제된 미의식과 금욕적인 감정만이 요구되는 지순한 미의 세계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러나 박꽃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그 정서를 드러내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선염기법으로 배경을 처리하고 박꽃의 형태는 음화의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이는 선묘중심의 묘사방식과는 상반되는 조형어법이자 현대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에서 음화를 연상케 되는 이런 표현기법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박꽃에 대한 인상 및 상념의 시각화인 것이다. 밤에 피는 흰 꽃의 이미지를 표현하는데 아주 적절한 방식이다.
그러다가 차츰 담채를 도입함으로써 박꽃의 이미지에 실제적으로 접근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형태묘사에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구체적인 형태묘사를 지양하여 심상에 남아 있는 이미지를 되살린다는 입장이었다. 그러기에 박꽃의 이미지는 단편적으로 또는 실루엣 형식으로 처리되기 일쑤이다. 박꽃의 형태를 본다는 것이 아니라, 그 느낌을 표현한다는 시각에서 출발함으로써 구체적인 형태는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는 현대적인 조형어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인데, 그 조형적인 성과는 결코 가볍지 않다.
담채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더욱 적극적이 되어 수묵은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된다. 그래도 수묵은 형태의 골격을 결정하는데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작품에서나 수묵이 근간을 이루고 채색물감은 시각적이고 정서적인 부분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수묵이 중심적인 이미지가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채색이 전체적인 이미지를 지배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수묵과 채색의 교묘한 결합을 통해 다채로운 조형의 변주를 모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박꽃의 형태미는 어느새 부차적인 위치로 물러나는 경우도 생긴다. 박꽃이 전체적인 인상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수묵 또는 채색이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형세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화면은 박꽃의 이미지 이외에 사각형과 같은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기하학적인 이미지는 창을 연상시키는 데 실제로 그렇다. 창을 통해 내다보는 박꽃의 이미지가 창을 상징하는 사각형의 이미지로 변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창이라는 직접적인 서술은 존재하지 않고 사각형의 이미지로만 암시되고 은유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선묘방식으로 형용되는 박꽃의 형태에 대응하는 조형언어로서 시각적인 긴장을 높이는 요인이다. 자칫 나약하기 쉬운 박꽃의 이미지에 대응하는 강건한 이미지로서 화면의 균형과 조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각형의 이미지는 자의식의 발현으로서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즉, 지적조작의 흔적을 나타내는 이미지인 것이다.
자연적인 이미지로서의 박꽃과 인위적인 이미지로서의 창을 오버랩시킴으로써 현실적인 감각을 벗어나 자유로운 의식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이는 그의 그림이 현실의 재현도, 지적조작만도 아님을 상기시키려는 것인지 모른다. 이처럼 서로 다른 이미지를 적절히 조화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서정적이면서도 이지적인 성향의 그림으로서의 가치를 선도하는 것이다.
최근 작업은 채색의 농도가 점차 짙어진다. 어느 사이엔가 채색화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수묵의 존재감이 현저히 약화되는, 일련의 채색화는 수묵담채와는 또 다른 조형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따라서 작업과정도 이전보다 한층 오랜 시간이 요구된다. 물감의 덧쌓기가 가능해짐으로써 물감의 층은 두터워지고 그에 따라 시각적인 이미지도 농밀해진다. 안으로부터 쌓아올려지는 물감은 부분적으로 안팎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미묘한 중간색층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로써 그림의 심도가 깊어질 뿐더러 무게감과 더불어 두터움이 형성된다. 더구나 채색의 과정에서 그대로 남겨지는 붓 자국은 표현적인 이미지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 표정이 풍부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그러나 박꽃의 이미지, 즉 꽃과 줄기 그리고 잎의 이미지가 단편적으로 등장하면서 사각형의 이미지와의 조화를 모색하는 가운데 구성적인 아름다움으로 귀결하는 조형적인 패턴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색재료는 엷게나마 질감까지도 드러낸다. 질감에서 느끼는 섬세한 붓의 표정은 이전의 작업과는 사뭇 다른 물감의 존재감을 강조한다. 이처럼 농후한 채색물감의 맛과 멋은 역시 수묵이나 담채와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도 수묵의 역할은 채색작업에서도 여전히 그 존재가치를 잃지 않는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수묵을 제외하는 작업이란 그에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박꽃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조형언어의 근간은 언제나 수묵의 몫인 까닭이다.
완연한 채색작업으로 진입한 그의 최근 작품은 그 자신의 자연연령을 의식케 하는 삶에의 체험에서 비롯된 깊이와 두터움이 자리한다. 이로써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작품은 체험과 사색 그리고 문학적인 감수성을 매개로 하여 부단히 진화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재료가 달라지는데 따른 변화가 아니요, 조형언어 및 어법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관조하고 삶에 대한 체험의 폭을 넓히며 사유의 심도가 깊어짐으로써 성립되는 진정한 미적인 가치의 진화인 것이다.
<김혜진씨의 작품은 10월19일부터 11월1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제13회 "마니프"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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