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작가와 작품 - 전봉열

펜보이 2007. 7. 11. 21:27

      

                                                                                                                    월식

                                                                                                                               

  전봉열 전


  “그의 바다에서 시를 보았다”


  신항섭(미술평론가)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시인이 되어야 한다. 특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화가라면 시적 감수성은 거의 필수적이어야 한다. 시적인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는 풍경화는 단순한 자연의 복사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다. 풍경화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승화여야 하고 거기에는 시적인 정서가 포진하고 있어야 한다. 시적인 정서가 존재하지 않는 풍경화는 허황하기 짝이 없다. 설령 자연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는 경우일지라도 어느 구석엔가는 서정성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시적인 정서야말로 풍경화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인 것이다.

전봉열의 그림과 마주하는 순간, 시를 보았다. 바다라는 일관된 제재를 중심에 두는 그의 그림은 한마디로 ‘바다의 교향시’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경우에나 극단적으로 간결하고 간소하게 압축된 이미지를 추구하지만 거기에는 능히 세상을 울릴만한 시적인 감수성이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바다 자체가 드넓은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기에 물과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만이 존재하는 단출한 구성일지라도 광활한 대지와 마주하고 있는 듯싶은 장엄한 교향악을 연상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다를 이루는 것이 어찌 물뿐이랴. 비록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지언정 바다는 숱한 생명체들을 포괄한다. 그렇다. 시적인 감수성의 소유자라면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 어찌 무심할 수 있으랴. 거친 파도야 바람의 몫이라지만 잔물결은 바람의 형용이 아니다. 바다의 영혼으로 반짝이는 물비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수런거림, 즉 깊은 심연의 바다 그 무거운 침묵을 헤살 짓는 뭇 생명체들의 자기발현인 것이다. 그 생명체들의 총합이 다름 아닌 바다의 잔물결인 셈이다.

  

 낮달 2 

 

그는 그와 같은 잔물결의 의미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이해하는 듯싶다. 그리하여 시적인 감수성으로 그 잔물결의 속내까지를 번안한다. 그러기에 단지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고작인 바다풍경인데도 결코 허황하지 않다. 기껏해야 갈매기 한두 마리, 아니면 달빛 한줌 또는 꽃잎이나 새 깃털 따위를 보태는 정도이다. 그러나 그처럼 간소한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시각적인 이미지에서는 대자연을 향한 장엄한 서사시가 연상된다.

그에게 바다는 물만의 세상은 아니다. 해와 달이 가뿐히 내려앉았다 가는 쉼터인가 하면, 바람과 바닷새들은 물론이려니와 해무가 참견하는 너그러운 가슴이다. 어디 그뿐이랴. 부력으로 우주를 떠받드는 수면 아래는 뭇 생명체들이 수족관 같은 황홀경을 연출하고 있음을 어찌 간과할 수 있으랴. 그는 눈에 보이는 바다를 그릴지언정 그 수면 아래의 정경까지 내포한다. 그런 세계를 투시하는 깊은 사유를 통해 이루어지는 바다그림이기에 일상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실의 바다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는 정경이 펼쳐진다.

 

                                     만월

 

캔버스에 그려지는 바다 정경은 이미 그 자신의 눈과 마음의 프리즘이 만들어낸 조형의 바다일 따름이다. 눈에 비치는 그런 사실적인 바다는 잠시 마주하는 그 순간에 망막에나 존재할 뿐이다. 일단 캔버스와 마주하는 화실에서는, 사실의 바다가 서술하는 그 구체적인 인상은 말끔히 비워낸다. 그러고 나서 마음이 떠올리는 바다의 이미지를 빠뜨리지 않고 찬찬히 받아쓴다. 바다는 바다인데 사실의 바다와는 다른 이미지가 전개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사실의 바다를 빙자하면서도 실상에 겹쳐지지 않는 환영의 세계를 꿈꾸는 까닭이다. 사실의 바다와 환영이 개재되는 바다 사이에는 간단없이 시적인 정서가 끼어든다. 시적인 정서가 장악하는 바다는 눈물에 흐려지는 풍경처럼 초점이 정확하지 않다. 초점을 잃은 바다라는 것은 현실을 떠난 명백한 조형의 세계임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는 자신만의 바다, 그 영원한 조형의 바다를 꿈꾸는 것이다.

햇살 혹은 달빛 또는 별빛에 의탁하여 존재를 드러내는 그의 바다는 언제나 수줍고 외로워 보인다. 마치 등 돌리고 앉은 이의 뒷모습 같은 외로움이 깃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디선가 날아든 갈매기 한 마리 또는 꽃잎이나 달빛은 외로워 보이는 정경을 더욱 부추길 따름이다. 바다의 세계 외연에서 끼어드는 존재물로 인해 외로움은 더욱 구체적이 되는 셈이다. 그러면서 그 존재물은 흡사 홀연한 부표처럼 바다를 간섭한다. 그럼에도 바다는 그저 포용할 뿐이다. 그 존재물로 인해 바다는 확장되기도 축소되기도 한다. 바다의 크기를 나타내는 현실적인 지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지표를 통해 우리는 그가 보고 있는 바다의 크기를 비로소 가늠할 수 있다. 

 

달 4

 

외로운 바다라는 이미지는 그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의 일상적인 표정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자연에 대한 진정한 이해 및 밀착에서 비롯된다. 그는 자연의 피부 밑까지 감지하는 섬세한 감성의 촉수를 가지고 있다. 그런 예민한 감수성을 통해 응시하는 바다는 시지각을 건너뛰는 세상을 보여준다. 실제의 바다와 사유의 바다, 즉 실제와 환영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들며 그 자신의 의식 속에 투영되는 바다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외로움이라는 것은 실존에 대한 성찰일 수 있다. 어차피 삶이란 세상과 그 자신의 독대의 결과일 뿐이라는 성숙한 자각이야말로 외로움의 정체일 수 있다.

그는 바다의 영혼과 존재의 외로움이 等價등가를 이루는 지점에 그 자신의 그림을 놓는다. 바다가 크고 넓다면 영혼의 체적도 그에 비례할 것이다. 바다의 속내를 주시하는 그로서는 바다의 영혼 그 체적만한 외로움을 키우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 외로움을 우리가 공유할 수 있을까. 만일 그의 그림에서 시를 보았다면 이미 절반쯤은 그의 외로움을 공유한 것이나 다름없다. 바다를 보며 키워온 외로움이란 고독과는 다른 것이다. 어쩌면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번개 같은 깨달음 이후에 오는 고적감이야말로 외로움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의 바다는 언제나 드넓고 깊은 공간감을 소유한다. 아주 작은 그림에서도 그 공간은 달 하나를 너끈히 안을 수 있는 크기로 확장한다. 단순히 원경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음의 눈이 시지각의 세계 그 너머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검푸른, 때로는 녹청의 유채로 해석되는 짙은 바다빛깔을 보면서 거기에 속절없이 빠져들지 않는 이가 어디 있으랴. 그는 푸른 색깔에 마술을 걸어 우리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시선을 한없이 끌어당기는 깊고 너른 바다는 확실히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조형의 신비이다.

그가 바라보는 바다는 그 자신의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바다풍경 속에 흥건한 외로움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가 응시하고 사색하며 직관적으로 풀어내는 바다의 이미지란 스스로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공간이다.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는 무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그 넉넉한 바다를 통해 승화된 현실을 꿈꾸는 것이다. 그는 바다를 자유롭게 선회하는 갈매기의 자유를 자신의 것으로 치환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 모의를 획책하면서 심신을 정화하려는 것은 아닐까.

 

                                                                                                                              봄밤의 끝

 

그는 현실과 환영의 세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일체의 분별심이 작용하지 않는 해맑은 정신세계를 구현하려는 욕망이 있을 따름이다. 이제 그는 바다에다 환영 또는 환상의 공간을 구축하고자 한다. 초현실적인 세계가 거느리는 허황된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심신은 좀 더 가벼워질 수 있다. 상상의 자유가 가져오는 즐거움이란 심신의 정화에 특효인 것이다. 정신 또는 영혼의 해방을 보장하는 그의 상상력이 설령 가벼운 사유를 유인할지라도 때로는 거기에 흔쾌히 빠져드는 일도 필요하다. 그는 그런 초현실세계가 우리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 즉 치유의 효용성을 의심치 않는다.

실제로 바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의 상상이란 아주 경쾌하다. 감정의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 신선함이 있다. 우리의 의표를 찌르는 그의 조형적인 상상은 오직 즐겁다. 허황하다고 해서 막연한 두려움이나 공포 따위와 결탁하는 일은 없다. 어떤 상상의 소산이든지 시적인 이미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 충만한 어둠을 배경으로 얼음 위에 복숭아나무라는 기발한 상상이 지어내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은 우리의 감정을 흔들며 진실로 마음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처럼 아름답고 추운 꽃의 시간에 홀로 초대받는 이는 정녕 누구일까. 


<이 작가의 전시회는 2007년 9월5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인사동 '토포하우스'(전화:02-734-7555)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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