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44) - 강 운

펜보이 2010. 5. 17. 23:03

 

 

 

강 운 작품전

 

바람을 흉내는 표현의 순수성

 

신항섭(미술평론가)

 

구름은 하늘에 펼쳐지는 자연현상의 하나이지만, 화가에게는 조형적인 충동을 일으키는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하늘이라는 캔버스 위에 전개되는 다양한 형상의 구름은 인위적인 조형의 세계를 연상시키기에 그렇다. 그래서일까. 자연주의 화가들은 구름의 형상에 매료돼 캔버스에 옮기려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한다. 구름이야말로 조형의 변주, 그 원형상임과 동시에 조형의 길잡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강 운은 오랜 동안 구름을 제재로 작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구름 작가’라는 별호가 자연스럽게 들릴 정도가 됐다. 하고 많은 자연 속의 소재 및 제재를 두고 왜 ‘구름’일까. 운명적이라는 표현이 이런 데 적합할 듯싶을 만큼 공교롭게도 그의 이름은 ‘구름 운(雲)’자이다. 구름은 그에게 운명적이면서 필연적인 소재인지 모른다. 하지만 화가에게 그림의 소재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선택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특정의 소재만을 탐닉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구름에만 시선을 고정시키는 이유가 뭘까. 자칫 구름이라는 단일소재만을 반복해서 그리다보면 소재주의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소재주의에 빠진다는 것은 곧 매너리즘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 앞서 구름을 자세히 관찰하면 거기에 온갖 형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어렵지 않다. 한마디로 천변만화경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이렇듯이 구름에는 자연의 온갖 형상이 존재하기에 소재주의에 빠질 위험은 애초에 염려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보면 구름의 모양이 상상 이상으로 다양해 그가 오래도록 구름에 매료되고 있는 이유를 알 듯싶다. 그야말로 세상의 온갖 물형이 거기에 담겨 있는 까닭이다. 자연현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묘하고 다채롭게 전개되는 구름의 형용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따라서 그가 형용하는 구름의 형상을 보면서 구름 그 자체에 얽매이지 않는 무한한 자유를 향한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된다. 자연현상으로서의 구름이 조형적인 상상을 매개하는 존재가 되는 까닭이다.

어쩌면 그의 작품에서 적지 않은 부분은 자의적인 해석이 곁들여지고 있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오랜 동안 구름을 관찰하고 또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구름의 형용에 관해 물리를 터득함으로써 실제의 구름으로부터 자유로워졌지 않나싶다. 그의 구름풍경은 이미 실제를 초월한, 자의적인 해석에 따른 자유로운 구성의 영역에 들어가 있기에 그렇다. 구름을 직접 보지 않더라도 상상력을 동원해 그 어떤 형상의 구름일지라도 자유롭게 묘사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음직하다. 다시 말해 구름이라는 소재에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조형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최근 수년 동안 그는 구름을 소재로 하는 가운데 전혀 예상치 못한 작업과 만나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유채를 이용해 실제의 구름을 재현한다는 전통적인 묘사방식을 따랐다. 그런데 돌연 화선지라는 새로운 재료를 통해 순수조형에 대한 의지를 관철하는데 전념하고 있는 것이다. 물감 대신 화선지를 이용하고, 붓 대신에 가위와 칼을 사용해 구름을 형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화선지로 구름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엉뚱한 재료와의 만남은 순전히 자연과 마주하면서 익힌 사색의 결과물이다. 봄날 하염없이 떨어져 쌓이는 꽃잎을 목도하면서 피뜩 뇌리를 스치는 영감과 조우한 것이다. 꽃잎이 쌓이는 모양을 보면서 문득 거기에 꾸미지 않은 가장 자연스러운 형상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된다. 만유인력 또는 무심한 바람의 작용에 의해 쌓이는 꽃잎의 이미지에서 신묘한 자연의 조화를 실감한 것이다. 땅에 떨어져 쌓이는 꽃잎의 추상적인 이미지야말로 가장 순수한 자연의 회화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는 그 순간 이것이야말로 무위자연의 명백한 증표임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이를 매개로 하여 꽃잎이 떨어져 쌓이는 장면과 유사한 표현방법을 착안하게 된다. 그리하여 꽃잎 같은 얇은 반투명 화선지를 잘게 잘라 겹쳐 붙이는 가운데 형상이 만들어지는 방법을 강구하게 된 것이다. 즉, 두텁게 붙여지는 부분은 짙어지고 얇게 붙여지는 부분은 옅어지는 식의 농담변화로 물상을 형용하게 된다. 가령 구름의 경우, 화선지의 적층에 따른 농담에 의해 구름의 형상이 만들어지는데, 구체적인 형상을 드러내지 않는 순수한 추상적인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물감에서 화선지로 물성이 달라짐에 따라 그 시각적인 이미지는 물론이요, 내용 또한 달라지게 마련이다. 일정한 두께의 반투명 화선지가 무수히 겹쳐지는 적층의 원리에 따라 형상이 드러나는, 일련의 화선지작업은 정신 및 감정의 반응 또한 다르기 십상이다. 잘게 자른 화선지를 붙여나가는 행위의 반복은 필연적으로 정신의 집중이 요구된다. 반복적인 행위의 연속성은 심적인 안정과 몰입을 유도한다. 색채가 없는 반투명 화선지는 색채가 배제됨으로써 맑은 정신의 집중이 가능하다. 겹쳐지는 화선지가 층을 형성하면서 화선지와 화선지 사이에는 행위의 연속성이 자리하고 동시에 사유의 적층이 형성된다. 단순한 화선지붙이기가 아니라, 일정한 투께의 얇은 반투명 화선지 재질이 만들어내는 절제된 행위를 통해 구도자적인 정신의 깊이가 깃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구름과 화선지의 연관성을 의식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즉, 구름은 바람으로 인해 이동하면서 그 형상의 변화를 초래하고, 얇은 화선지는 바람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몸짓한다. 더구나 구름과 화선지는 흰색이어서 동질일 뿐만 아니라, 바람의 존재를 명료하게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동류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얇은 화선지를 구름의 이미지에 적용했을 때 위화감이 없다. 구름과 바람이 동행하듯이 얇은 화선지는 바람의 궤적에 운명적으로 동승한다. 이처럼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화선지로 작업하는 과정에서 바람의 이미지가 개입된다는 시각은 논리의 비약이 아니다.

 

 

그는 이로부터 한걸음 진전하여 화선지의 바탕, 즉 소지의 문제를 부각시킨다. 자연을 빙자하기 위해서는 화선지가 들어앉는 소지 또한 자연성을 부여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 쪽물과 같은 몇 가지 천연재료를 이용하여 소지에 물감을 들인다. 그처럼 천연물감으로 처리한 소지 위에 꽃잎을 떨어뜨리듯 화선지 조각을 겹쳐 붙인다. 바탕색에 의해 하얀 화선지가 만들어내는 농담의 변화가 보다 선명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인위적인 행위의 흔적은 지울 수 없되 가능하면 자연에 가까운 표현의 순수성을 얻으려는 심사임을 알 수 있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꽃잎이 바람결을 따라 무심히 흩날리며 만들어내는 형상처럼, 그 또한 바람을 흉내 화선지 조각을 무심히 캔버스 위로 날리는 것과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자연성을 획득하려는 욕망을 멈추지 않는다.

그 욕망은 예기치 않은 이미지, 즉 표현의 순수성으로 환원하기를 기대한다. 그러기에 구름과 같은 구체적인 이미지만을 표현하는데 한정하지 않는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화선지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표현성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자연풍경을 포함하여 자유로운 구성의 추상적인 이미지, 그리고 비구상적인 연속문양까지 망라되고 있다. 바람의 작용에 의해 형상이 변화하듯이 화선지를 반복해서 붙이는 행위를 통해 다채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화선지를 붙이는 과정에서 일정한 패턴을 부여함으로써 리듬이 형성되고 시각적인 통일성을 획득하게 된다. 연속적인 문양이 나타나는 것은 호흡의 조율과 유사한 규칙적인 리듬을 부여하여 표현행위의 연속성을 유도한 결과이다.

 

 

이처럼 얇은 화선지를 이용하여 작업하면서 그는 화선지를 그림을 위한 캔버스로서의 소지로 인식하는 한편, 뭇 생명체를 키우는 대지의 이미지로 변환함으로써 조형적인 상상의 진폭은 점차 커지게 된다. 여기에 이르면 화선지는 어느새 생명체를 키우는 대지가 되는가 하면 사유의 텃밭이 된다. 그리하여 화선지 작업 위에 돌연 작은 생명체들이 기거하는 장관이 펼쳐지게 된다. 이름 모를 작은 풀꽃들과 풀잎이 화면 가득히 널브러짐으로써 새삼 무명의 생명체들에 깃들인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된다. 이는 잠자는 생명의 기운을 부추기는, 작가적인 아름다운 관심의 표명이다. 무심한 눈길에는 그냥 스쳐 지나고 말 무명의 꽃들과 풀잎을 하얀 사유의 대지 위로 하나하나 호명하여 그 존재의미를 일깨움으로써 더불어 존재하는 무명의 생명체를 우리 곁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자연에의 동화를 이상으로 여겨온 그 자신의 삶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모든 생명체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적인 관점이 아니더라도 만물은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음을 자연으로부터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물에 부여된 그 절묘한 형태미에 탄복하면서 무명의 꽃들을 사유의 텃밭으로 초대하게 된 것이다. 크고 작은 차이를 분별하지 않은 채 자잘하게 배치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생명의 가치는 비교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는 이들 작은 꽃들이 피부로 느낄 수 없을 만큼 작은 미풍에도 한들한들 반응하는 모양을 보면서 균등하게 분배되는 바람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바람은 하늘의 구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생명체가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그 풀꽃들은 고유의 색채를 상실한 채 파란색과 같은 비현실적인 색채이미지로 통일된다. 여기에는 꽃의 형태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하려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그 풀꽃들은 사유의 대상으로서 초대되었기에 그렇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화선지를 이용하는 최근의 작업은 바람을 흉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얇은 반투명의 화선지는 일테면 자연의 물감인 꽃잎과 다르지 않다. 화선지를 붙이는 표현행위를 바람의 작용에 근접시키고자 한다. 가능한 한 인위성을 덜어냄으로써 우연적인 것처럼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표현의 순수성을 최고의 미적가치로 상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능한 한 화선지라는 물성을 드러내지 않는 가운데 조형적인 아름다움 또는 사유의 깊이에 이르려는 것이다.

 

<'강 운초대전'은 2010년 5월12일부터 6월11일까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에 있는 비컨갤러리(02-567-1677)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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