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수의 작품세계
심미의 세계, 그 순수조형과 절제의 미학
신항섭(미술평론가)
인간에게는 귀소본능이 있다. 즉,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일종의 뿌리에 대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생이 어디에서 연원하는가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고향을 떠나 먼 외지에서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을지라도 언제나 가슴 한쪽에서는 태어난 곳을 그리워하게 된다. 또한 가까운 친척은 물론 친구 하나 없을지라도 한번쯤은 태어난 고향에 가고 싶어 한다.
백영수는 귀소본능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작가이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파리에서 활동하면서도 의정부에 있는 옛집을 남겨두었다. 그러다가 10여 년 전부터 해마다 한 두 차례 나지막한 시골집에서 풋풋한 흙냄새로 심신을 충전하고는 파리로 돌아가곤 한다.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옛집이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위안이 된다. 그러기에 졸수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파리와 서울을 왕래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건만, 옛집의 편안함을 즐기려는 본능적인 심사는 막을 길 없는 모양이다.
그에게 옛집 나들이는 단순한 그리움에의 해소 차원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개인전을 열어 안부를 궁금해 하는 이들과의 유대를 이어가는 기회이기도 하다. 1979년 본격적으로 파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파리지앵이 되었으니, 벌써 3개성상이 지났다. 파리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이래 파리, 룩셈부르크, 로마, 밀라노, 낭시, 애피날, 로테르담, 레냐노 등 유럽무대에서 20여회에 달하는 개인전과 1984년, 1986년, 1988년, 1991년, 1994년, 1998년, 2001년 서울과 대구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는 파리에서 활동하는 가운데서도 한국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마도 옛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에게 옛집은 단순히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옛집은 그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제재 및 내용의 원천이기도 하다. 작품 대다수는 초가집과 가족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엄마와 아빠와 아기는 가족을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원으로서 이를 통해 사랑과 행복과 꿈을 노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족 이야기를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은 다름 아닌 옛집이 모태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옛집에 대한 애착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파리생활을 하면서도 작품의 제재는 옛집에 연원하는 가족이야기이고 보니, 그 터전과 절연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옛집은 그의 작품에 끊이지 않는 영감을 제공한다. 가족과 더불어 집과 나무와 새와 꽃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 또한 옛집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에피소드를 거드는 보조적인 소재이기 때문이다. 집을 매개로 하는 가족과 함께 자연으로서의 나무와 새와 꽃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가는 소소한 일상의 얘기들이 그림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수십 년 동안 가족이라는 제재를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옛집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실제로 일 년에 한 두 차례 옛집에 들르는 것만으로도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회화적인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가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가족이야기를 작품의 제재로 삼기 시작한 것은 파리생활과 때를 같이한다.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 파리라는 전혀 다른 환경은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성격의 그에게 적지 않은 심적인 부담이 되었음직하다. 파리는 꿈과 낭만과 사랑을 약속하는, 예술가에게는 이상향과 같은 곳이건만 그는 오히려 향수에 젖어들었다. 스스로 선택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파리를 찬미하기는커녕 되레 본향의 그리움에 젖어들게 된 것이다.
동경했던 파리생활을 시작했으면서도 작품은 어린 시절의 추억 혹은 옛집의 이미지에 머물게 된 저간의 사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그는 파리에 살면서도 소재의 다양화는 물론이려니와 조형적인 상상조차 확장하지 않았다. 조그만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혼자 놀며 밖으로 나오는 것을 겁내는 아이처럼 그렇게 바깥세상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파리라는 거대한 도시, 그 화려한 거리풍경이나 매혹적인 건축물도 그의 마음을 파고들지 못했다. 물론 파리에 있는 동안 간간히 도회지적인 건물이 등장하는 작품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족과 나무 새 꽃이 어우러지는 동화 같은 이미지의 작업을 결코 놓지 않았다.
그의 작가적인 이상은 화려하고, 눈부시고, 거대하며, 놀라운 세상에 대한 감탄이 아니다. 인간적인 사회생활의 기본인 가족과 자연을 벗하는 삶을 이상경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연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 오두막(초가집)과 가족과 자연이 어우러져 지어내는 소박한 정경이야말로 낙원이라는 시각인지 모른다. 그 나머지 번잡한 세상사는 그저 삶을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일 뿐이라는 시각이지 싶다. 다시 말해 널따란 세상에 대한 환상과 꿈을 갖지 않은 순박한 유년의 시각에 머물기를 원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어린 시절의 추억과 관련한 조그만 세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즐겁고 행복한지 모른다. 그러기에 파리가 모든 예술가들의 선망의 도시라고 할지라도 그로서는 그로부터 그 어떤 창작의 영감도 격정도 감흥도 느끼지 않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파리에 무심할 수 있을까.
그는 널따란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관심도 없는 듯싶다. 세상과의 소통을 전제로 하는 것이 그림이라지만 그런 방법을 원하지 않는다. 방안에 앉아 조그만 창유리로 들어오는 바깥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의 경우 집과 가족 중심으로 전개되는 협소한 시야의 풍경에다 세상을 압축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의 소통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번잡한 세상을 차단함으로써 가족, 가정의 가치에만 집중할 수 있다.
가정과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그림의 제재는 이미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또한 재현적인 묘사방식을 버리고 표현주의적인 작업을 하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47년 화신화랑에서 창립전을 연 <신사실파> 동인으로 참여한 시기와 때를 같이한다. 김환기를 비롯하여 유영국, 이중섭, 장욱진, 백영수, 이규상 등 6인이 참여한 <신사실파>는 한국추상화(혹은 비구상)의 선두 그룹으로서 이들의 면면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상 한국현대회화의 초석을 놓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52년 국립박물관 부산임시사무소에서 제3회전을 끝으로 해체되었으나 이 시기에 벌써 그의 작가적인 진로는 결정되어 있었음직하다. 시각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자연의 본질, 즉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유를 통해 형성되는 심상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의미를 두었다. 결과적으로 가정과 가족 그리고 자연이 함께 작품의 제재는 그에게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것이었다.
그가 파리에서 얻은 교훈은 내 것의 소중함, 내 것 아름다움에 대한 성찰이었다. 파리 생활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본질을 보게 되었고, 그로부터 회화적인 비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가 발견한 회화적인 비전이란 한 작가로서의 개별적인 형식미에 필요한 사상 및 철학이었다. 자기 내부로부터의 비전이 아니라, 파리생활을 통해 발견한 비전이라는 역설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 것의 소중함, 아름다움은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리하여 그는 그 때부터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미혹을 거둔 채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파리생활과 역행하는 제재 및 소재를 가슴에 안으면서 비로소 미래를 향한 확신에 찬 걸음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파리에 살면서도 조형적인 공간은 한국이라는 이중적인 상황에 대한 부담은 전혀 느끼지 않는 듯싶다. 이국적인 정서에 갇혀 사는데도 그와는 유리된 한국적인 정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아마도 작품 제재 자체가 현실이 아닌 과거의 시간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리라. 다시 말해 작품에 부여하고 있는 시간 및 공간은 현재가 아니라 40-50년 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과거일 수 있다. 그러기에 어차피 한국적인 현실은 물론 파리의 현실과도 무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성장을 거부하는 아이처럼 과거의 시공간에 머물러 있을까. 그는 선천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번잡한 세상과의 만남을 번거로워했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즐거움보다는 내면세계를 소요하는 기쁨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번잡하고 수다스러운 현실과 격리된 채 과거의 시공간을 매개로 하여 사색하기를 즐기는 것인지 모른다. 그의 작품은 확실히 현실적인 상황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인다. 설령 현재의 어느 시간 및 공간을 묘사하는 경우에도 시간이 정지된 듯,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유럽 중세풍의 고택이나 고도시를 묘사하는 작품에서도 과거의 시공간이 표현될 뿐 현실감이 없다. 이처럼 그에게 발전한다는 것, 변화한다는 것, 즉 현재진행형은 관심 밖의 일이다.
그가 현재와 같은 독특한 인물의 형상을 통해 가족이야기를 작품의 제재로 채택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이다. 이 때 이미 형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 인물상을 독자적인 감각으로 완성함으로써 개별적인 형식미에 도달한다. 물론 당시에는 얼굴을 가로로 누인 형태의 인물상이 작품세계 전반을 장악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인물상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명민한 미적 감수성에 의한 회화적인 영감의 소산이었음은 명백하다. 그처럼 간명한 비정형의 인물상만으로 그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여간한 용기 또는 자기 확신이 없고서는 될 일이 아닌 까닭이다.
그가 창안한 인물상은 인체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형태로 단순화된다. 머리와 몸통 팔 다리로 구성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얼굴과 몸으로만 된 극단적인 형상도 존재한다. 물론 팔 다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눈코입이 자리하는 얼굴과 옷으로 가려진 몸체 부분만으로 인물을 형용하고 있다.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는 극단적인 요약이고 단순화이자 함축이다. 그럼에도 그 인물형상이 기괴하다거나 불쾌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원죄가 없는 천진무구한 아름다움이 존재할 뿐이다.
이렇듯이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 인물은 우연의 표현이 아니라, 철저히 의도된 이미지이다. 특히 얼굴을 수평에 가깝게 가로누인 상태의 인물상은 안정감과 평안함 그리고 평화로움을 유발하는 심리적인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가로누인 얼굴은 인간의 잠재적인 공격본능조차 무력화시키는 화평의 몸짓언어일 수 있는 것이다. 즉, 수직의 길쭉한 얼굴이 자신만만하고 도전적이며 공격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데 비해 가로누인 얼굴은 이와 반대의 감정을 표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안정감 있고 평안하며 평화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의 천진무구한 심상으로 세상을 응시하자는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시각은 그 자신의 일상적인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번거로운 세상사를 피해 마치 호수와 같이 고요한 삶을 즐기는 그의 모습이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소년과 같은 맑은 성품도 그러하거니와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행동거지 또한 시간의 흐름을 억제하고 있는 듯싶다. 어쩌면 유소년 시절에 한정하는 정지된 시간 및 변하지 않는 공간개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얼굴을 가로누인 인물 설정은 이처럼 사랑과 화평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누구에게나 다툼의 대상이 아닌 오직 사랑과 화해의 화신과 같은 존재로서 다가올 뿐이다. 달걀과 같은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은 그 인물이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자애롭고 사랑스럽다. 어쩌면 달이나 별을 올려다보는 고갯짓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애틋하게 바라거나 그리워하는 심정이 감지되기에 그렇다. 뿐만 아니라 갸웃한 고개는 어쩐지 애조를 띄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마음속의 애조가 그림 속에 흥건하다.
비록 가진 것 없는 옹색한 삶이지만 사랑과 희망과 그리움과 행복과 평화가 있는 소박한 삶의 그림자가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이러한 정경은 그 자신의 현실적인 상황을 반영한 것이 라기보다는 해방 직후 한국인의 공통적인 정서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보릿고개’ 용어로 함축되는 어려운 시절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러나 가난은 슬픔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아름다움 속에 깊게 배어 있는 애조는 그의 작품만이 아니라 1950-60년대에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공통의 정서라고 할 수 있다. 가난이라는 힘겨운 삶이 만들어낸 애잔한 정서는 그의 작품에서는 한 수의 아름다운 시와 같은 서정성으로 승화된다. 애조가 깔린 서정적인 이미지야말로 그의 작품을 형성하는 근간의 하나이다. 이는 어쩌면 깔끔하고 담담하면서도 문학성이 높은 그의 수필집 <성냥갑 속의 메시지>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는지 모른다.
그의 작품은 소재는 물론이려니와 제재 그리고 조형적인 면에서 문학적인 향기가 짙다. 초가집, 가족, 새, 나무, 꽃, 달, 강아지 따위의 소재는 서정적인 풍경을 거드는 요소들이다. 이들 소재가 이합집산하면서 서로 다른 이미지의 시적인 정서를 만들어낸다. 지극히 함축적인 형태미도 그러하거니와 간결한 구성, 그리고 깊은 사색의 흔적을 드러내는 여백이 어우러지면서 한 편의 시적인 정경을 펼친다. 즉, 함축적이면서도 농축된 언어에 의해 조성되는 시적인 긴장이 자리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본질만을 얘기한다. 번잡한 수식은 생략한 채 표현하고자 하는 형상을 최대한 압축하여 그 개략적인 이미지만을 보여준다. 특히 인물상의 개략적인 이미지는 어느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고 보편적인 상으로서의 형태만을 추구한다. 가족상은 그 자신의 개인사적인 에피소드일 수 있는가 하면, 우리 모두의 가족사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유사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 및 공간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거기에 살을 붙이고 옷을 입혀 감상자 자신의 개인적인 추억과 결부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그는 그림은 문학적인 향취뿐만 아니라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이 비록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그림의 정서를 통해 공감할 수 있는 시대상이 읽혀지는 것이다. 물론 그 시대상이란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가진 것 없는 서민들의 옹색한 생활상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림을 통해 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다. 배고픔이라는 가장 절실한 현실적인 고통조차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지나간 추억은 모두 아름답다지만, 그가 요약하고 함축해낸 간결한 이미지는 구차한 모든 기억을 아름다움으로 변환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압축된 간결한 이미지는 오직 심미의 세계를 증명할 따름이다. 사실적인 형태를 하나하나씩 소거해나가면서 독자적인 형상에 도달하는 일련의 조형의 과정은 문인화와의 연관성을 외면할 수 없다. 형상미보다도 정신적인 가치를 우위에 두는 문인화적인 취향이 농후하기에 그렇다. 무엇보다도 이미지의 본체만을 제시하려는 간명한 형상과 그를 떠받치는 여백을 사유의 그림자로 채우는 문인화의 습속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어느 면에서 그의 그림은 오직 사색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그 어눌한 형태감각은 기술적인 완성도와는 무관해 보이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그림과는 다른 세계를 소요한다. 그렇다면 필경 문인화의 사의의 세계를 답습하는 것이리라. 지극히 단출한 구성의 형상을 제외한 나머지, 즉 아무런 형태가 없는 공간은 다름 아닌 사유가 깃들이는 자리가 된다. 형상을 없을지라도 채색을 입힘으로써 결코 허전하게 비어두는 법은 없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형상보다도 더 단단한 채색작업으로 형상을 보조하는 것이다. 때로는 선명한 색채이미지로, 때로는 색채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담백하게 처리한다. 어느 경우에도 사유의 그림자가 자리하기에 허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작품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모한다. 특유의 인물형상이라는 기본적인 틀 위에서 다양한 조형적인 변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1960-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인물이나 소재의 형태묘사는 지속적인 검정색 윤곽선으로 묘사했다. 즉, 형태를 규정하는 윤곽선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이는 일반적인 선묘중심의 묘사기법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지속적인 선은 돌연 단속적인 선으로 바뀐다. 다시 말해 마치 바느질 땀을 연상케 하는 단속적인 선이 이어지는 형태로 변모한다.
왜 바느질 자국 같은 점선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는 가느다란 형태의 윤곽선은 시각적으로 지루해서 나태하게 느껴진다. 달리 말해 선 스스로의 자기 존재감을 주장하지 못한 채 무표정하게 보이는 것이다. 형태가 극단적으로 단순화되는 상황에서 형태를 규정하는 윤곽선마저 단조롭게 진행되면 단순한 묘사화로서의 성격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바느질 땀과 같은 크기의 단속적인 점선이 이어짐으로써 묘사화로서의 이미지를 단숨에 벗어버린다. 이와 같은 단속적인 점선은 실제로 바느질 자국에서 영감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느질 땀을 연상시키는 점선의 연속성으로 인해 생기하는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점을 연결하면 선이 만들어진다는 발상은 수리적인 개념이지만 이를 회화에 적용했을 때는 조형적인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진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는 점의 연속성에 의한 형태묘사라는 독특한 조형어법을 성립시킨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의 흐름, 즉 점선은 선묘화로서의 단조로움을 순식간에 해소시킨다. 더구나 바느질 땀과 같은 연속적인 점선에서는 재미가 느껴진다. 즉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점선에서는 리듬과 표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극히 단순한 선묘 중심의 형상임에도 싱겁지 않다.
그의 작품에서 단속적인 점선은 개별적인 조형언어이자 어법으로 확고히 자리한다. 소재가 무엇이든지 모든 형상은 점선으로 통일된다. 명료하게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자기주장이 명확하지 않은데도 점선의 시각적인 호소력은 작지 않다.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가느다란 점선은 왠지 나약해 보이지만 반면에 섬세하다. 명민한 미적 감수성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가느다란 점선이 지어내는 형상을 보면 여리면서도 다정다감하게 느껴진다. 이는 서정적인 시의 여운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 형상을 제외한 배경에 원형 또는 모서리의 예각을 둔화시킨 사각형의 특이한 패턴이 자리하고 있다. 점선이나 또는 단색조의 색채이미지로 구분해 놓은 원형의 이미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소재를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어서 울타리 또는 마당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안온하게 느껴진다. 마당이나 울타리는 외부로부터의 간섭이나 방해를 차단하기 위한 일종의 보호구역과 같은 성격으로 이해된다. 물론 마당은 개방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울타리와는 좀 다른 성격이지만 그림 상의 시각적인 이미지는 안정감을 주는데 기능한다.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비어 있는 배경을 보다 활동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둥근 원형의 이미지로 인해 그림에서도 안과 바깥이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구성의 배경은 색채대비라는 또 다른 조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즉, 안과 바깥의 색채이미지를 달리함으로써 비어 있는 여백과는 다른 한층 발랄한 공간구조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유가 깃들이는 여백개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원형의 안과 바깥에 차이를 둠으로써 채색의 농도가 짙어지고 화면상의 밀도 또한 높아지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 무수한 점으로 채워지는 작품의 경우 원형 및 사각형의 이미지는 더욱 선명히 부각된다. 여기에서 형상을 제외한 화면 전체가 작은 점들로 빈틈없이 채워지는데 세련미의 극치에 이른다. 여기에서 새삼 밀집된 점이 심도 깊은 조형공간으로 변환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심미적인 관점을 요구하는 세련된 조형어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탐미적인 시각이 아니고서는 그처럼 무수한 점으로 채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점으로 채운 작품과 단색조의 평면적인 색채이미지로 채운 작품과는 세련미의 차이가 확연하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소재가 좀 더 다양해짐으로써 볼거리가 늘어난다. 실내정경을 비롯하여 교회당이 등장하는가 하면 중세유럽의 고도풍경도 눈에 띄고 전통적인 민속기물도 보인다. 이와 같은 소재의 다양화는 세상과의 보다 적극적인 소통을 의미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결부된 협소한 공간에서 벗어나 비로소 현실적인 세상을 응시하게 된 셈이다. 그런가 하면 화면구조 또한 점차 복잡한 양상으로 변모하게 된다. 소품의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나열하여 대형화면에 이르는 구성적인 작품도 시도한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형태가 거의 사라지고 없는 순수조형의 묘미에 빠져든다. 텅 빈 화면에 아주 조그만 창 몇 개가 불규칙하게 자리하는 적막한 이미지의 작품이 나타난다. 벽과 창을 제제로 하는 이러한 유형의 작품은 극단적인 절제의 미학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추상의 개념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벽과 창이라는 현실적인 공간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구성적인 화면이기에 그렇다. 물론 창문의 구성은 실제와는 다른 임의적인 조형적인 해석의 결과물이다. 단지 벽과 창의 이미지만을 빌려올 뿐, 화면의 구조 또는 구성은 심오한 사유에 의해 지지된다.
최소한의 이미지로 도달할 수 있는 조형의 순수성, 그 절제의 미학으로 환원하려는 것이다. 이제까지도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단순화함으로써 순수조형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자 했다. 그러나 최근의 작품은 그로부터 한 단계 더 진전하여 형태를 극단적으로 적고 또 작게 표현함으로써 상대적인 사유의 공간을 확장하고 있다. 보이는 것을 최소화함으로써 시각적인 이해의 틀을 뛰어넘는 심도 깊은 사유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각적인 긴장이 팽배하는 가운데 형태(창)가 점으로 환원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여기에서는 화면분할이라는 또 다른 조형적인 공식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하학적인 추상에서 제시했던 면 분할과는 다른 시각에서 출발한다. 얼핏 보아서는 선에 의해 구획되는 평면구조로만 보일 뿐이지만, 자세히 보면 벽과 창이라는 두 개의 제재가 함께 하는 구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어쩌면 ‘사실의 추상화’라는 새로운 조형개념의 제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화면 전체를 비어 있는 공간이 장악함으로써 상대적으로 형태미에 대한 의지가 박약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형태묘사를 포기하고 점에 가까운 작은 창의 형태를 불규칙하게 배치하여 그로 인해 생기는 미묘한 공간적인 긴장감을 주시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비표현적인 순수추상과는 엄연히 다른 형태 구성의 문제이다.
보이는 것, 사실적인 것, 또는 구체적인 것을 극단적으로 최소화했을 때 생기는 공간의 확장은 오직 사유의 거처일 뿐이다. 한마디로 심오한 심미적인 영역으로의 진입임과 동시에 순수조형의 진면목일 것이다. 그는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다. 가능한 한 형태의 존재감을 덜어냄으로써 획득되는 화면의 순수성, 그 탐미적인 시각은 지적인 아름다움의 실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가족의 얘기를 내용으로 하는 단출한 형상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감성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면, 평면성이 강조되는 최근의 작품은 이성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지적인 해석에 의해 밝혀지는 순수조형의 세계는 오랜 사유에 의해 정제된 순도 높은 심미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백영수초대전"은 2010년 6월4일부터 24일까지 서울아트센터(옛 공평아트센터 : 02-3210-0071)에서 열립니다>
'명작의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작의 길 (47) - 조안 자세르 (0) | 2010.09.24 |
---|---|
명작의 길 (46 ) - 김혜진 (0) | 2010.08.06 |
명작의 길 (44) - 강 운 (0) | 2010.05.17 |
명작의 길 (43) - 나윤찬 (0) | 2010.04.27 |
명작의 길(42) - 장혜용 (0) | 2009.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