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42) - 장혜용

펜보이 2009. 12. 16. 07:59

 

 

 

장혜용의 최근 작업

 

조형적인 상상력이 만개하는 꿈꾸는 무릉도원

 

신항섭(미술평론가)

 

창작의 세계에서 일관된 조형언어 또는 형식논리를 가진다는 것은 신념이 없고서는 안 될 일이다. 다시 말해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정연한 조형언어 및 형식미가 관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창작활동을 하는 동안 한두 차례, 또는 그 이상의 조형언어 및 형식의 변화가 있게 마련이다. 내부의 반란이건, 외부의 자극이건 간에 극적인 심인에 의해 조형언어 및 형식이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적인 신념이 강한 이들 가운데 더러는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자기만의 조형언어 및 형식미를 견고히 다져가기도 한다. 그 변화의 폭이 좁거나 긴장감이 느슨하여 외부에서는 좀처럼 감지 못하는 수도 있으나, 마침내는 뚜렷한 독자적인 조형세계 그 견고한 성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장혜용의 최근 작업은 일관된 조형언어 및 형식논리가 어떻게 귀결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물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에 결말에 이른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까지 그 자신이 신념해온 조형언어 및 형식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긴박감이 느껴진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조형의 꽃이 만개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다시 말해 조형적인 상상력을 억제해온 모든 내외적인 조건으로부터 해방되고 있다는 판단을 유보할 이유가 없다. 최근의 눈부신 조형의 변주를 보면 그렇다. 어쩌면 성급할 수도 있는 이런 평가 이면에는 일관돼 온 조형언어의 패턴이 지속되고 있을뿐더러, 이후에도 그로부터 크게 멀어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는 까닭이다.

 

 

어느 면에서는 결코 새롭다고 할 수 없는, 이전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의 작업에서 일별할 수 있는 몇 가지 조형적인 패턴이 여전히 그림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별적인 형식미는 이전보다 한층 간결하면서도 과감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이전까지의 작업을 종합하여 그로부터 조형적인 공통분모 또는 최대공약수를 산출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전보다 더욱 명료한 개별적인 조형언어를 구사하는 단계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최근 작업에서는 형태의 간결함 및 명확성, 형태와 배경을 동일 공간개념으로 통일하는 채색방법, 강렬한 원색, 형태의 확대 그리고 적극적인 여백활용 따위로 요약되는 새로운 조형어법을 제시하고 있다. 채색방법 및 여백활용은 전통회화와 현대미학이 조합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충돌을 교묘히 융합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이는 확실히 새로운 형식의 조형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채색재료를 대체하는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는데 따른 예견된 혼란을 거뜬히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 신선하다.  

 

 

어느 면에서 아크릴 물감은 그에게는 낭보와 다를 바 없다. 이제까지 전통회화에 대한 정신적인 부담과 새로운 재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기존의 채색재료를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부담감 및 두려움을 말끔히 해소할 수 있었다. 오히려 순색을 그대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아크릴 물감의 장점이 그 자신의 작품에서 활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뿐더러 오랜 시간 및 공력을 필요로 하는 전통적인 채색작업과 달리 작업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화면의 확대가 좀 더 자유로워짐에 따라 대형작업이 한결 수월해진 것도 부수적인 성과이다.

더불어 조형적인 상상의 공간이 확장되었다. 화면의 확대가 자유로워짐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상상의 날개도 자유로워진 것이다. 적어도 화면의 제약에 따른 상상의 억압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상상의 공간이 확장되면 세상을 응시하는 시야가 넓어지게 마련이다. 시야가 넓어지면 조형적인 사유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이렇듯이 아크릴 물감은 그에게 새로운 조형적인 체험과 긴장과 희망을 주고 있다.

 

 

그림의 내용을 포함하여 소재는 한 가족의 일상적인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전과 작업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다 ‘무릉도원’ 연작과 같은 대자연에 대한 동경과 꿈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추가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무릉도원’의 연장선상에 있는 ‘어머니의 정원’이 새로운 주제로 가세하고 있다. 작품의 구성방식은 ‘무릉도원’과 동일하다. 초목 또는 화초가 화면을 지배하는 가운데 누드 또는 인물이 배치되는 구성이다.

이들 연작형식의 작업은 화면의 크기가 커지고 있다. 이는 시야의 확대에 따른 제재 및 내용의 확장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일 수 있다. 다시 말해 가족의 일상적인 삶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하다가 대자연 및 정원이라는 공간적인 확장으로 옮겨감으로써 자연히 화면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실제로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의 숫자 및 가짓수의 증가를 포용하기 위해서는 화면의 확대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무릉도원’이나 ‘어머니의 정원’ 연작은 다양한 동식물이 생장하는 숲의 이미지를 원색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통해 이상적인 대자연의 풍경을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무릉도원’은 인간의 이상향에 대한 동경과 꿈을 서술하는데 비해 ‘어머니의 정원’은 어머니가 가꾸는 화목한 가정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희망과 염원을 화초를 가꾸는 어머니의 모습에 일치시킴으로써 꿈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전개된다. ‘무릉도원’이 보편적인 인간의 유토피아라면 ‘어머니의 정원’은 한 가족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화목한 가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무릉도원’이나 ‘어머니의 정원’은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자 실체인 꽃과 초목을 배경으로 구성된다. 온갖 동식물이 공존하는 숲의 이미지는 복잡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숲의 이미지에 일정한 조형적인 질서와 리듬을 부여함으로써 말끔한 회화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리하여 시각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이상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이런 방식으로 조성되는 조형공간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무감각한 이들조차 감동시킬만하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조형미는 인간의 미적 감각에 대한 호소력이란 측면에서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자연미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일 수 있는 까닭이다.

 

 

‘무릉도원’이나 ‘어머니의 정원’은 이처럼 조형적인 아름다움의 세계 그 전형을 보여준다. 정련된 조형언어 및 잘 직조된 조형어법으로 조합되는 자연풍경인 까닭이다. 자연이라는 실제적인 형태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시각적인 감동을 유발하는 세련된 조형미를 직조해내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세련된 조형미란 숙련된 기술과 고양된 미적 감각의 산물이다. 이는 지적인 해석과 감정적인 충동이 결합했을 때 발생하는 창조행위이자 그 결과물인 것이다.

그는 최근에 형태의 해석이란 문제와 관련해 이전보다 극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 하나의 결실이 형태의 확대라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꽃이라는 단일소재를 화면 가득히 확대함으로써 일시에 시각적인 긴장 및 압박이 야기된다. 이처럼 비현실적으로 확대된 이미지의 제시는 시각적인 충격 및 심리적인 압박을 겨냥한 현대회화의 조형어법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확대하는 데 머물지 않고 몇 가지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비일상적인 공간의 아름다움을 창출한다.

 

  

꽃과 인물이라는 소재 및 대상이 그의 화면공간에서는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바뀐다. 물론 전체적인 시각에서는 꽃과 인물이라는 형태미를 따르되 세부적으로는 추상적인 이미지로 표현된다. 꽃을 평면적인 이미지로 재해석하여 극단적으로 단순화한다든가, 하나의 꽃을 다양한 색채이미지로 조합하는 식이다. 이때 형태를 장악하는 것은 검정색의 두터운 윤곽선이다. 그러고 보면 강인한 이미지의 윤곽선과 그 선에 의해 결정되는 단순한 형태 및 평명적인 색채이미지가 화합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여기에서 그는 색다른 제안을 한다. 소재 및 대상의 형태와 그 형태를 감싸는 배경을 동일한 공간개념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인화가 한지 위에 선묘로만 이루어지듯이 그의 작업 또한 문인화의 선묘방식을 원용하고 있다. 물론 소재 및 대상의 형태가 부분적으로 다른 색채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이외의 부분에서는 배경의 색채와 형태의 색채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색채로 통일함으로써 순수한 평면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문인화의 경우 배경을 소지 자체로 비어둠으로써 여백개념이 성립되는데 반해, 그의 경우에는 소지를 단일 색채로 통일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형태를 규정하는 윤곽선, 즉 선묘만으로 형태묘사가 완결된다는 점에서는 문인화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선묘방식에서는 모호함이나 애매함이 없다. 형태는 선에 의해 명백하게 드러난다. 물론 명암이나 원근기법을 배제한 선묘방식만으로는 입체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문인화가 시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간결한 선묘방식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입체적인 이미지 그 이상의 리얼리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문인화적인 선묘방식을 원용하는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가치를 중시하고 있다. 비록 현대적인 서양재료를 사용할지라도 조형언어 및 어법은 전통에서 강구하려는 것이다. 평면적인 색채 구성도 따지고 보면 민화의 수법이다. 나비와 꽃이라는 소재 또한 민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구성이다. 그런데도 민화적인 이미지가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현대적인 조형어법으로 변환한 결과이다.

확대된 이미지의 작품에서는 하나의 꽃에 여러 가지 색상을 도입하는가 하면 형태의 변주를 획책한다. 이는 단일 소재의 확대에 따른 시각적인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방법임과 동시에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위한 배려이다. 굵고 힘차며 명확한 검은 윤곽선에 의해 만들어지는 꽃 또는 인물의 이미지는 시각적인 개방감을 준다. 막히지 않은 열린 이미지, 즉 문인화적인 조형개념을 적용함으로써 시선이 형태와 배경을 그대로 관통하면서 시각적인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시각을 압박할 정도로 확대된 이미지에서 시각적인 쾌감을 느끼는 것은 닫힌 이미지가 아닌 까닭이다.

 

 

‘무릉도원’이나 ‘어머니의 정원’을 포함하여 확대된 이미지의 최근 작업은 대형작업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단순하면서도 간결한 이미지 묘사방식과 함께 아크릴 물감이 가지고 있는 작업의 신속성과 화려한 발색도 화면의 대형화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작은 화면공간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공간감에 육박한다는 것은 화가의 가장 현실적인 꿈인지 모른다. 작은 화면은 어떻든 가상의 공간이라는 심리적인 제약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회화와 현실의 일치를 꿈꾸는 자에게는 억누를 수 없는 갈망이다.

그는 이제 스스로 그런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최근 작업은 그런 숙제를 풀 수 있는 하나의 답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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