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40) - 전준엽

펜보이 2009. 10. 23. 08:21

 

 

 

전준엽의 작품세계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킨 이상세계로서의 선경

 

신항섭(미술평론가)

 

조형적인 사고는 재료에 영향을 받는다. 화가는 재료의 물리적인 특성, 즉 물성에 적합한 표현을 강구하게 된다. 가령, 수묵의 재료인 지필묵으로 기름지고 두터운 유채물감의 시각적인 이미지를 표현할 수 없다. 재료에 따른 장르 구분이 명확한 것도 이에 연유한다. 하지만 현대미술에서는 이에 순응하지 않고 재료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일부 작가들은 발상의 전환 및 표현기법의 개발을 통해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소기의 성과를 얻는 경우도 없지 않다.

전준엽은 유채물감으로 새로운 개념의 현대적인 산수화를 모색, 독자적인 형식을 탐색하고 있다. 유채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전체적인 인상은 한 폭의 수묵산수화를 보고 있는 듯싶다. 수묵산수화가 그렇듯이 산과 물과 나무와 바위, 정자 따위가 등장함으로써 수묵산수화의 요건을 충족시킨다. 더구나 적지 않은 작품에는 인물이 등장한다. 한가롭게 정자에 앉아 선정에 드는가 하면, 소나무 아래 뒷짐진채 소요하기도 하며, 배를 저어가는 가는 등 수묵산수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의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느닷없이 수직의 폭포가 보이고, 매화꽃 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새를 볼 수 있으며, 연꽃이 가득 핀 연당이 보인다. 그런가 하면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든 석양풍경, 짙푸른 하늘 및 바다에 뜬 달, 그리고 만발한 매화나무를 넌지시 내려다보는 낮달도 가세한다.

 

 

이 정도만으로도 일반적인 유채화의 풍경화와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료와 표현기법은 양화임에 분명하나 내용은 수묵산수화의 격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일테면 수묵화와 유채화의 이종교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보아온 사실주의 또는 인상주의 화풍의 풍경화와는 사뭇 다르다. 수묵산수화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기이한 산수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림으로서의 조형적인 성과는 탓할 데 없다. 즉, 단지 눈에 익숙하지 않아 낯설 뿐 풍경화로서의 요건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식의 풍경화는 확실히 생경하다. 전통적인 동양의 그림인 수묵산수화의 내용을 서구의 재료인 유채로 그린다는 발상 자체가 놀랍다. 그의 풍경화는 그림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파격으로 다가온다. 내용은 수묵산수화에 가까우나 형식은 유채화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거인 셈이다. 그러나 작품이 말하고 있듯이 하나의 독립된 그림으로서는 탓할 데 없이 완성도가 높다. 특히 유채화 특유의 치밀하고 밀도 높은 표현기법은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만큼 견실하다.

 

 

더구나 새로운 형식의 그림인 만큼 그에 맞는 표현기법을 개발, 독자적인 조형언어 및 어법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역시 생소한 인상을 주는 요인이다. 붓이나 나이프로만 묘사하는 유채화와는 달리 번지기, 덧붙이기, 긁어내기 따위의 현대회화에서 쓰이는 다양한 방법을 구사한다. 이로써 묘사적인 또는 표현적인 유채화 방식과는 다른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조형적인 이질감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 내용은 전통적인 수묵산수화인데도 현대회화의 조형어법을 적용하는 이율배반적인 형식미를 갖추게 된다.

그러고 보면 그의 그림은 이제까지 시도된 일이 없는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그러기에 낯이 익은 듯싶으면서도 여태 본 일이 없는 형식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조형세계를 추구하는 일 자체야말로 창작의 윤리성이다. 이전의 화가들이 닦아놓은 길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단호하면서도 순수한 열정이야말로 참다운 작가상인지 모른다. 미답의 처녀지를 개척하는 데는 모험적인 정신과 그에 따른 위험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의지를 차근차근 관철해 나가고 있다.

 

 

개별적인 형식의 완성은 곧 독자적인 조형세계의 완성을 의미한다.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완성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가 애써 모험을 수반하는 새로운 조형어법을 모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창작활동이란 궁극적으로 자기만의 조형언어 및 어법을 성립시키는데 있다. 동양과 서양을 하나의 관점으로 통합하여 새로운 조형적인 질서를 만들어내는 일은 간단치 않다. 그림에 대한 일반적인 고정관념 및 선입관을 타파할 수 있는 조형적인 타당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양의 재료로 동양의 정서를 표현하려는 시도 자체가 갓 쓰고 양복을 입는 식의 부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단지 익숙하지 않을 뿐, 새로운 형식의 제안이라는 점에서 신선하기만하다. 오히려 엉뚱한 발상에 의해 유도되는 새로운 시각의 조형개념에 의한 시각적인 충격이 적지 않다. 즉 그림이 될 성싶지 않은 이질적인 조합인데도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서정성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가 추구하는 조형세계는 아름다움을 예술적인 가치로 내세우는 순수미학에 전적으로 동조한다. 새로운 조형적인 모색은 시각적인 아름다움 위에서 시작된다. 번잡한 현실상을 소거한 채 간결하게 서정적인 이미지만을 취합하여 함축적인 미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풍경화는 지극히 간결할 뿐더러 실제를 압축하고 함축함으로써 시적인 긴장이 팽배하다. 화폭에 등장하는 형상은 너무도 단출하여 단박에 눈과 마음을 장악한다. 이처럼 간결한 구성은 문인화의 형식에 근사한 것이다.

 

 

그는 그림이란 궁극적으로 문학이 되어야 하고 시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처럼 간결한 구성적인 이미지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그가 제시하는 함축적인 형상 및 구성은 사의의 세계를 추구하는 문인화를 연상케 한다. 함축적인 형상 속에 은거하는 문인정신을 구현하려는지 모른다. 자연에 동화되는 삶을 이상적으로 여긴 옛 선비들의 삶의 편린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심증이기에 그렇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은일고사, 또는 은일선사라고 할 수 있다. 실루엣 형식으로 처리되는 인물의 형상이 뚜렷하지 않은 것은 특정의 인물을 지칭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현실 밖의 대자연을 소요하며 묵상으로 일관하는 이상적이고 상징적인 존재일 따름이다. 그래서일까.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인물은 이상적인 삶의 지표처럼 다가온다. 작품속의 인물은 상징적인 존재일 뿐 허상이다. 실루엣, 즉 그림자의 이미지로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가 보여주는 풍경은 그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세계관에 대한 표명일 수 있다.

 

 

그 자신의 현실적인 삶의 태도 또한 그림 속의 인물과 다르지 않다. 자연을 찾는 대신에 화실이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회화적인 이상을 향해 비상하는 꿈을 꾸고 있기에 그렇다. 누구도 침범하지 않는 견고히 닫힌 화실에서 세상과 절연한 채 사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심미적인 깊이에 이르려는 태도는 은일고사와 다르지 않다. 실제의 자연을 재현하지 않는 그에게 자연은 그저 사유의 매개체일 따름이다. 자연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드는 조형적인 매개물이고,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이상경이다.

그의 작품에 보이는 풍경은 지적조작의 산물이다. 실재하는 풍경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꾸며진 이상경일 뿐이다. 기암괴석이나 고산준령, 심산유곡이 자리하는 명산대천이 아니다. 은일고사의 존재가 암시하듯이 일종의 선경이라고 볼 수 있다. 신선이 노니는 선계, 또는 그 경지에 오른 선비가 유유자적하는 이상적인 풍경인 셈이다. 그런데 선경이라고 하기에는 색채이미지가 너무 도발적이다. 꽃과 새에서 볼 수 있듯이 원색적인 이미지가 시선을 자극한다. 자칫 유치하다는 기분을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인 색채이미지가 눈에 띈다. 이는 고상한 정신세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와 같은 원색적인 이미지 및 형태묘사는 민화적인 속성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다소 비현실적인 구성은 민화의 초월적인 공간개념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고 보면 형식적인 면에서 민화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민화적인 속성은 전통적인 미학의 수용임과 동시에 친근감을 유도하기 위한 발상에 기인한다. 고매한 인격, 고상한 정신성만을 지향하면 대중적인 호소력이 약하기 마련이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민화적인 이미지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리라. 이로 인해 전통적인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어느 면에서 비현실적인 설정, 즉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삶과 달리 세속적인 이미지를 탈각한 풍경은 접근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은일고사라는 인물 또한 현실감이 결여되어 있다. 이런 괴리감을 메우기 위한 방편으로 민화적인 친근한 이미지 설정이 필요했던 것인지 모른다. 실제로 소나무의 형태해석에서도 복잡한 이미지를 지양, 치졸한 이미지로 바꾸어 놓았다. 그럼으로써 이미지의 전달이 용이하고 또한 시각적인 이해가 쉽다.

 

 

이렇듯이 그의 그림은 복합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내용과 형식에서 이미 혁신적인 길을 찾고 있는 터이지만,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키는 일야말로 독자적인 조형세계의 관건이라는 사실을 직시한 결과이다. 표현기법 및 방법은 현대적이되 내용과 형식은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소 복잡한 구성 및 내용으로 일관하는 것은 한국적인 그림, 즉 한국성을 매개로 한다는 투철한 작가적 신념에 근거한다. 서구재료인 유채를 고수하고 서구적인 표현기법 및 방법론을 수용하는 것은 보편적인 조형언어 및 문체를 획득하기 위한 선택이다.

그의 조형세계는 점차 진화한다. 수 년 동안 조금씩 변해온 작품의 행로가 이를 증거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스로 의심스러운 부분을 모두 제거하고, 마침내 유일무이한 조형언어 및 어법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하는 것이리라.

 

<전준엽초대전은 2009년10월21일부터 11월7일까지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있는 빛갤러리(02-720-2250)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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