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60) - 새로운 흐름을 선도하는 사진

펜보이 2010. 11. 26. 07:57

 

미술신문 칼럼

 

새로운 흐름을 선도하는 사진

 

신항섭(미술평론가)

 

 

최근 사진을 이용하는 극사실화가 유행하면서 기존의 사실주의 미학을 추종하는 작가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애써 소묘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정밀한 묘사력만 있으면 사진을 비웃는 듯싶은 극렬한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실제의 소재 및 대상과 마주한 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애써 고집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사실주의 회화에서는 인체소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사실주의 미학이 요구하는 조형적인 이상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소재 및 대상과 마주하여 실제에 필적하는 숙련된 묘사력을 반드시 갖추어야만 한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 타고난 손의 기술과 정확한 눈만 있으면 기존의 사실주의 회화보다도 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는 디지털 사진이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미 디지털 카메라를 소유한 인구가 1천 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사진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가정에서도 한 두 대의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대다수는 기념사진을 찍는다거나 여행할 때 기념촬영을 하는 정도의 용도에 국한했었다.

그런데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카페 및 블로그를 중심으로 사진의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핸드폰에 카메라 기능이 주어지면서 사진은 이제 현대인의 일상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 셈이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디지털 사진이 없으면 교류나 소통이 되지 않을 정도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모두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부터 비롯되는 일이다. 따라서 컴퓨터에 익숙한 이들로서는 사진과 관련한 그 어떤 이미지를 보더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쩌면 근래 미술계에서 사진작업이 유행하고 있는 현실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디지털 사진이 보편화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사진에 대한 논쟁은 뜨거운 감자였다. 다시 말해 일부 미술가들 사이에서도 사진이 진정 예술일 수 있느냐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기계가 만들어낸 산물이니 예술일 수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촌사람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그 만큼 사진은 현대인의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래서일까. 미술계에도 밀려드는 변화의 물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어느새 사진에 대한 예술성 여부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진부한 논쟁이 되었다. 사진작업이 새로운 미술의 흐름, 그 대세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부 사진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현대미술의 선두에서 각광받고 있다. 사진작업이 갑자기 미술계의 주류로 부상하는 현실이 된 것이다. 이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급물결을 주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디지털 사진술이다. 디지털 사진술은 가히 만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디지털 사진술에는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듯싶다. 적어도 원하는 이미지를 얻고자 했을 때 모든 것이 가능하기에 그렇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다보니 시대의 흐름에 민감한 화가들도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사진전공자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회화나 조각을 전공한 작가들이나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선다. 보이는 사실뿐만 아니라 조형적인 상상력을 동원, 새로운 형태의 사진작업에 빠져들고 있다.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의 시비로부터 자유로운 순간, 명민한 감수성을 지닌 작가들은 사진으로부터 새로운 영감 및 예술적인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사진작업은 전통적인 시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새로운 표현에 목말라하던 열정적인 작가들의 상상력을 부단히 자극하고 있다. 새로운 개념의 사진작업은 무엇보다도 포토샵을 이용하거나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이미지의 변조라는 방식으로 전통적인 사진의 영역을 벗어남으로써 보다 풍부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현대미학의 입장에서 볼 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조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형태의 사진작업이 각광받고 있는 현실 이면의 풍경이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미학을 추종해온 화가들 집단은 순식간에 들이닥친 변화의 물결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타고난 감수성과 노력, 그리고 정확한 눈과 사실적인 묘사력을 바탕으로 사실주의 회화의 일익을 담당해온 화가들은 예측 못한 변화에 당황하고 있다. 즉, 사진을 이용하는 극사실적인 회화가 풍미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보인다. 인체소묘로부터 차근차근히 묘사력을 갖추는데 심혈을 기울여 온 그들로서는 어느 순간, 사진에 필적하는 묘사기술로 무장한 젊은 세대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는 현실에 직면하여 회화에 대한 이념적인 혼란을 겪게 된 것이다. 최근에 각광받는 젊은 작가들을 보면 정밀한 극사실적인 묘사력에 관한 한 더 이상 주문할 것이 없을 정도이다. 여기에서 기존의 사실주의 작가들이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일부 사실주의 화가들도 시대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 하나의 방법이 디지털 사진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입장이다. 실제로 일부 작가들은 디지털 사진술을 이용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을 정도이다. 포토샵으로 사진을 보정하여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방법을 구사하는가 하면, 일부 작가는 사진을 찍어 희미하게 캔버스에 전사한 뒤 그 위에 그대로 채색작업을 덧붙이는 방법을 취한다. 어느 방법이든지 눈으로 보고 직접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기술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사실주의 기법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러한 방식은 전통적인 사실주의 미학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사진을 찍어 캔버스에 확대하여 인화한 뒤 사진의 이미지를 그대로 따라 그린다는 행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예술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러한 최근의 경향을 보면서 작가들 사이에서는 물론이요, 미술애호가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을 보고 그대로 재현하거나 또는 사진 이미지 위에다 사진과 똑 같이 그리는 것이 무슨 예술이냐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과거 회화의 입장에서 사진을 예술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단순히 보수적인 시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일리 있는 항변이기 때문이다. 오직 손에 의한 그리기만을 회화적인 가치라고 교육받아온 입장에서 볼 때 사진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진을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의 숫자는 크게 줄어들고 있다. 더구나 사진작업이 유행하는 현실로 보아서는 사진에 대한 반감은 공연한 트집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 만큼 세상이 많이 변했고, 미학개념도 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캔버스에 전사하여 그 위에 그대로 묘사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한마디로 작가의 개인적인 미적 감각이나 정신이 들어가 있지 않다고 보는 까닭이다. 실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시간적인 여유 없이 기계적인 사진기술에 의탁하여 사진과 동일하게 묘사하는 것은 단지 손재주의 산물일 뿐이라고 생각할 소지가 많은 것이다. 즉 화가의 감정과 정신, 즉 마음이 들어가 있지 않기에 거기에는 결코 감동적인 요소가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와 같은 지적은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 보면 사진 이미지 위에 그대로 묘사한다고 해서 화가의 마음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진을 예술로 인정한다면 화가가 잡아내는 앵글에는 이미 화가의 미적 감각과 마음이 담긴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진 위에 물감으로 묘사하는 과정에서도 감정을 배제한 채 작업한다고는 할 수 없다. 비록 전체적인 균형이나 비례, 조화, 통일 등 조형적인 요소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캔버스에 전사된 이미지만을 그대로 따라 묘사할지언정 색채이미지에서만큼은 작가의 미적 감각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사진의 색감을 그대로 따른다고 할지라도 화가 개개인의 주관적인 색채감각 및 색채감정이 있게 마련이어서 어떤 식으로든지 그림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기능적으로 묘사하는 상업화와 비교한다면 어떨까. 상업화는 작가의 마음이나 영혼 또는 주관적인 색채감각을 배제한 채 오직 정해진 묘사규칙을 따를 뿐이므로 당연히 심미적인 관점과는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를 따름이다. 다시 말해 예술성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화가의 그림은 아무리 사진을 놓고 그릴지라도 어느 부분에서나 주관적인 미적 감각이 담기기 마련이다. 설령 그것이 극히 미미한 수준일지라도 작가로서의 의식 및 미적 감각 그리고 주관적인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설령 이러한 현실을 인정한다 치더라도 전통적인 미학개념을 준수하는 기존의 사실주의 작품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디지털 이미지를 이용하는 최근의 경향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지 싶다. 거기에는 시각적인 놀라움은 있을지언정 영혼을 울리는 감동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새로운 미학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오랜 동안 전통미학에 길들여져 온 심미안을 납득시킬 만한 예술적인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미술신문 제 442호(2010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