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58) - 서예, 그 무한한 조형의 땅

펜보이 2010. 10. 12. 08:59

 

서예, 그 무한한 조형의 땅

 

신항섭(미술평론가)

 

세계의 흐름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 이동 속도는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아주 빠르다. 이는 경제부흥을 표방하는 중국의 개방 및 개혁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일본은 최근에 중국에 추월당하고 말았지만 이미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의 지위를 누렸고, 한국을 비롯하여 대만,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등의 경제발전도 세계적인 주목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최근에는 인도가 여기에 가세함으로써 아시아대륙의 경제활동은 성장일로의 상황이다. 미래학자들의 예측이 아니더라도 활기를 잃은 서양과 달리 아시아권은 경제적인 성장 잠재력이 큰 지역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제적인 상황만을 보더라도 서구중심의 역사가 동양중심의 역사로 전환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경제가 활성화되면 문화예술도 더불어 활기를 띠게 된다. 물질적인 부를 기반으로 문화예술이 꽃 피우는 까닭이다. 먹고살기에 바쁜 상황에서 예술은 사치일 따름이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고상한 정신 및 고양된 감정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예술은 무엇보다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선진국의 면모는 단순히 부의 축적이나 군사력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수준 높은 문화예술이 병행되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 국가들이 경제발전을 앞세워 선진국 진입을 희망할지라도 경제력에 상응하는 수준 높은 문화예술이 뒤따르지 않으면 결코 선진 국민으로서 대접받을 수 없다. 설령 부러워할 만한 부를 축적했을지라도 고상한 인격 및 행동거지가 따르지 못하면 졸부신세를 면할 수 없듯이, 고급한 문화예술을 향유하지 못하면 ‘경제동물’이라는 낙인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선진문화를 흉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래봤자 결과적으로 남의 발을 씻어주는 신세가 되고 말기에 그렇다. 따라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남이 가지고 있지 못한 문화적인 장점을 찾아내 발전시켜야 한다. 고유의 전통문화 및 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이야말로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움 없는 떳떳한 내 얼굴을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문화 및 예술일지라도 독창적이고 아름다워야 한다. 뿐만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감동을 받을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부여해야 한다.

아시아 국가들은 서구보다 오랜 문화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낙후되어 있었던 까닭에 우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전통문화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이 안정됨에 따라 전통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아시아권을 넘어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한류’의 중심에는 한국적인 전통문화가 자리한다. 한국적인 문화 및 정서를 바탕으로 현대적이면서도 세련된 미적 감각을 창출함으로써 동양적인 신비스러움 및 환상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동양예술 가운데 서예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동양 고유의 예술양식인 서예는 문자언어를 예술적인 영역으로 승화시킨 경우이다. 주지하다시피 한자의 근원은 상형문자인데, 상형문자는 실제상의 축약이고 함축이며 상징이다. 그러고 보면 한자는 오늘날의 약화 형식과 같은 개념의 언어라고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그림이나 다름없다. 즉 실재하는 형상을 부호와 기호 또는 도상으로 표현함으로써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체계를 가지게 되는 까닭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글씨문화, 즉 서예는 종주국인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그리고 일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는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로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단순히 의미전달을 위한 글씨로써 뿐만 아니라 그 형태적인 미를 중시하여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서예이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시각을 지닌 지식층의 연구 및 창의적인 발상으로 서예는 독자적인 예술의 장르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중국과 한국을 대표하는 명필들의 유묵을 보면 조형미에서 결코 그 어떤 회화양식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서예가 그림에 연원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적인 가치, 즉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결과이다.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5체가 존재하는 것도 예술성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구태여 다양한 서체를 개발하게 된 것은 예술적인 표현에 대한 욕구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오랜 세월 동안에 걸쳐 이루어진 형태적인 진화의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서나 전서가 그리고 초서가 여전히 전문적인 서예를 통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실용성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예술적인 가치를 중시한 결과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서예가 가지고 있는 조형적인 잠재가치를 깨닫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서구에서는 이미 2차 세계대전 전후에 한자의 서체에서 조형적인 가치를 발견, ‘캘리그라피라’는 명칭의 표현양식을 만들어냈다. 한자를 쓰는 방법, 즉 일회적이면서도 직관적인 필법을 원용하여 새로운 개념의 공간 및 동적인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서예의 행위성과 관련해 볼 때 글쓰기는 신속함과 리드미컬한 운동성 그리고 여백이라는 공간 개념을 제시한다. 이와 같은 방법은 일찍이 서구회화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조형어법이었다. 따라서 서구 화가들은 서예라는 동양예술을 통해 ‘캘리그라피’라는 새로운 개념의 현대회화를 창안할 수 있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서예는 단순히 문자언어로서의 기능, 즉 의미 전달을 위한 글쓰기에 그치지 않고 회화적인 표현이라는 또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는 애초에 한자가 상형문자, 즉 그림 글씨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쉽다. 한자의 서예는 태생적으로 회화적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명필 유묵을 보면 그 의미내용은 차치하고 조형적인 측면에서도 도무지 흠 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작품이 적지 않다. 특히 전서나 예서 그리고 초서로 쓴 유묵은 현대회화와 함께 놓더라도 조형적인 아름다움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고상한 정신세계를 추구한 탓에 예술작품으로서의 격조는 한층 높다. 다시 말해 현대회화가 간과하고 있는 심미 세계는 더욱 심오하다.

그런데도 현대 서예는 오히려 과거보다 못하다. 서예 인구는 증가하고 있는데도 실제 그 내막을 보면 되레 퇴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한자를 쓴다는 행위가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일이 된 현실적인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치열한 자기와의 대결을 통한 새로운 필법의 연구 및 창안을 위한 노력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안일하게 스승의 글씨를 그대로 좇거나 안주하는 듯싶은 자세로 일관한다. 눈 밝은 이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이 시대의 명필이 나오지 않는 현실이 답답할 따름이다.

예술이 반드시 실용적인 가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실용성과는 다른 길, 즉 숙련된 신체적인 기술과 고결한 인간 정신이 결합함으로써 비롯되는 격조 높은 미적 가치야말로 실용성과는 다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수묵이 가지고 있는 명료한 시각적인 인상은 그 어떤 그림보다도 더욱 명쾌한 지적 성찰 및 감정의 고양을 유도한다. 하얀 종이 위에 검정색으로 명백하게 자리하는, 그 차갑고도 선명한 존재감이야말로 내적인 축적을 통한 심상의 현현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와 같은 서예만의 독보적인 예술적인 표현 영역을 글씨에 국한하지 않고 좀 더 확대 해석하여 조형의 영역으로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 한자나 한글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가치, 즉 세상의 이치와 인간 삶을 형용하는데 필요한 문자언어로서의 기능과 더불어 형태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통해 서예의 또 다른 면목을 살려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각 및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서예 및 문인화의 현대화 또는 서예의 회화화라는 기치를 내건 ‘물파운동’은 필묵의 현대적인 방법론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동강령을 제시한다. 따라서 정체상태에 있는 한국 서예는 물론이려니와 문인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나석 손병철 박사에 의해 주도되는 ‘물파운동’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서예 및 문인화에서 ‘자기 글씨, 자기 그림’을 그리자는 창작의 주체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전의 누군가가 닦아 놓은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심인에 의한 자발적인 창작활동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잠재적인 창의력을 계발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집단적인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자기실현을 위한 개개인의 욕망이 증폭되고 그에 따른 노력, 즉 창의적인 사색과 실천적인 행동이 뒤따를 때 서예 및 문인화는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조형예술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미술신문 제440호(2010년 9월10일자) 게재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