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항섭 중국풍경사진 초대전
“잔영 殘影”
신항섭(미술평론가)
중국에 다니기 시작한지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에 중국은 정말 이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비록 바다가 가로막혀 육로통행이 불가능할지언정 비행기를 타고 1시간30분이면 북경과 상해 땅을 밟을 수 있다. 돛단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다시 육로로 이동하더라도 수 주일에서 한 달은 걸렸던 옛사람들을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다. 비행기로 인해 시간 및 공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단축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의 거리가 불과 1시간30분이라는 현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처럼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것은 과학의 혜택이라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반세기 동안 왕래가 전혀 없었던 양국국민이 이제 이웃집 드나들 듯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양국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간 및 공간의 변화는 중국의 눈부신 국가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놀라운 압축 성장은 세계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정도이다. 눈부신 압축 성장을 상징하는 상해 푸동 신도시의 마천루들을 바라보노라면 잠에서 깨어나 용틀임하는 용의 거대한 자태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과연 스스로가 놀랄 만큼 진정한 경제대국으로 급변하고 있다. 그처럼 빠른 국가발전을 가능케 한 근본적인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중국을 오가면서 이런 자문을 거듭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일관된 경제정책을 이끄는 정치적인 안정과 5천년 역사의 문화적인 전통이 가장 큰 성장버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야말로 세계중심이라는 오랜 중화사상에 근거하는 국가 및 국민적인 자존심 또한 성장의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자와 맹자, 노자, 장자 등 뛰어난 사상 및 철학자들이 일구어 놓은 동양철학의 원류라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중국 도처에 있는 박물관을 돌아보면 중국의 압축된 성장이 우연이 아니라 바로 뛰어난 문화예술의 전통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해에 갈 때마다 그 인근 지역에 산재한 옛 전통마을을 자주 들러보게 된다. 특히 항주 및 소주를 비롯하여 시탕, 펑징, 조우좡, 통리는 수백 년에서 1천년에 이르는 오랜 전통마을들로서 수로(운하)를 중심으로 형성된 특이한 생활환경을 가지고 있다. 물은 배라는 가장 손쉬운 교통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수로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이야 육로를 이용하는 자동차가 운송수단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옛날에는 배야말로 자동차에 버금하는 특급 운송수단이었다. 배를 이용하는 운송수단은 이 지역에서는 지금도 아주 유용하다.
어쩌면 옛 전통마을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은 아마도 배를 이용하는 운송수단이 여전히 유용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배라는 운송수단을 갖게 되면서 수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들 전통마을은 현대문명과는 동떨어진 세계처럼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마을이 현대문명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현대문명 속의 섬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단지 외부에서 보는 시각일 뿐, 현대문명과 교묘히 공존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들 마을사람들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물론 전자제품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이들의 삶도 현대문명의 중심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생활방식 및 습관 그리고 풍습에서는 전통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수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크게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 지역은 외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관광지가 되면서 외면상으로는 혼란스럽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에 큰 불편을 느끼지 못하면서 옛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 수로 양편으로 줄지어 서듯 자리한 상가는 관광 상품을 파는 가게들로 채워져 일부는 옛날 상점이 그랬듯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된 생활용품 및 전통음식을 팔고 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 시간 및 공간이 정지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수백 년에서 1천 년이 넘는 세월의 때가 집 안팎은 물론 수로 주변 곳곳에 거짓 없이 남아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유지돼온 생활방식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일이다. 현대문명이 가져다준 편리한 생활에 대한 관심은 이곳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전통적인 습속을 크게 불편하게 느끼지 않는 듯싶다. 이들의 삶도 이제 관광산업의 침투로 인해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표면상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난개발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이들의 전통적인 생활공간이 침해받을 위험이 점차 증가되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외부적인 침입에 의해서든, 아니면 내부적인 갈등에 의해서든 전통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약화되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삶을 지켜온 노년층이 사라지는 시점에서는 전통적인 삶의 습속도 박제되어 한낱 관광 상품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들 전통마을을 돌아보면서 이처럼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일지라도 그를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에게는 감동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전통의 소중함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냥 일상적인 생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전통을 지키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는 어쩌면 이곳에서 살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부딪치고 있는 현실적인 갈등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와 같이 외부에서 바라보는 이들 전통마을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들의 삶의 풍습이야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으나, 단지 눈에 보이는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현대적인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전통적인 가옥이 옹색하게 보일지 모르나, 오랜 세월이 만들어낸 고색창연한 때깔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가옥구조는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다. 고태가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그 안에 면면이 이어져온 옛 사람들의 따스한 숨결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오랜 가옥들의 주인에게도 꿈과 사랑과 희망과 낭만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시를 음송하고 악기를 연주했을 것이다. 누군가들은 마작을 하고, 누군가들은 바깥세상 얘기를 자랑삼아 들려주고 있었을 것이며, 누군가들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놓고 술과 차를 마시며 이웃의 선행을 칭송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들은 출세한 자식덕분에 꽃가마를 타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관혼상제가 끊이지 않아 마을은 온통 즐겁고 슬프고 기쁘고 화나는 일들로 언제나 소란스럽고 북적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관광차 들르는 입장에서는 그런 전통적인 삶을 체험하거나 공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전통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기에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삶의 정경들이 지속적으로 펼쳐질 것이다. 그러한 실제적인 정경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이자 우리가 보는 풍경 그 이면의 진면목일 것이다. 고색창연한 이들 마을의 외양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그 안에서 전개되는 전통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삶의 정경을 상상하곤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단지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복사하는데 그칠 뿐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중국의 5대 정원은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화를 상징한다. 외부와 차단된 벽 안쪽에 꿈처럼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놓고 신선처럼 살았던 사람들은 꿀맛 같은 부귀영화에 흐르는 시간을 안타까워했으리라. 하지만 이제 그곳의 주인들이 누렸던 부귀영화도 한낱 물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흩날리는 꽃잎 하나의 무게에도 그 모습이 흐트러지고 마는 물그림자의 덧없음이야말로 인생무상에 대한 비유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에 비하면 오밀조밀 어깨를 맞대고 줄지어선 서민들의 삶의 공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희로애락이 담긴 소박한 삶의 일기장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부귀영화는 아예 꿈조차 꾸지 않고 그저 주어진 삶에 자족하는 서민들의 삶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구름다리 위로 올라 내려다보는 자잘한 기와지붕은 오랜 세월의 풍상에다 삶의 온기가 덧입혀져 사람이 살지 않는 화려한 옛 정원과는 전혀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기와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가 습한 공기와 만나 수로를 따라 그윽하게 내려앉는 저녁시간이면 소란스럽던 수로주변은 다시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려진다. 기와지붕 안쪽에서는 식탁에 둘러 앉아 소찬에 즐거워하는 소소한 일상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수로에 비치는 선명한 물그림자도 물안개처럼 스며드는 어둠에 자리를 내주고 스스로 모습을 거두어들인다.
그렇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어쩌면 허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냥 표피만 훑는 식의, 온기가 흐르는 삶의 내용이 담기지 않은 풍경이라면 박제와 다를 바 무엇이랴. 따라서 박제와 같은 풍경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늘이나 그림자 혹은 습한 공기 속에 스며있는 삶의 애환을 포착하고자 노력했다. 그러기에 밝은 햇빛에 선명히 드러나는 창백한 풍경을 피했다. 고색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낱낱이 드러나는 풍경에서는 이물질이 덮여 있는 듯싶은 기분을 지울 수 없기에 그렇다. 진정한 고색은 다름 아닌 그늘이나 그림자 혹은 습한 공기와 더불어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신항섭 중국풍경사진 초대전"은 2010년6월11일부터 6월30일까지 상해 '五角場800'(우지아오창) 4층 木林畵廊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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