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이야기

오디오 이야기 (16) - '깨끗함' '차가움' 그리고 '고요함'

펜보이 2008. 5. 19. 00:05

 

"콘트라베이스 3" 스피커(초고역과 중고역에 다이아몬드 유닛을 장착한 사운드포럼 최신 제품)

 

 

깨끗함’, ‘차가움’ 그리고 “고요함”

 

신항섭(미술평론가)


현대 하이엔드 오디오의 성향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가 있다. ‘클린 앤 쿨’이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깨끗함’과 ‘차가움’이다. 현대 하이엔드의 소리는 대체로 이 두 가지 성향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깨끗함’은 티가 없이 맑은 소리를 말하며, ‘차가움’은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기계적인 소리를 말한다. ‘깨끗함’은 일테면 이런저런 노이즈(잡음)가 들리지 않는 소리이기도 하며, ‘차가움’은 너무 분석적이거나 해상도가 높은 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 ‘클린 앤 쿨’이라는 용어는 현대 하이엔드 오디오가 추구하는 음질 성향을 명쾌하게 짚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하이엔드는 여기에 한 가지 용어를 더 추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사일런트’, 즉 ‘고요함’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하이엔드는 ‘클린 앤 쿨 앤 사일런트’라는 용어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느냐의 여부가 관건이다. ‘사일런트’, 즉 ‘고요함’ 또는 ‘정적’이라는 개념은 지금까지의 ‘클린 앤 쿨’이라는 느낌과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비롯된다. ‘클린’이나 ‘쿨’은 음질 성향으로 파악되는데 반해 ‘사일런트’는 용어 그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의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디오는 소리로 그 존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리와는 반대 개념인 묵음, 즉 소리가 없는 고요한 상태가 하이엔드의 조건이 되고 있다는 것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소리로써 말하는 오디오에서 소리가 없는 정적이라는 것은 이야기 자체의 성립요건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음악이란 결과적으로 음표의 연속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 아니던가? 오선지 위에 그려지는 갖가지 음표가 악기를 통해 소리를 얻게 되는 것이 음악이다.

악보에 그려지는 음표는 그 기호가 지정하는 음의 높이를 재현할 것을 요구한다. 악보의 음표는 어떤 악기일지라도 동일한 절대음의 가치를 재현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악보를 준수하는 음악가들에게는 허물 수 없는 하나의 굳건한 약속이다. 그 약속을 통해 서로 다른 악기들, 서로 다른 연주자들이 하나의 음으로 통일된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악보가 지정하는 음표는 고유의 음의 높이를 가지고 있어 어떤 상황에서도 불변이다. 높은음자리에서의 ‘도’는 불변의 음의 가치를 지니고, 낮은음자리에서의 ‘도’ 역시 불변의 음의 가치를 지닌다. 이는 악보의 음표에 부여된 약속인 것이다.

악보의 음표에 따른 저마다의 음이 연속적으로 연주됨으로써 음악이 만들어진다. 만일 음표 하나하나가 연속적으로 연주되지 않고 단속적으로 울린다면 음악이 성립되지 않는다. 악보에서 음표는 마치 계단을 오르내리듯 그려지고 있으며, 그 음표의 높낮이에 의해 선율이 만들어지고, 음표에 박자를 부여함으로써 변화무쌍한 아름다운 음악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음표라는 약속된 기호는 높낮이가 다르다. 높낮이가 다르다는 것은 음표들 하나하나의 음의 크기 및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높낮이가 다른 음표는 악기에 의해 연주되지 않는 단지 기호로만 존재할 따름이다.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하나의 전제는 악보 위의 음표는 높낮이가 다른 만큼 그 층위에 따른 갭, 즉 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갭이란 일테면 서로 다른 음표와 음표에 고유의 음의 높이 및 길이를 명시함으로써 음표 하나하나에 독립성을 보장하는 경계인 셈이다. 시각적으로도 음표 하나하나는 그 모양새가 다르다. 서로 모양이 다른 것은 음의 길이가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그 길이가 다른 음표 간의 경계에는 당연히 묵음이 존재한다. 피아노를 예로 들자면 ‘도’와 ‘레’는 이웃사촌임에 분명하지만 음의 높이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악보에 주어진 음표에서 ‘도’와 ‘레’를 연속적으로 연주를 하게 될 경우 그 높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청각으로는 갭이 메워지는 것처럼 들린다. 다시 말해 실제의 연주에서 ‘도’와 ‘레’는 높낮이의 차이를 극복한 채 하나의 음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높낮이가 다른 음표를 연속적으로 연주함으로써 비단실처럼 이어지는 아름다운 음악이 만들어진다.

이는 거꾸로 생각하면 음표와 음표 사이에는 엄연한 공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공백이야말로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일런트’, 즉 ‘고요함’ 또는 ‘정적’을 의미한다. 정적은 음악이 흐르지 않는 순간을 말한다. 음표와 음표 사이는 분명히 간격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실제의 연주에서도 음의 높낮이가 완전히 다른 키를 통해 음표가 지정하는 고유의 소리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는 시청을 통해 명료하게 분별할 수 있는 일이다. 절대음감의 소유자는 어떤 키를 선택하더라도 감지해낼 수 있다. 이는 음표마다 고유의 음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러기에 음악에서 완전한 연속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음악이란 단속음의 연결이고 연속일 뿐이다. 인간의 청각은 단속음의 연결이고 연속인 음악을 마치 물이 흐르는 듯 끊이지 않는 연속음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키로 바뀌는 순간순간, 즉 현재의 키에서 새로운 키로 넘어가는 순간에는 일시적으로 음이 끊긴다고 볼 수 있다. 음이 끊기는 그 순간이 다름 아닌 ‘사일런트’, 즉 ‘고요함’이고 ‘정적’인 것이다.

최첨단의 기술을 적용하는 현대 오디오는 음표와 음표 사이의 ‘고요함’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말하면 현대 하이엔드는 음악을 연속음으로 만들지 않고 단속음으로 만드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그렇지 않다. 연주자에 의해 연주되는 음악은 어떤 경우에도 단속음의 연결로 들리는 일은 없다. 음표의 층위가 큰 폭의 음악일지라도 연속음으로 들린다. 고저의 선율과 장단의 박자가 조화를 이룸으로써 청각상 유려한 음악의 아름다움에 빠져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음악 연주를 재생하는 오디오는 실제의 연주환경과 다른 조건에서 연주를 재현하게 된다. 전자기계 장치라는 오디오는 실제의 연주를 저장매체에 저장해 두었다가 재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오디오는 과학의 산물이기에 그 기기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연구자 및 생산회사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로 나타난다. 음원은 하나이고 그 음원을 저장하는 매체가 동일할지라도 그를 재생하는 장치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음악이 되는 것이다. 재생장치, 즉 오디오에 따라 실연을 방불케 하는가 하면, 실제와는 완연히 다른 소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오디오의 변수란 바로 이것이다.

실제의 음악연주에서 ‘사일런트’ 즉 ‘고요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 것은 어쩌면 최근의 일인지 모른다. 아주 민감한 최근의 하이엔드 오디오가 이와 같은 사실을 일깨워준 셈이다. 음표와 음표 사이를 청각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경우는 피아노음악이다. 음표가 지시하는 키를 정확히 치면 고유의 음을 내게 된다. 설령 같은 ‘도’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더라도 피아노는 키는 음표의 숫자대로 정확히 소리를 낸다. 그리고 서로 다른 키를 동시에 두드리지 않는 한 음표의 음이 중첩되는 일은 없다. 피아노가 모든 악기를 통합하는 기본음이 되는 이유도 음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디오에서 피아노 음악을 재생할 경우 음표의 높낮이에 따른 변화를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지만 결코 단속음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피아노의 현이 공명을 일으켜 음표와 음표 사이의 간격을 메워 주는 까닭이다. 이러한 음의 공명 현상은 모든 악기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장단의 차이는 있을망정 모든 악기는 어떤 식으로든지 공명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음악을 들으면서 음이 끊긴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도 공명음 때문이리라.

공명음이 음표와 음표 사이의 갭을 메워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두 개의 음표를 동시에 두드리지 않는 한 음표와 음표의 층위에 따른 간격이 존재하는 것 또한 분명하다. 현대 하이엔드는 이와 같은 음표의 층위에 따라 발생하는 음의 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필자가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디오 재생음의 속도가 기기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감지하고부터였다. 필자가 처음으로 속도의 빠르기를 느끼게 된 것은 골드문트 시스템을 들었을 때였다. 다른 메이커의 시스템과 분명히 다른 속도감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 후 필자의 시스템에서 음의 속도를 실감하게 된 것은 관음음향의 파워케이블, 즉 극저온 처리를 하고 이온을 주입한 신기술의 파워케이블을 사용했을 때였다. 그 후 역시 이온주입 및 극저온 처리를 한 DA컨버터를 통해서 속도가 빨라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 때 그 빠른 속도감과 함께 알듯 모를 듯한 ‘정적’을 체험하게 됐다. 그 느낌이 순전히 청각상의 착오인지는 모르지만 이전의 재생음악과는 어딘가 다르다는 기분이었다. 오디오에서 재생음악이 빨라지고 느려지는 차이는 물리학에서 충분히 규명할 수 있는 일이다. 오디오에는 저항과 콘덴서를 비롯하여 진공관 트랜지스터 그리고 전기선 등 수많은 부품이 연결되어 전기가 통과하게 된다. 이 부품들의 재료에 따라 전기 전달 속도가 달라진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고 보면 전달물질의 재료, 즉 전도가 빠른 부품소재를 사용하게 되면 전기로 전해지는 음악신호 또한 빨라지리라는 예측은 억지가 아니다.

이렇게 보면 필자가 감지한 ‘정적’이란 결코 청각의 착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최근 사운드포럼 김태형사장은 자사 제품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여백’이란 용어를 썼다. 김사장이 말하는 ‘여백’이란 필자가 생각해온 ‘정적’과 같은 소리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여백’이란 비어 있다는 말인데, 이는 소리가 없는 완전한 묵음 상태의 ‘공백’을 의미하는 것과는 다르다. ‘여백’은 비어 있되, 아무 것도 없는 텅 비어 있는 공백이 아니라, 음의 실체감이 존재하되 단지 없는 듯싶은 찰라적인 휴지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적'을 실제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아주 빠르게 연주되는 음악을 들어야 한다. 가령 기타곡이나 바이올린곡 중에서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연주에서 '정적'의 실체가 드러난다.
‘여백’은 동양의 회화에서 흔히 쓰는 용어로서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았으나, 그려진 이미지의 상대적인 공간으로서, 그려진 이미지의 실체감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오디오 재생음악에서 말하는 ‘여백’이란 용어 또한 음표가 만들어내는 재생음과 재생음 사이에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간격에서 일어나는 휴지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이러한 추측이 맞다면 필자가 느낀 ‘사일런트’ 즉 ‘고요함’이나 ‘정적’은 ‘여백’과 동일한 소리의 개념인 것이다. 

필자는 다이아몬드 트위터와 아큐톤 미드렌지 그리고 에톤 우퍼로 구성된 ‘탄호이저’라는 스피커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소스부터 스피커 내부선까지 모두 문도르프 실버골드 및 은도금한 LAT 단심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파워케이블은 전기한 대로 이온주입 및 극저온으로 처리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구성된 시스템을 사용하면서 문득문득 ‘정적’을 체험하고 있다. 특히 자정 이후 세상이 고요한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을 때 음악을 들으며 ‘정적’을 음미하게 된다. 그 ‘정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며, 또 시스템 중에서 ‘정적’을 가능케 하는 실질적인 역할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왔으나 명료하게 그 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과정에서 며칠 전 마산의 열렬한 오디오마니아인 권환주사장 댁을 방문하게 됐다. 사운드포럼에서 발주한 5센티미터 중고역 담당의 다이아몬드 유닛을 채용한 4웨이 6유닛의 ‘콘트라베이스 3’를 시청하기 위해서였다. 단적으로 말해 송영무, 김준호 두 평론가와 동행한 이날 방문에서 ‘정적’의 실체를 확인함과 동시에 과연 하이엔드의 어느 부분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세계에서 최초로 아큐톤의 5센티미터 다이아몬드 유닛을 채용한 ‘콘트라베이스 3’는 상상을 초월하는 소리를 쏟아냈다. ‘콘트라베이스 3’는 에소테릭 분리형 플레이어 - 마크레빈슨 32L 프리 - 전원부와 증폭부를 분리한 4덩이의 에이프릴 모노파워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간단히 주도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놀라운 체험이었다. 중고역을 담당하는 5센티미터 다이아몬드 유닛이 채용된 ‘콘트라베이스 3’는 상기 시스템에서조차 나올 수 있는, 이런저런 트집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극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재생음은 이제까지 그 어떤 하이엔드 시스템에서도 들을 수 없는 박진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힘의 과잉이 아니었다. 그 박진감의 정체는 힘이라기보다는 속도감, 즉 빠른 반응이었다. 무서운 속도감으로 반응하는 다이아몬드 및 세라믹의 아큐톤 유닛은 눈부신 광채와 같은 빛나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하게 만드는 사실성에 앞에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사실이 그랬다. ‘콘트라베이스 3’와 만나는 동안 ‘정적’이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를 알 수 있을 듯싶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기전도 속도와 광대역, 그리고 스피커의 반응 속도이지 싶었다. 스피커 유닛은 재질에 따라 반응속도가 다르다. 콘지와 필름, 알루미늄, 베릴륨 따위의 재질은 그 경도에 따라 재생음의 파장도 다르게 나타난다. 유닛의 재질이 강한, 즉 경도가 높은 재료일수록 반응속도가 빠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초고역 및 고역을 담당하는 기존의 2센티미터 다이아몬드 트위터를 비롯하여 고역 및 중역을 관장하는 5센티미터 다이아몬드, 그리고 중역과 저역을 장악하는 세라믹 유닛으로 구성된 ‘콘트라베이스 3’는 현존하는 스피커 가운데 반응속도가 가장 빠른 스피커라는 사실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콘트라베이스 3’를 통해 ‘고요함’ 또는 ‘정적’의 실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 권한주사장의 시스템에서 들을 수 있는 ‘고요함’의 많은 부분은 바로 ‘콘트라베이스 3’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앞에서 얘기했듯이 스피커만으로 ‘정적’이 가능해진다는 것은 아니다. 소스에서부터 프리 파워를 비롯하여 충실한 전원과 파워선 및 인터선 그리고 스피커 선에 이르기까지 전도 속도가 빨라야 한다. 또한 빠른 유닛의 반응과 더불어 저역 제어력 그리고 미세한 암소음조차 잡아내는 높은 해상력 및 분해력도 갖추어져야 한다. 이런 모든 조건이 하나로 통합되었을 때 순간적인 ‘정적’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정적’이란 ‘클린 앤 쿨’이라는 하이엔드의 기본조건 위에서 성립되는, 또 하나의 새로운 하이엔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