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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평 (49) - 영혼을 사는 유혹의 그림자

펜보이 2010. 6. 7. 08:11

미술신문 칼럼

 

영혼을 사는 유혹의 그림자

 

신항섭(미술평론가)

 

올해 봄에 열린 아트페어형식의 대형전시회들이 맥을 못 추고 있다. 아트페어 형식의 전시회는 일종의 미술시장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작품이 얼마나 많이 팔렸느냐가 성패여부의 바로미터이다. 한마디로 올해 봄 시즌에 열린 대형 아트페어는 모조리 실패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간신히 투자금액을 건졌거나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미 예견된 결과라고 할지라도 예년에 비해 더 나빠진 손익계산서를 받아들고 아트페어를 주최한 측이나 참가한 화랑 및 작가들은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불경기 탓이라고는 하지만 그동안 그림으로 생활해온 전업작가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작품이 팔리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중년층 이상의 미술애호가들을 전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입장객 숫자도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나마 출품작가들의 친척이나 지인을 빼고 나면 중년층 이상의 관람객들의 숫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학생층과 20대 직장여성들이 감상 차원에서 들르는 정도에 그쳤다는 것이다. 미술품 시장은 이처럼 최악의 국면에 놓여 있다. 그러기에 작가들이 살기 힘들다고 비명을 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비단 한국의 경우에만 국한된 어려움이 아니다. 수 백 년의 미술시장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구에서도 작품만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대다수의 작가들이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틈틈이 작업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직업 없이 작품만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힘든 일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국의 경우에는 그나마 미술인구 대비 적지 않은 수의 전업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물론 그 가운데서 문하생조차 두지 않은 채 오직 작품을 팔아 생활하는 진정한 프로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어디에선가 미술인들의 수입을 조사했는데 월평균 100만원 남짓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미술인들은 극빈층에 속하는 집단임을 알 수 있다.

미술들이 이런 힘겨운 상황에 내몰리게 되면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한 미국교포 여성이 화가들로부터 작품을 구입한 뒤 본인명의로 각종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상하는 등 해괴한 일을 저지르다 덜미가 잡힌 일이 발생했다. 심사위원을 매수하다 못해 이제는 아예 작품을 통째로 구입해 공모전 입상경력을 만드는 대담한 수법에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이런 부정적인 일들이 일어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미술계를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수요자가 있고 또 공급자가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한 작가들에게 접근하여 작품을 구입한 뒤, 문제 삼지 않을 것을 전제로 공모전에 출품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주대낮에 남의 작품에다 어찌 자신의 이름을 바꿔 넣어 공모전에 출품할 수 있겠는가. 돈은 누구에게나 외면하기 힘든 유혹의 대상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작가들에게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창작의 산고를 거친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이 이름을 바꿔 공모전에 출품하는 것을 묵인하거나 방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들을 두고 가난이 유죄라고 변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문제는 범법이라고 하기 이전에 도덕심이 결여된 데서 비롯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창작의 산물을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파는 일 자체는 도덕적으로 문제될 일이 없다. 자연스러운 상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창작품에 대한 고유의 권한을 돈을 받고 포기하는 것은 영혼을 파는 행위나 다름없다.

과거 대한민국미술전람회나 대한민국미술대전, 그리고 각종 민전으로 이어지는 공모전은 작가지망생들에게는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였다. 그러다 보니 미술대학을 졸업했을지라도 작가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공모전 입상경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신인들의 경우에는 스승이나 선배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에 따라 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해서는 스승이나 선배로부터 마지막 마무리 작업 단계에서 도움을 받는 일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조언을 해주는 정도는 큰 문제가 없겠으나 미흡한 부분을 고쳐주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이런 행위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사이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관행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아무리 마무리작업이라고 할지라도 남의 손을 빌려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정한 경쟁을 전제로 하는 공모전에서는 비신사적인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잘못된 관행이 오늘날과 같이 각종 공모전과 관련한 부정한 방법을 방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심사위원을 매수하는 일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 남의 손을 빌려 완성하여 공모전에 출품하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데도 각종 공모전에서 이와 유사한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예술의 길은 그야말로 고난의 길이다. 예술이 돈이 되고 쌀이 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다 작품이라도 팔려 생활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기대 밖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예술가들은 가난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며 창작의 길을 선택한다. 예술의 길로 뛰어들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각고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설령 그런 노력이 있더라도 누구나 꿈꾸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나던지, 남모르게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던지, 아니면 운이 따라야만 성공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른 바 돈과 명예를 한 손에 거머쥐는 소수의 스타작가 몇 사람을 선망하여 막연히 창작의 길로 뛰어드는 것은 진정한 예술정신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술가의 행로에서 우연한 성공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의 길이 반드시 성공으로 보상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지라도 예술창작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취감은 결코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대다수의 예술가들에게는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고행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예술의 꽃이 피려면 적어도 십년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사람마다 재능이나 감각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어서 수 십 년을 노력해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예술창작에 매료되고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그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예술창작은 일종의 마약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아무런 보상이나 대가가 따르지 않을지언정 예술창작이 주는 희열이야말로 마약과 같은 힘을 발휘한다.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창작의 유혹에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을 때의 희열 때문이다. 그 창작의 희열은 결코 돈의 가치로 계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설령 밥을 굶는 한이 있더라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적어도 창작에 몰두하는 그 시간만큼은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성취감 또는 행복감에 취할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예술가는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인지 모른다.

예술가도 가족이 있는 한 엄연한 생활인일 수밖에 없고 가족부양을 위한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예술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소수의 예술가는 돈과 명예를 누리기도 하나, 그것은 극히 일부의 얘기일 뿐 대다수는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기도 힘들다. 예술가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살기에는 현실적인 고통은 너무 크기만 하다. 예술가 자신의 성취감이나 행복감을 위해 지불하는 가족의 생활고는 너무나 혹독하다. 단지 예술가의 아내이고 자식이기에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가 자신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고 또 창작의 희열이 모든 현실적인 고통을 상쇄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창작활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가족은 그렇지 않다. 가족은 그 어떤 형태의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가난이라는 무거운 짐을 떠안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 자신은 창작의 희열로 모든 현실적인 고충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와 함께 하는 가족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자신의 생명과 같은 창작품의 소유권을 돈을 받고 포기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정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영혼을 저당하여 쌀을 바꾸는 행위 그 이면의 고통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자신의 정신과 육체의 분신인 창작품의 소유권을 팔아넘기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라도 정당화되거나 면죄되거나 미화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다름 아닌 영혼을 파는 일이나 다름없기에 그렇다. 전인미답의 유일무이한 창작품을 추구하는 예술가에게서 자존, 즉 영혼을 빼버리면 거기에 무엇이 남겠는가. 진정한 예술작품은 그 절반이 영혼의 무게일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담기지 않은 미술품은 가볍기 마련이다.

 

<미술신문 제437호(2010년 5월10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