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48) - 사실주의 회화의 어제와 오늘

펜보이 2010. 5. 23. 23:42

 

한국사실주의 회화의 어제와 오

 

신항섭(미술평론가)

 

한국미술에서 사실주의 회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지 않다. 현대미학이 풍미하는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이 시간에도 적지 않은 화가들이 화실에서 또는 자연과 마주하며 사실적인 묘사 중심의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실주의 회화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하다. 시대가 바꾸었는데도 여전히 전통적인 조형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다시 말해 자기진화를 모색하지 못한 채 그저 안일하게 전통적인 습속에 젖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에 진정한 사실주의가 존재하는가 하는 원론적인 의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사실주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진정한 사실주의 회화양식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그 뿌리가 허약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기법적인 사실주의 회화는 있어도 정신적인 사실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사실주의는 일차적으로 눈에 보이는 사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눈앞에 펼쳐지는 물상 또는 현실을 가감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진실하게 묘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실제를 방불케 하는 정확한 사실묘사야말로 사실주의 회화의 기본인 셈이다. 하지만 단순히 눈에 보이는 사실을 진실하게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사실주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실주의 정신이란 다름 아닌 화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관심이자 진실한 기록에 있기 때문이다.

광의적인 시각에서 사실주의 회화는 인물을 비롯하여 정물, 풍경 등이 장르 구분 없이 아우른다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사실을 진실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고전주의 회화처럼 과장된 명암기법이 용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지 실제에 육박하는 현실적인 감각이 반영되어야 할 뿐, 거기에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 더구나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실제 이상으로 미화되어서도 안 된다. 그저 담담하게 현실적인 눈으로 소재 및 대상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소재 및 물상의 정확하고 진실한 객관화를 위해서는 필연적인 요구사항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주의 회화는 정확한 관찰과 냉철한 시각이 요구된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그림은 엄격한 의미에서 사실주의 미학개념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한국화단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의 회화는 어쩌면 이러한 전통적인 개념의 사실주의 미학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형태만을 놓고 보자면 실제에 육박하는 사실성을 갖추고 있으나 그 내용에서는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탐미적인 측면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자세히 보면 어딘가는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작가 스스로 사실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적당히 타협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물론 이미 시대가 바뀌어 1세기 훨씬 이전의 미학을 그대로 계승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사실적인 묘사를 중심으로 하는 작가들 스스로는 리얼리스트임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실주의 조형개념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생각이다. 단지 형태만 사실적으로 묘사하면 곧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닐지언정, 그렇다고 해서 사실주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고도 할 수 없다. 편의적인 해석으로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구할 수 있는 소재, 즉 과일이나 꽃 그 밖에 생활기물을 적절히 배열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정물화일 경우에도 사실주의의 양식을 따르는 것일 뿐, 거기에 시대성이나 시대감각 또는 시대정신이 반영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냥 아름다운 정물화일 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시대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에서 요구하는 시대정신이란, 현실적인 상황을 압축하거나 상징할 수 있는 소재들을 선택하고 거기에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시대상을 압축하고 함축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야 한다. 사실정신이란 진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될뿐더러 시대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 즉 탐미적인 시각에 머물러 있는 정물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실주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오늘까지 한국화단의 사실주의 회화는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를 심각히 의식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유미주의에 머무는 것이 고작이었다. 유미주의, 즉 탐미적인 시각도 회화가 추구하는 이상의 하나이지만 현실적인 감각이 결여됨으로써 감정에 대한 호소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과 유리된 정적인 세계,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로 한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형적인 순수성이 반드시 회화적인 가치가 낮다고는 할 수 없다.

현실감각을 결여한 채 전통적인 기법만을 답습해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창작의 윤리성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창작이란 모름지기 부단히 새로운 조형세계를 추구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사실주의 회화 대다수는 사실묘사를 위주로 한 전통적인 표현양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자기고민이 없는 외형적인 사실주의에 한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은 어쩌면 진정한 사실주의 미학에 입각한 아카데믹한 미술교육의 부재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 않을까. 1910년대 일본 유학생을 통해 서양미술을 도입한 한국의 경우 진정한 사실주의 미학을 받아들일 기회가 없었다. 인상파 화풍이 일본화단을 풍미하고 있는 시대상황인데다 일본 미술교육 자체도 철저한 인체소묘를 기본으로 하는 아카데믹한 수업방식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본유학을 통해서도 진정한 사실적인 인체소묘 기술을 익히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한국화단의 사실주의 경향의 작품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개개인의 재능과 노력 그리고 정확한 눈으로 터득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실적인 묘사기법으로 사실주의적인 화풍의 그림을 그리는데 지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애초에 사실주의 미학개념을 충족시키는 인물화가 등장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한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한국화단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실주의 회화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설령 기초가 미흡할지라도 사실주의 정신을 구현하는 작품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실주의 미학을 구현할 필요성 또는 필연성을 갖지 못한 데 있다. 무엇보다도 생생한 인간 삶의 모습을 포착해야 할 당위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더불어 초상화 형식의 인물화는 있을망정 사실주의적인 시각, 또는 사실주의 정신을 구현하는 데는 관심이 없거나 기술적인 역량이 부족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현실을 직시하는 객관적인 시각, 즉 냉철한 관찰자적인 시각을 지닌 작가가 없었다. 초상화 형식의 인물화라는 지극히 협소한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초상화 형식의 인물은 미화되기 십상이다. 초상화 형식의 인물화란 대체로 기념비적인 인물화로서의 성격에 국한하고 있는 까닭이다.

좀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6.25 전쟁은 한국미술에 사실주의 회화가 꽃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지 모른다. 굳이 사실주의 회화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전쟁미술이라는 새로운 회화장르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처절한 동족상잔이라는 전대미문의 현실을 그대로 작품에 반영하였다면 사실주의 회화의 부재라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보다 더 현실적이고 진실하며 객관적인 시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을 리얼하게 포착할 기회가 어디 또 있을까. 동족끼리 벌이는 전쟁참상이야말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그 어떤 제재보다도 사실적인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극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기에 그렇다.

러시아의 일리야 레핀이나 바실리 수리코프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전쟁을 제재로 하는 대규모의 인물화는 그 어떤 문학적인 서술보다도 사실적인 감동이 크다. 역사화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대작을 보면 한 편의 대하드라마 또는 대서사시와 같은 내용을 하나의 화면 속에 압축하고 있다. 인물 하나하나의 표정에 부여한 극렬한 사실성이야말로 감동을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실주의 회화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드라마가 존재하는 인물화를 통해 사실주의 미학 그 핵심을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감동을 이끌어내는 극명한 사실적인 묘사는 치열한 사실정신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의 사실주의 작가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6.25라는 처절한 전쟁을 직접 체험하고서도 거기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감정이 없는 집단처럼 혹은 방관자처럼 행동했을 뿐이다. 리얼리스트라고 자처하면서도 왜 동족상잔의 비극을 그림으로 남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을까. 참담한 현실을 애써 외면했던가, 아니면 사실적인 묘사력과 인물구성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느 쪽이든지 사실주의 작가로서는 그 본연의 임무를 다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는 현실을 냉철하게 주시하는 객관적인 시각의 결여라고 할 수 있다. 유미주의에만 의존함으로써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이렇듯이 한국 사실주의 회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실주의 미학을 구현하지 못했다. 이처럼 사실주의 미학이 착상할 있는 여건 및 작가적인 관심의 부재로 인해 사실주의 경향의 작품은 있을지언정 사실주의 미학을 구현한 진정한 사실주의 작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도 실제를 분간키 어려운 뛰어난 사실적인 묘사력을 기반으로 하는 작업은 적지 않은 작가들에 의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초상화 형식의 인물화를 비롯하여 현실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싶은 풍경화, 그리고 역시 극미한 세부 표현에 초점을 맞춘 정물화 등 일련의 사실묘사를 중심으로 하는 작품은 사실주의 한 지류로 받아들이고 있다.

최근 일부 30-40대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아카데미즘에 뿌리를 둔 사실주의 조형개념을 충족시키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러시아와 중국에서 유학한 작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러시아 유학의 경우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으니까, 10여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이 사이에 수십 명이 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왔다. 이들 러시아유학파는 정통 아카데미즘을 기반으로 하여 정확한 인체해부에 근거한 인체소묘와 인물 구성을 통해 사실주의 미학을 체득하게 된다. 그런데 아직 이들에게서 인물군상, 즉 진정한 사실주의 미학을 구현하는 인물화가 나오지 않고 있다. 안타깝게도 현실감각 및 역사의식의 부족으로 인해 이전의 사실주의 회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동기부여가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벗어난 안락한 생활 탓인지,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해 시장이 요구하는 그림에 매여 있기 때문인지, 리얼리스트로서의 냉철한 시각을 찾아보기 어렵다. 미적 감수성을 자극할 만한 극적인 사회변화를 겪지 못한 나머지 사실주의 미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화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것은 아닐까.

최근 수년간 한국화단을 풍미한 포토리얼리즘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있다. 물론 포토리얼리즘은 카메라의 시각을 빌리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사실주의와는 동일시할 수 없다. 최근의 극렬한 사실적인 묘사력을 기반으로 하는 포토리얼리즘, 또는 신사실주의 회화는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대다수의 작가들이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컴퓨터를 이용해 원하는 이미지를 얻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포토리얼리즘, 또는 신사실주의 경향의 그림은 사진을 능가하는 사실적인 묘사력을 준다. 오히려 사진보다도 더 생생한 생동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카메라가 포착한 세계(정물이든, 풍경이든, 인물이든)를 보다 더 선명하게 묘사함으로써 카메라의 아웃 포커스 현상을 극복하고 있다. 물론 아웃포커스 기법을 활용하지 않고 피사체를 선명히 그려내는 사진을 이용하는 작품이 많다. 어떤 경우든 확대된 사진 크기보다 더욱 선명하고 리얼하게 묘사함으로써 시각적인 충격을 준다. 이와 같은 작품은 사진과 실제, 사진과 그림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포토리얼리즘 경향의 작업에 대해 사실주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실제를 그대로 재현하는 형식을 따르고 있기에 사실주의 양식임에는 틀림없으나, 내용으로 보아서는 사실주의 미학개념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최근의 포토리얼리즘의 시각은 실재하는 현실을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가공된 실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눈을 돌리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실주의 시각을 가장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사실주의 개념의 범주에 넣기는 어렵다. 역시 카메라를 이용하고 있는 까닭이다.

어쨌거나 최근 한국화단에서 구상미술이 부활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사실주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정통 사실주의 회화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문제는 러시아 및 중국 등지에서 아카데미즘 교육을 이수한 작가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분발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에서 사실주의 미학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 및 이론을 겸비했으므로 이를 실제의 작업으로 전환해야 한다. 사실주의 양식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적극 활용, 진정한 사실주의 회화를 상징하는 인물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이들 아카데미 유학파들에 대한 기대가 큰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사실주의 회화를 구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적인 정경을 포함하여, 6.25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냉철한 사실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히 전개되어야 한다. 역사인식이야말로 사실주의 작가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사실주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주의 회화에서 이와 같은 사실정신을 외면하고서는 결코 진정한 사실주의 미학을 실현할 수 없다. 냉철한 객관적인 시각에 바탕을 둔 역사인식을 통한 인물화를 통해서만이 사실주의 회화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 사실주의 회화는 모든 표현양식의 근본이자 회화의 본질이다. 사실주의는 그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술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는 하나의 모범이기에 그렇다.

 

<월간지 '서울아트코리아'  2010년 5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