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4) - 성순희

펜보이 2007. 8. 6. 13:17

                                                                                                                   성순희 작

 

 성순희 작품전   


고정관념을 벗어난 자유로운 의식의 항해


신항섭(미술평론가)

                                                   

예술의 경우 장르가 무엇이든지 10년 정도는 계속해야 그 성과가 나타난다. 창작이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거기에 스스로 익숙해지려면 적어도 그 정도의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기능이 숙련되고 또 세련됨으로써 비로소 미적 가치, 즉 예술성이 형성되기에 그렇다. 따라서 다재다능하기보다는 우직하게 외길로 정진하는 노력형의 인간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그러기에 미술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더라도 그 존재성이 드러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창작에 필요한 기본적인 기술을 숙달하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성순희는 다양한 소재를 하나의 화면에 자유롭게 배치하는 방식의 ‘실내정경’이라는 독특한 그림으로 20여년 가까이 지속해 왔다. 그러는 동안에 서서히 그림이 그 자신의 존재감을 만들어 놓았다. 다시 말해 어디에서건 그의 그림을 보면 ‘성순희’라는 작가의 작품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는 일정한 패턴의 작업을 지속함으로써 작품적인 완성도를 높여갈 수 있었고, 그리하여 작품은 이제 그 자신에게 작가적인 존재감을 부여하는 식으로 보답하고 있다. 이는 그가 작품에 기울인 노력과 정성 그리고 열정으로 말미암아 작품에게 확실한 주인의식을 심어준 결과이다. 그렇다. 작품적인 완성도가 높고 또 예술성을 지닌 작품은 주인을 잘 섬기게 마련이다.

그의 작업은 ‘실내정경’이라는 제한된 소재 및 공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거기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조형적인 상상의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실내정경이라는 증거는 바깥풍경이 아닌 실내라는 한정된 공간에 놓인 사물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소재의 다양성이라든가, 현실적인 공간감을 떠난 자유자재한 사물의 존재방식은 시야를 끝없이 넓혀준다. 작품에 따라서는 실내라는 한정된 공간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우주적인 이미지와도 연결된다. 여기에서 우주의 이미지는 우주색으로 상징되는 청색 또는 회색조를 배경색으로 설정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실내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공간적인 규정이라기보다는 소재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즉, 일상적인 생활기물인 탁자 의자 컵 꽃병 접시 책 인형 촛불 과일 모자 따위가 이합집산하면서 하나의 작품을 구성한다. 소재의 구성으로만 보면 실내정경이 틀림없다. 적어도 실내를 벗어난 옥외의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 소재는 일반적인 정물화와는 달리 일정한 존재방식이 없다.

 

                                                                                                                     성순희 작 

 

일상적인 실내공간이라면 바닥과 벽 천장 문 따위가 있기 마련이고, 정물은 상하전후좌우라는 존재방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서는 이와 같은 실내의 조건 및 사물의 존재방식에 대한 구속력도 없고 소재 또한 자유롭게 배치된다. 그러고 보면 소재들이 화면에 거의 여백을 허용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소재들이 밀집한 상태도 아니다. 이런 소재 배치 또는 구성은 확실히 일반성을 벗어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의 소재인 사물들은 대체적으로 형태가 명확하지 않다. 소재에 따라서는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표현주의적인 성향이 짙은 이미지로 처리된다. 어떤 부분에서는 형태가 지워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소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 즉 배경과 선명히 구분되지 않는다. 소재와 배경이 서로 맞물려 들어가는 까닭이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소재와 배경이 일체가 되는 형국이다. 그런데다가 배경은 현실적인 공간감이 없다. 실내라는 약속된 공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소재를 감싸는 배경은 차라리 무한한 우주적인 이미지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비표현적인 공간이면서도 비어 있는 공백이 아니라, 우주처럼 별을 포용하는, 살아 움직이는 공간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어쩌면 소재들이 일정한 조형적인 약속이 없이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 것도 끝없이 확장되는 우주공간의 이미지를 도입한 결과가 아닐까.

이와 같은 공간개념을 배경으로 하는 소재들의 형태는 단순화되거나 부분적인 생략 등의 기법으로 거칠게 다루어진다. 아무리 예쁘고 반듯하게 보이는 소재일지라도 구체적인 형태를 잃고 만다. 다만 빠르게 전개되는 붓질과 물감의 거친 질감으로 요약되는 표현주의적인 이미지가 오히려 형태미를 약화시키는 듯싶은 인상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사물의 형태묘사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물 고유의 형태에서 느끼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현실적인 아름다움과 회화적인 아름다움, 즉 자연미와 조형적인 해석이 가미된 인위적인 미가 어떻게 다른지 확인시키려는 입장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에서 소재가 놓이는 방식에는 어떤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적인 정물화나 실내정경에서 적용되는 구도 및 구성에서 나타나는 질서를 무시하는 듯싶다. 그리하여 작품에 따라서는 전혀 연관성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는 소재들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일정한 존재방식이 적용되지 않는 데도 불협화음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소재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형태미, 즉 독립적인 존재성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형태를 불명확하게 처리함으로써 소재의 존재감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성순희 작

 

어찌 보면 그의 작업은 옛 유물 발굴현장을 연상시킨다. 오랜 세월 흙에 묻혀 있다가 천천히 그 모양을 드러내는 유물은 흙과 일체가 되어 있다. 흙이 감싸고 있는 그 상황은 흙과의 한 몸처럼 보인다. 실제로 유물은 결과적으로 흙으로 되돌려진다는 점에서도 한 몸일 수밖에 없다. 이렇듯이 그의 작업은 소재와 배경을 일치시킴으로써 일상적인 공간감을 떠나 무중력 상태의 우주를 자유로이 유영하는 듯싶다.

접시를 캔버스의 이미지로 대체하는 작품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림 속의 접시와 그 접시 속의 그림이라는 중층의 공간개념을 가지고 있는 작품은 그 발상이 특이하다. 그런데 이처럼 접시 그림에서도 소재와 배경은 서로 유리되지 않고 일체가 된다. 물론 소품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정물의 형식을 따랐다. 소품에서는 주로 꽃을 소재로 다룸으로써 장식적인 아름다움을 겨냥하고 있다. 이에 반해 캔버스가 커지면 다양한 소재들이 어딘가에 놓여 있다는 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유롭게 공간을 유영한다. 둥근 형태의 접시 모양은 그 자체가 소우주를 연상시키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접시라는 특정의 이미지, 그 틀을 깨고 궁륭의 이미지에 근접하는 것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일반적인 정물의 구성을 수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더라도 탁자 또는 바닥에 정물이 놓이는 방식과는 다른 공간 구성을 지향한다. 그래서 어떤 형식이 되더라도 그의 작품은 그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는 개별적인 조형언어 및 어법을 확립했음을 의미한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어디에서나 작품을 보는 순간 그 작가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는 것으로써 개별적인 형식미가 구현되는 것이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은 그 어떤 소재 및 구성의 작품일지라도 그 자신만의 형식미로 변환하는 힘과 설득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성순희 작

 

그런데 최근 작업에서는 보다 현실적인 공간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전통회화인 민화에서 착상한 ‘책거리’ 이미지를 소재로 한 작업이 그렇다. 책거리는 문방사우를 중심으로 한 선비들의 책장 또는 장식장을 소재로 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민화의 표현양식이 갖고 있는 독특한 조형성을 실현하고 있다. 시점이동 또는 원근법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경직된 구조는 ‘책거리’ 그림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하지만 ‘책거리’ 그림은 그 소재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더불어 경직된 평면적인 구성이 되레 해학적인 이미지를 야기한다. 엄격한 기하학적인 구조의 경직된 이미지인데도 심각하거나 따분하지 않다. 다양한 소재의 배치 및 구성, 그리고 소실점을 갖지 않는 태연한 조형어법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파격이다. 이러한 의외성은 미적 쾌감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는 ‘책거리’ 그림을 현실공간으로 끌어들여 평면적인 이미지에서 입체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놓고 있다. 따라서 민화 속에서 잠자고 있던 옛 시간이 불현듯 깨어나 우리의 현실적인 생활공간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고 있다는 기분이다. 평면적인 구성에서 단지 입체적인 공간감을 만들어놓음으로써 과거가 현실이 되는 기막힌 반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책거리’ 그림 역시 민화와 마찬가지로 원근법이 부실하다. 소실점이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그 어떤 그림보다도 생생한 현실감이 묻어난다.

 

 성순희 작

 

그의 ‘책거리’ 그림이 오늘 우리들 실내공간에 놓여 있는 장식장을 재현한 사실주의 그림보다 한층 생동감이 강한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기존의 조형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민화만의 독자적인 형식미에 있지 않을까. 간결하면서도 힘찬 구성 및 구도가 만들어내는 명료한 이미지, 즉 원근법을 의식하지 않는 대담한 평면적인 구조를 원용한데서 그 비밀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든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통합하는 그의 ‘책거리’ 그림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혀 새로운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창의적인 그림이 가져다주는 미적 쾌감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지 모른다. 그의 ‘책거리’ 그림은 전통회화의 금맥인 민화에서 찾아낸 현대적인 해석의 새로운 형식미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그의 그림은 실내공간이라는 한정된 상황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닫힌 공간으로부터 해방된 시각적인 자유를 만끽한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표현적인 이미지 및 공간개념은 열린 시각 및 자유로운 미의식과 미적 감각의 소산이다. 어쩌면 닫힌 공간일 수밖에 없는 현대 도시인의 삶의 공간이 주는 단절과 소외감을 벗어나 무한한 심적인 자유를 꿈꿀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는지 모른다. 그의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몇 가지 특징적인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은 시각적인 개방감과 더불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제공한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사물의 존재방식과 사실적인 형태미에 얽매이지 않는 감성적인 표현을 통해 자유로운 항해를 꿈꾸는 예술가의 맑은 영혼을 투시할 수 있다. 그 맑은 영혼은 메마른 현대인의 감정조차 거뜬히 감염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성순희 작


<'성순희 전'은 9월4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진화랑(738-7570)에서 열립니다>

'명작의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작의 길 (6) - 이상원  (0) 2007.08.16
명작의 길 (5) - 권기자  (0) 2007.08.10
명작의 길 (3) - 김혜진의 '박꽃'  (0) 2007.08.02
작가와 작품 (2) - 이정웅  (0) 2007.07.18
작가와 작품 - 전봉열  (0) 2007.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