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작가와 작품 (2) - 이정웅

펜보이 2007. 7. 18. 18:35
 

   

    

 

                                                                                                            이정웅 작  "붓"

                                                                                                                      

 이정웅의 작품세계

 

현실을 빙자한 의식의 그림자

-‘붓’ 연작을 중심으로-


신항섭 (미술평론가)


화가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다. 하나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신경을 통해 지각하는 현실적인 눈이고, 다른 하나는 가상의 공간개념이 적용된 조형세계를 조망하는 눈이다. 조형세계를 조망하는 눈은 탐미적이기 마련이다. 미적 감수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탐하는 것이다. 조형적인 아름다움은 작가의 심미안에 의해 탐색되어지는 새로운 형식미를 통해 구현된다. 이때 새로운 형식미는 미적인 가치를 전제로 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바꾸어 말해 미적인 가치란 창의적인 형식미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정웅은 조형세계를 조망하는 눈이 맑다. 그러면서도 아주 예리하고 매섭다. 마치 비수 같은 날카로움과 냉철함 그리고 위협적인 면이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과 마주하면 섬뜩함을 느낀다. 도저히 그림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극미한 사실성에 경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 놀라움은 하이퍼리얼리즘, 포토리얼리즘의 세계가 그려내는 극명한 사실성의 영역에서도 벗어나 있다는 데 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도대체 붓 자국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사진보다도 더 사실적이어서 사진의 경계마저 간단히 넘어선다. 사진의 세계조차 넘어버렸다면 그가 도달한 세계는 정녕 무엇인가. 그야말로 신기, 즉 귀신의 재주에 필적하는 솜씨가 아니고 무엇이랴.

귀신같은 묘사력은 실제와의 비교에서 그 진위를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인간의 기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말하는데,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보면 도무지 인간의 손을 거쳤다고 믿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붓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아무리 세필로 그린다고 할지라도 자세히 보면 어딘가 붓의 흔적이 있기 마련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경우에는 그런 자국조차 남기지 않으니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전시장에서 ‘사진이 분명하다’며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처럼 사람의 눈을 속이는 극렬한 묘사력은 형태의 정확성 및 색채감각이 뛰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사실성을 결정짓는 첫째 요인은 색채이미지인지 모른다. 그림과 현실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케 하는 것은 형태에 앞서 색채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적인 색채이미지를 그대로 번안하는 그의 색채감각은 타고난 것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그림과 현실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드는 그의 색채감각은 태생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다. 손의 기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손을 사역하는 것은 실제로 착각하게 만드는 눈이기에 그렇다.

 

            

 

사물의 형태 및 색채를 분별하는 눈이 정확하지 않으면 사실적인 표현을 얻기 힘들다. 회화에서 말하는 눈의 정확성은 단순히 형태를 정확히 인식하는, 시지각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회화에서 요구되는 정확한 눈이란 형태에 대한 정확한 비례감각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비례감각이 정확하지 않으면 아무리 묘사력이 뛰어나더라도 형태는 일그러지기 십상이다. 따라서 정확한 비례감각은 정확한 사실적인 묘사력을 선도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정웅은 이렇듯이 사실주의 회화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요건을 빈틈없이 갖추었다. 단순히 형태묘사를 위주로 하는 기술적인 완성에 그치지 않고 사물의 표면질감을 표현하는 감각이 뛰어나다. 그의 그림을 손끝으로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것도 사물의 질감표현에서 실제와 착각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그림은 단순히 손의 재능, 즉 기술적인 완성도만을 평가하는데 그칠 것인가. 조형적인 창의성, 즉 개별적인 형식은 없는 것인가.  

어떤 경우에도 그림 속에 묘사되는 소재의 형태는 단지 캔버스 또는 한지 위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을 빙자한 가상의 세계일 따름이다. 현실을 그대로 옮겨다 놓는 재현적인 그림은 더욱 그렇다. 사실주의 회화의 일차적인 성공요인은 실제에 육박하는 사실성을 실현하는데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는 기술적인 완성도로 해결될 문제인 듯싶다. 하지만 현실과 다른 미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실성은 예술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다. 사실성과 예술성은 아주 미묘한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미의식 및 미적 감각의 개입여부가 관건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그림은 일단 기술적인 면에서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현실에 밀착해 있다. 착시, 또는 환각을 유도할 정도로 현실적인 이미지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착시현상 및 환각은 사실주의 회화에서는 당연히 요구되는 덕목의 하나이지만, 그의 작품은 그런 당연함마저 초월하여 그 자신을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독자적인 조형공간에 세운다. 단지 기술적인 완성도만으로도 그는 확연히 남과 다른 경지에 들어가 있다. 그 독자적인 조형공간이야말로 그가 세운 예술적인 성과일 수 있다.

 

  이정웅 작  '붓'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을 캔버스나 한지와 같은 평면적인 공간에 옮겨다 놓는 사실주의 회화는 일단 시각적인 놀라움 또는 미적 쾌감을 겨냥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눈을 속이는 가상공간을 실현하게 되는 셈이다. 사실적인 그림은 제한적인 벽면에 현실과 유사한 가상공간을 설정함으로써 공간 및 시야의 확장을 경험하게 만든다. 조그만 평면적인 공간에 그림의 소재 및 대상이 존재하는 현실적인 공간을 불러들임으로써 세계를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캔버스 또는 한지라는 사각의 평면공간에 가상공간을 구축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미적 감정과 미의식이 유희할 수 있는 탐미적인 영역을 소유한다. 그리하여 소재의 선택과 소재가 놓이는 자리, 그리고 여러 가지 소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구성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지적조작의 즐거움을 탐한다. 어차피 정물화는 주어진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풍경화보다 적극적인 지적조작의 개입을 외면할 수 없다.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소극적인 태도는 화가 자신의 조형적인 이상 또는 회화적인 사상을 주입하는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어서 소재의 선택, 배치, 구성이라는 조형과 관련된 일련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화가의 개별적인 미적 감수성 및 지적인 이해가 선행하기 마련이다.

이정웅은 기술적으로는 이미 자신의 능력의 한계마저 넘어버렸다고 할 수 있으니 귀신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니 기술적인 문제를 벗어나 구극의 탐미적인 세계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시신경에 의해 지각되는 현상적인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 지적 통찰을 유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감정의 샤워를 맛보게 하는 심미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서양미학에서 이룩한 조형적인 성과와는 다른 동양적인 정관의 세계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어쩌면 그가 유채를 사용하면서도 그 물질적인 특성에 강조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 유채물감이 가지고 있는 두터운 질감이나 극렬한 사실성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시각적인 이미지보다는 그림 속에 투영된 정신적인 가치를 현현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그림에서는 유채라는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물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물성이 감춰지는 대신에 소재가 가지고 있는 표면질감을 극렬히 표현함으로써 시각적인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단지 모양이 똑 같다는 차원이 아니라, 마치 실물을 마주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뜨린다. 그런 착각을 유도하는 기술은 이미 마술의 차원이다.   

 

  

 

그럼에도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놀라운 묘사력 이면에 자리하는 정신적인 가치를 탐닉한다. 눈에 보이는 실체를 감싸고 있는 공간, 또는 여백을 통해 포진하는 정서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의 작품에서 소재가 놓여 있는 주변 공간은 그 어떤 형태의 물질적인 이미지도 보이지 않는, 비어 있는 상황이다.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암시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비표현적인 공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비표현적인 공간이 예사롭지 않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간이 아니라, 물상, 즉 그림의 소재를 중심에 둔 나머지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소재에 대응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공간이라는 자격을 획득한다. 그러기에 소재가 존재함으로써 더불어 생기는 여백, 즉 묘사된 이미지에 대응하는 비표현적인 공간으로 자리하게 된다. 물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 아니라는 뜻이다. 소재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공간, 즉 소재가 가지고 있는 조형적인 특징과 관련한 사유의 공간인 것이다. 바꾸어 말해 소재가 회화적인 가치, 또는 조형적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공간이 된다. 

물론 여기에서 소재가 존재하는 공간은 사각의 평면공간으로서 캔버스 또는 종이라는 물질의 영역이 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마련된,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한정된 공간이 되는 것이다. 최근 붓을 소재로 한 연작에서는 캔버스 대신에 한지를 사용하고 있는데, 한지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흰색이지만 그 자체가 독립적인 물성을 지닌 오브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표현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없는 듯싶으나 한지에는 고유의 질감이 있고 또한 표정이 있다. 기계적인 생산품이 아니라 수공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기에 비록 눈에 보이는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표현적인 공간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작품에 따라서는 소재를 감싸고 있는 주변 공간을 추상적인 이미지로 채우기도 한다. 이럴 때는 보다 적극적인 표현공간이 된다. 소재와 더불어 화면을 구성하는 적극적인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추상적인 이미지는 사실적인 이미지로 존재하는 소재를 돕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문다. 표현적인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인 형태를 가지는 소재에게 부여되는 주도권을 침범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오히려 추상적인 이미지는 사실적인 이미지의 소재가 돋보이도록 보조적인 수단으로 물러선다.

 

 

 

추상적인 이미지로 처리되는 작품은 대체로 동적인 분위기를 지닌다. 비표현적인 여백의 개념이 적용된 작업이 정적인 분위기라면 표현적인 개념으로서의 추상적인 이미지는 동적인 행위성을 지니게 된다. 이때 추상적인 이미지는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색반이나 색점 또는 붓 자국과 같은 형태로서 화면에 산발적으로 나타난다. 규칙성이 없이 무작위적으로 표정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산개되는 추상적인 이미지들은 전체적으로 어떤 일정한 리듬을 유지한다. 크기라든가 간격 등에서 치밀한 구조식을 따르고 있다는 심증이 강하다. 이는 우연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효과를 겨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추상적인 이미지 가운데서도 색반이나 색점 또는 붓 자국과는 달리 한지 자체의 물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한지에 먹물을 듬뿍 적셔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도구를 이용하여 문지르면 물에 젖은 한지가 밀려나면서 질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이미지는 한지의 물성에 의한 질감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형식의 작품은 먹과 물 그리고 한지가 만났을 때 거기에 물리적인 힘을 가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물성의 표정을 표현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이는 현대회화에서 쓰이는 수법 중의 하나인데, 달리 보면 전통적인 사실주의 미학과는 다른 표현영역에 들어가 있음을 선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그의 그림은 전통적인 사실주의 미학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명암기법이 다르다. 그의 그림 속에 드러나는 명암기법은 담백하다. 유채를 여러 차례 겹쳐 칠함으로써 깊이와 두께가 만들어지는 전통적인 명암기법과 달리 아주 얇고 투명하다. 유채물감의 존재를 거의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미량의 물감이 쓰이는 듯싶을 뿐만 아니라, 속이 들여다보일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한 두 차례의 작업으로 작업을 끝내는 것은 아니다. 대여섯 차례의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극렬한 사실성은 물감의 질량이나 질감마저 지배한다.

그 자신의 눈과 소재 사이에 존재하는 공기층마저 존재하지 않는 듯한 투명성은 기존의 사실주의 미학이 도달하지 못한 현대미학의 성과이다. 유채물감의 질량이나 질감을 증발시킨 투명성이야말로 현대미학의 확실한 증표인 것이다. 동시에 이는 물질성을 초월하여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동양적인 미학의 개가이기도 하다. 물질성을 증발시킴으로써 실제보다 과장되어 보이는 전통적인 사실주의와 달리 실제와 혼동케 하는 완벽한 허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실로 그의 그림을 보면서 한 순간 홀로그램을 보는 듯싶은 감회에 사로잡히기도 하는데, 이는 명징한 사실성으로 인해 시지각이 기만당한 결과이다. 

 

               

                                                                                                                    이정웅 작  "붓" 

 

어쩌면 그가 캔버스 대신에 한지를 소지로 채택하는 것은 동양의 재료인 한지의 상징성 때문인지 모른다. 즉 여백의 개념을 실현한 수묵화는 동양의 회화를 상징하는데 그 중심에는 한지가 자리한다. 동양 회화의 상징적인 재료를 채용함으로써 동양적인 정서를 끌어들일 수 있음은 자명하다. 재료의 선택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미학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하이퍼리얼리즘이나 포토리얼리즘과 다른 위치에 서는 것도 이렇듯이 동양의 재료를 채용하는 데서 오는 결과일 수도 있다. 이는 물성을 중시하는 현대회화의 방법론과 상통한다. 그러면서도 그 발상은 여백이라는 동양화의 조형개념에 근거한다. 형태를 에워싼 공간, 즉 비어 있는 부분에 해당하는 여백은 동양화에서는 정신적인 거처이기에 그렇다. 여백은 정중동을 암시하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사유의 그림자가 깃들이고 생명의 율동이 일어나는 생동하는 공간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비어 있는 허무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묵화는 사유의 그림자가 옹호하는 여백을 통해 생기하는, 즉 생동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한지를 채용한 그의 그림들은 캔버스 작업과는 확실히 다르다. 배경을 추상적으로 처리하지 않은 소지 자체의 상태에 있을 때 사실성은 더욱 강렬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한지는 그 자체로 정물이 놓이는 탁자 또는 바닥을 훌륭히 대체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한지를 사용하는 작업의 경우 한지는 실재하는 배경이 될 뿐만 아니라, 소재가 놓이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한지는 가공의 현실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지는 실재하는 오브제이자 현실적인 공간이 된다. 따라서 소재는 현실적인 공간에 들어와 허상이 되는 미묘한 입장에 놓인다.

이정웅의 작업에는 일정한 조형적인 원칙이 존재한다. 동양의 음양사상에 바탕을 둔 이원적인 구조 즉, 상대적인 개념의 대립 및 조화를 모색하는 형국이다. 수묵화와 유화, 추상과 구상, 형상과 실루엣, 동적인 이미지와 정적인 이미지, 행위와 정태, 인위와 무위, 실제와 허상, 유채와 수채 따위의 이원적이고 상반적인 개념을 병치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화면은 항상 팽팽한 대립상태의 긴장감으로 채워진다. 좋은 의미에서 느슨한 이미지가 아니라, 생기 넘치는 발랄한 이미지인 것이다. 상대적이고 상반되는 이미지의 대립은 시각적인 긴장을 발생시킴과 동시에 조형적인 아름다움이라는 통일된 목표를 위해 극적인 화해와 조화의 길을 모색한다.

 

                                                 

 

구상과 추상은 그 형태가치로 보자면 대립적인 관계일 뿐 조화로운 공존의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상반된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에 놓았을 때 의외의 결과에 놀란다. 오히려 사실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데 한층 효과적이라는 사실과 직면한다. 형상과 실루엣의 대비만 하더라도 그의 경우는 일반적인 정물화의 명암기법과는 달리 극적인 표현을 즐긴다. 그림자의 윤곽선을 칼로 자른 듯이 명쾌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선명한 형태의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그 시각적인 명료함은 지적인 이해와 더불어 미적 쾌감으로 작용한다. 이는 실제와는 다른 과장된 표현이다. 그런가 하면 행위와 정태라는 상반된 정서를 내포하기도 한다. ‘붓’ 연작은 행위를 실증하면서 동시에 정태상태를 보여준다. 행위성은 붓이 움직인 자국, 즉 먹물을 묻힌 붓이 한지 위에 선을 긋는다든가 먹물을 떨어뜨린 자국을 통해 암시된다. 그리고 그 행위를 주도한 붓은 먹물을 머금은 채 정태(정지)상태로 누워있다. 또한 거꾸로 걸린 붓에서 먹물이 떨어져 한지의 아랫부분이 먹물로 젖어 있는 작품도 있다.

이러한 작업은 행위가 끝난 직후의 상황을 시사한다. 이처럼 행위와 정태라는 상반된 정서를 하나의 화면에 놓음으로써 극적인 긴장을 가져온다. 또한 정물, 즉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재현하고 있으나 행위를 주도한 흔적을 남김으로써 시간성을 개입시키고 있다. 정물에서 행위와 시간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표현주의적인 작품에서는 격렬한 붓의 자국을 남김으로써 행위성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시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방금 작업을 끝냈음을 시사하는 붓 자국과 먹물이 그대로 배어 있는 붓이 시간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이 전통적인 사실주의와 다른 새로운 미학적인 성과로서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난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부분은 수묵의 흔적, 즉 붓의 행위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자리하는 공간이다. 문인화나 서예작품에 쓰이는 한지는 오브제이기 전에 평면공간이다. 그러나 붓이 놓인 곳은 물상이 자리하는 입체적인 공간으로서의 장소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평면공간에서 어떻게 이차원적인 평면과 삼차원적인 입체공간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그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개별성을 명쾌하게 드러낸다. 한지라는 재료는 변할 수 없는 사각의 평면공간이다. 그러나 한지에 사실적인 형태가 들어옴으로써 돌연히 입체적인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 또한 그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마술이다.

한편 수묵화와 유채화가 하나의 화면에서 동시에 자리한다. 수묵으로 그은 선이나 점 또는 먹물의 흔적은 한지 위에 그려지는 수묵화이다. 다시 말해 유채로 묘사된 이미지가 아니라, 수묵으로 직접 표현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수묵의 흔적은 실체이자 실제이다. 수묵화라는 실체인 것이다. 그 실체가 유채로 그린 붓의 이미지와 만나 유채화로 둔갑한다. 그런데도 유채로 묘사한 붓의 형태와 함께 함으로써 응당 수묵의 흔적도 유채로 그린 것이려니 착각하도록 유도한다. 극렬하게 묘사되는 붓의 형태는 분명 서구의 사실주의, 즉 유채화이기에 붓 자국이나 먹물의 흔적이 실제의 수묵이라고는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수묵의 흔적이 실제의 수묵이 아닌, 유채로 묘사한 경우도 있다. 수묵의 흔적을 유채로 묘사한 경우에도 누구든지 수묵의 표현으로 감쪽같이 속고 만다. 한마디로 그의 묘사력은 걸리는 데가 없이 자유자재이다. 수묵이 가지고 있는 재료적인 특성까지도 유채로 표현한다는 것은 신묘한 귀신놀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 그의 작품에서는 수묵과 유채라는 재료의 구분조차 무의미해 보인다. 따라서 그는 애초부터 수묵과 유채의 차이 또는 경계를 전혀 문제시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아니, 극복의 대상조차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튼 어떻게 수묵화와 유채화가 하나의 화면에서 충돌 없이 화합하고 조화로운 관계가 될 수 있는지 경이로운 일이다. 수묵과 유채가 동시에 쓰이는 것은 현대회화에서는 다반사가 되었으니 결코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수묵화와 유채화가 공존하는데도 마치 유채화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회화적인 창의성이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지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물질성과 정신성의 조화이기도 하다. 그림에서 보이는 붓의 행위가 남긴 자국, 즉 선이나 먹물이 번져나간 이미지가 정신성이라면 붓의 형태는 물질성이다. 정신성은 미의식 및 미적 감각이 지시한 행위의 결과물이기에 정신적인 가치인 셈이다. 이에 반해 붓은 그 자체로서 물질적인 가치인 것이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형이상학의 세계와 형이하학의 세계가 만나 상생의 관계를 모색하는 상황이다. 

그런가 하면 유채와 수채라는 이질적인 재료가 하나의 화면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융화된다. 따지고 보면 동서양의 재료가 한 곳에서 만난다는 의미이지만, 이는 동서양의 문화적인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질적인 재료가 만나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를 교묘히 하나로 통합시키는 발상이 놀랍다. 동양의 수묵과 서양의 유채가 서로 다른 입장에서 공존하면서 전혀 새로운 의미의 조형공간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의 작업은 새로운 시각적인 체험이자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는 순전히 발상의 전환, 또는 방법론의 개가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사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는 사실주의 회화가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표현영역의 선언이기도하다. 서구미학에 따르는데 만족하지 않고 동양적인 재료 및 정서를 도입함으로써 예기치 못한 새로운 형태의 조형세계를 열어놓게 된 것이다. 아울러 동서양의 문화적인 이질성을 극복했다는 점이다. 묘사기법에서도 서구의 사실주의와 동양의 수묵기법이 공존하는 형국이다. 뿐더러 재료 역시 동양재료 및 서구재료가 함께 한다.

 

                                                   이정웅 작  "붓"

 

이처럼 서로 다른 입장을 혼합한 형태이미지만, 어느 쪽의 입장에서 보더라고 상충적이지 않다. 서구의 사실주의에 익숙한 시각으로도 낯설지 않고 동양적인 시각에서는 친숙한 소재 및 재료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품은 일단, 어느 쪽에도 낯설지 않은 보편적인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서구의 사실주의 미학에다 동양의 정관의 세계를 접목함으로써 사실주의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 있다.

단순히 형태를 보고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그 형태가 놓인 주변 공간에 부여된, 정관의 세계를 의식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을 열어놓은 것이다. 비록 시각적으로는 검출되지 않는 비표현적인 공간이지만 사유로서 그 비어 있는 부분을 능히 채울 수 있다는 논리다. 비어 있는 듯해도 붓의 형태나 붓의 자국 또는 먹물 자국이 부여된 강렬한 사실성은 그 주변까지 생동감으로 채운다. 생동감이야말로 그의 작품이 지향하는 본질이다. 물론 문인화에서 추구하는 생동감 역시 궁극의 예술적인 가치라는 점에서 서로 다를 수 없다. 그는 서구적인 조형개념에다 동양적인 회화사상을 접복시킴으로써 새로운 형식미 및 방법론을 체현한 것이다. 

이로써 그의 작업은 사실주의 회화가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물론 하이퍼리얼리즘이나 포토리얼리즘과 마찬가지로 현대미학이 적용된 성과이긴 하다. 여기에서 새삼 방법론의 문제를 대입시키면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웅의 작품은 현대회화가 열어놓은 다양한 조형적인 변주에 능숙하게 반응한다. 그리하여 확대된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전개한다. 화면이 확장되고 형태가 확대될수록 그로부터 받아들이는 시각적인 충격은 크게 마련이다. 화면이 커질수록 소재의 형태가 커짐에도 불구하고 기이하지 않은 것 또한 경이로운 일이다. 그렇다. 소재의 형태가 확대되면 될수록 시각적인 충격 및 감동은 커지게 된다. 소재의 형태가 커질지라도 사실성은 약화되지 않는 까닭이다. 그만큼 그의 사질적인 묘사력은 치밀하여 밀도가 높다.

이정웅의 작품은 현대회화에 대한 새로운 제안으로서 손색없다. 서양의 물질적인 가치와 동양의 정신적인 가치가 조화를 이루는 어느 지점을 상정하는 까닭이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제안에 대한 멋진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형태적인(구상적인) 가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비등하고 있는 현실에서 볼 때 더욱 그렇다. 


<2006년 발행한 '이정웅화집' 서문입니다>

'명작의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작의 길 (6) - 이상원  (0) 2007.08.16
명작의 길 (5) - 권기자  (0) 2007.08.10
명작의 길 (4) - 성순희  (0) 2007.08.06
명작의 길 (3) - 김혜진의 '박꽃'  (0) 2007.08.02
작가와 작품 (2) - 이정웅  (0) 2007.07.18
작가와 작품 - 전봉열  (0) 2007.07.11